[ 6·25전쟁 70주년 연속기획 ] 스탈린, 중공군 참전을 끈질기게 설득
[ 6·25전쟁 70주년 연속기획 ] 스탈린, 중공군 참전을 끈질기게 설득
  • 송종환 미래한국 편집고문·경남대 석좌교수
  • 승인 2020.07.16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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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 토의하고 있는 중공군. 마오쪄둥은 1951년 10월 8일 평양 주재 중국대사를 통해 중공의용군의 참전을 김일성에게 통보했다.
전술 토의하고 있는 중공군. 마오쪄둥은 1951년 10월 8일 평양 주재 중국대사를 통해 중공의용군의 참전을 김일성에게 통보했다.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후 북한군이 후퇴를 거듭함에 따라 절망 상태에 빠진 김일성은 9월 28일 노동당 중앙위 정치위원회를 개최했다. 이 회의는 “적군이 38선을 돌파하게 되면 소련군이 직접 지원해줄 것과 소련군의 직접지원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중국과 기타 공산 국가들로 국제의용군을 조직, 원조하여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스탈린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스탈린은 10월 1일 새벽 2시 50분에 9월 29일자 김일성 박헌영 공동명의 전문을 받은 후 3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 “최소한 5~6개 사단의 중국의용군을 38선 방향으로 진격시켜 북한군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는 전문을 발송했다.

상기 스탈린의 중국 참전 요청 전문을 받은 마오쩌둥은 10월 2일 스탈린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중국은 당초에는 적군이 38선을 돌파할 경우 의용군 4개 사단을 파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지도자들과 세부 검토를 한 결과 (1) 중공군의 준비 부족, (2) 중공군 참전 시 미·중 전쟁이 될 가능성이 있고 이 경우 중· 소 동맹조약에 의거, 소련군의 참전 불가피하며, (3) 중공군 참전 시 미국이 중국 내 반동세력의 준동을 사주할 가능성 등의 이유를 내세워 당분간은 의용군을 파견치 않고 인내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앞으로 북한군은 유격전 형태로 투쟁해야 한다”는 입장을 주장했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 10월 5일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미국은 현 상태에서는 큰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일본은 군사적 잠재력은 있으나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이다. 소련을 배후에 둔 중공의용군 참전은 한반도 문제를 북한에 유리한 방향으로 미국이 양보토록 압박하고 한반도가 대륙 침략의 도약대가 될 가능성을 사전 방지할 수 있고 미국이 대만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의 전쟁 참전을 촉구했다.

스탈린은 이어 10월 8일 김일성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마오쩌둥이 10월 7일 9개 사단을 조만간 북한에 파견할 예정임을 자신에게 알려왔음”을 통보하면서 김일성이 적군과의 전투에서 결연히 임할 것을 촉구했다. 마오쩌둥도 10월 8일 밤 평양주재 중국대사를 통해 중공의용군의 참전을 김일성에게 통보했다.

그러나 10월 9-10일간 중국의 북한 지원 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한 저우언라이와 린뱌오(林彪)가 여러 이유를 내세워 마오쩌둥의 참전 결정을 번복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스탈린은 최후 카드를 제시했다. 10월 13일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 지원에 대해 미국이 중국을 공격 보복할 가능성이 없다. 지금 중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북한은 매우 짧은 시일 내에 붕괴될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중국 동북지역에 북한 인민군을 재배치하고 소련은 연해주 지역에 북한계 소련인과 부상병, 노약자를 이동시켜 북한 재진입을 위한 피난처를 각기 제공하자”고 하면서 북한을 포기하는 최종 제의를 중국 측에 하고, 같은 날 스티코프 대사를 통해 북한군 철수 계획을 김일성에게 실제로 제시했다.

이는 마오쩌둥의 남침전쟁 참전 최종 결심을 유도하는 마지막 카드였다. 스탈린은 이와 같이 중국을 남침전쟁에 필사적으로 끌어들이도록 노력을 했으며 마지막에는 북한 포기라는 최악의 상황을 제시해 중공의 남침전쟁 참전을 얻어냈다.

1950년 11월 미 공군이 미그기를 격추함으로써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스탈린은 중공군이 한반도에 진입할 무렵 유엔군 전투기들로부터 중공군을 보호하기 위해 소련 전투기들을 남침전쟁에 파견했다. 소련은 참전 사실을 감추기 위해 전투기에는 중공 국적 표지를 하고 조종사들은 중공 공군복을 입게 했다. 그들은 주로 청천강 이북~압록강 이남지역인 소위 ‘미그회랑’에서 유엔 전투기와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다.

1953년 7월 27일 정전 때까지 소련은 14개 전투비행사단 2만6000명의 병력을 중국의 선양, 안산, 안둥(현재 단둥) 등 중공군 기지에 주둔시켰고 총 6만3229회 출격해 1790여 회의 공중전을 벌였으며 모두 335대의 비행기와 120명의 조종사를 잃었다는 사실도 공개된 소련 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김일성의 6·25 남침은 스탈린이 최종 결정하였다.(전쟁기념관 전시물)
김일성의 6·25 남침은 스탈린이 최종 결정하였다.(전쟁기념관 전시물)

중공군의 6·25 남침전쟁 참전 이유에 대한 중국 측의 연구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에 대한 필자의 연구는 주로 공개된 소련 비밀문서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중국 측 자료에 의한 중국 측 학자의 연구를 기다려 왔다.

한양대 평화연구소는 2018년 6월 20일 김동길 북경대 역사학과 종신교수의 ‘1950년 10월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원인으로 본 중국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게시했다. 게시된 논문은 짧았지만 중공이 6·25전쟁에 참전한 원인과 경위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소개하고자 한다.

스탈린은 무력통일을 위한 김일성의 남침은 중국 지도부가 이를 찬성할 때만 개시될 수 있다는 조건부 승인에 마오쩌둥을 끌어들였다. 마오쩌둥은 미군이 38선을 넘어야 남침전쟁에 참전하고 참전하더라도 중국은 북한 인민군으로 위장해 지원군으로 참전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6·25전쟁 발발 후 중국 내 경제적 혼란에 더해 9월에 중·미 간 3차 대전이 일어나 중국이 필패할 것이라는 소문이 확산되고 일본군이 만주지역으로, 국민당군은 화남(華南)으로, 미군은 화중(華中)지역으로 진격해 중공 정권이 망하고 국민당 정부가 대륙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변천사상(變遷思想)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중공의 통치 기반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잇몸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안보관의 영향과 북한이 우세를 점하는 기회를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7월 2일 마오쩌둥은 “미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파병할 것”을 스탈린과 합의하고 7월 12일 “만일 북한이 원한다면 중국은 군대를 파견할 수 있고 이를 위하여 32만 명 4개 군단이 동북아에 준비되어 있다. 이에 대한 김일성의 결정을 8월 10일까지 알려줄 것”을 북한군 부총참모장 이상조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앞에서 스탈린이 7월 중 중공군 파병을 촉구했다는 비밀전문과는 달리 김동길 교수는 스탈린이 6·25전쟁 초기 북한의 승리에 크게 만족해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중공군 조기 파병 요구에 침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역전되어 유엔군의 38선 돌파가 임박하자 참전에 대한 중국의 적극성은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10월 2일 밤과 10월 3일 마오쩌둥은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출병 보류를 각각 통보했다. 그러나 10월 5일 마오쩌둥은 소련의 공중 엄호와 무기 제공 조건으로 출병을 재결정했다. 10월 11일 스탈린이 즉각적인 공중 엄호 제공과 무기 제공에 난색을 표하자 중국 측은 지체 없이 참전 불가를 결정했다. 중국에 있어 북한은 완충지대도 아니었고 아시아와 세계로 공산혁명을 확산시키기 위해 출병한다는 것은 거짓이고 오로지 중공군의 안전이 출병 결정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두 가지 일로 파병을 재차 결정하게 되었다. 10월 10일 베빈 영국 외상이 “중국 국경과 인접 지역에는 한국군 이외의 어떠한 부대도 배치되지 않을 것”을 저우언라이 외상에게 통보했다. 이어 10월 13일 오후 개최된 정치국 긴급회의에서 펑더화이(彭德懷)가 10월 12일 연안파인 북한의 박일우 내무상으로부터 청취한 군사첩보, 즉 맥아더 장군 지휘 하의 미군이 9월 26일 미 합동참모부의 지시에 의거, 9월 28일 맥아더 장군이 설정한 평양 이북의 정주-군우리-영원-함흥으로 이어지는 맥아더 라인에서 진격을 멈출 것이라고 하면서 참전을 주장했다. 이 경우 중국은 싸우지 않고 국경선을 압록강에서 평양 이북지역까지 확대할 수 있고 동시에 북한군의 만주로의 전면적 철수를 방지함으로써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고 만주지역에 집중된 기간산업을 보호하는 부수적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10월 19일 중공군은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펑더화이 중공지원군 총사령은 10월 20일 아침 김일성·박헌영을 함께 만났다. 펑은 이 자리에서 소련군의 공군 지원이 없더라도 반드시 적을 섬멸해 한반도의 공산혁명, 즉, 적화통일을 이루겠다는 중공 지도부의 의지를 전달했다.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은 바로 그날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양 점령을 완료하고 선봉대는 각 방면에서 한·중 국경 30∼40마일 전방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이에 마오쩌둥은 10월 21일 “미군과 남조선 군대가 신속하게 대거 진격하여 중·조 국경까지 가까이 접근해 왔기 때문에 원래의 방어 중심 계획을 포기하고 기동전을 벌여 적을 섬멸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하도록 펑더화이에게 지시했다. 이로써 2년 9개월의 ‘항미 원조’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한 후 9월 28일 한국군과 함께 서울을 수복하고 북한군이 밀리게 되자 스탈린은 9월 30일 소련공산당 정치국회의를 소집, 협의를 한 후 외무성으로 하여금 유엔에 제출할 소련 측 정전결의안을 초안하도록 지시했다. 스탈린은 10월 1일 즉각 정전, 외국군 철수, 국제 감시 하 총선 등 요지의 초안을 마오쩌둥과 협의 후 유엔주재 소련대표부로 타전했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후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유엔총회 정치위원회는 10월 4일 상기 소련 측 결의안을 부결시켰으며 이어 유엔총회는 찬성 47, 반대 5, 기권 7표로 북한 패배 후 유엔 주관으로 한반도에서의 통일 자주 민주국가 수립을 위한 선거 실시 등 요지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동 결의안 표결이 있는 날 워커 장군의 1기병부대의 선두는 38선을 돌파했다.
 

다리를 잃은 상이용사. 6·25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다리를 잃은 상이용사. 6·25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스탈린, 전쟁과 휴전협상 장기화 유도

그러나 10월 19일 밤 중국군이 압록강을 도강해 공격에 나서자 유엔군과 한국군은 다시 후퇴, 전황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 12월 초 유엔주재 인도, 영국, 스웨덴 대표와 리(Trygve Lie) 사무총장은 중국 대표에게 중국이 수락할 정전조건 제시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저우언라이는 12월 7일 한반도에서의 모든 외국군 철수, 대만 및 대만 해협으로부터의 미군 철수, 한국 문제는 한국인 스스로 해결, 중국정부 대표의 유엔 참여 및 대만정부 대표 축출, 일본과의 평화조약준비를 위한 4강국 외상회의 개최 등의 정전조건을 스탈린에게 제시하면서 그의 의견을 문의했다.

같은 날 스탈린은 저우언라이에게 보낸 회답과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유엔주재 비신스키 대사에게 보낸 훈령에서 “미국이 패퇴를 거듭함에 따라 완패를 모면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하여 한반도에서의 군사 활동 중지에 관한 제의를 빈번히 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저우언라이가 제시한 정전조건들은 적절치 않다”고 답변했다. 스탈린은 이어 10월 9일 저우언라이에게 보낸 전문에서 “서울이 아직 해방되지 않은 시점이므로 중국 측이 모든 카드를 제시할 때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저우언라이가 미국과 유엔이 먼저 정전조건을 제시토록 요구하는 전략을 택하라”고 제안했다. 유엔 측이 다시 1951년 1월 11일 정전 제안을 해왔을 때 저우언라이는 스탈린에게 문의, 그의 권고에 따라 유엔 측 제안을 거부했다.

1951년 6월 5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한반도에서 장기전은 중국군이 전장에서 현대전을 연구할 기회를 갖게 될 뿐만 아니라 트루먼 정부를 흔들고 미·영국군의 국제적 위신을 실추시킬 수 있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속도를 빠르게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당시 마오쩌둥은 국제관계에서의 중국의 위치를 높이고 중국 내 혁명 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수락할 만한 조건을 확보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의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 종료 시까지 입을 수많은 사상자 때문에 상기 스탈린의 장기전 요구에 대해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1951년 4월과 5월 중공군과 북한군의 대공세 실패는 유엔군사령부와의 휴전협상을 개시토록 스탈린을 압박했다. 1951년 6월 5일 말리크 주유엔 소련대사는 평화를 원한다면서 가급적 빠른 시일 내 휴전협상을 가질 것을 주소 미국대사를 역임했던 케난에게 제안했다. 며칠 후 김일성과 가오강(高崗, 만주에 위치하고 있던 중국의 친소인사로서 1955년 숙청됨)은 동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스탈린을 방문했다.

마오쩌둥은 가오강을 통해 6, 7월 2개월간은 중공군과 북한군이 수세적 위치에 있으므로 유엔군사령부와 협상을 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스탈린에게 제시했다. 스탈린은 협상 개시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말리크 대사에게 지시했다. 1951년 7월부터 1953년 7월까지 계속된 휴전협상의 초기 단계에 마오쩌둥은 중국 측이 만족할 조건들을 확보할 경우 휴전협정을 체결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이 휴전협정을 체결해야 할 더 급박한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중국과 북한 측은 서두르거나 협상의 조기 종결의사를 보이지 않고 계속 강경 입장을 견지토록 종용했다.

스탈린의 의견에 따라 조속한 시일 안에 종결되지 않고 교착상태에 있었던 휴전협상은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급진전을 보게 되었다. 스탈린이 죽은 지 2주일 후인 3월 19일 소련 각료회의는 6·25전쟁을 조기 종결토록 결정했다. 전쟁 계속의 주요인이었던 스탈린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소련, 중국, 북한이 휴정협정 체결을 위한 조치들을 취하게 되었다.

6·25전쟁은 스탈린이 총감독으로서 연출을 하고 김일성이 주연역, 마오쩌둥이 조연역으로 공산국가들이 대한민국을 불시에 공격한 남침전쟁이다. 6·25전쟁은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흉계와 중국을 적극 이용해 세계전략 차원에서 일으킨 남침 전쟁이다.

1949년 3월 이래 1950년 1월까지 김일성이 48차례나 남침 승인을 간청했으나 스탈린이 개전 승인을 한 후라야 남침 준비와 남침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6·25전쟁은 ‘김일성의 전쟁’이 아니라 ‘스탈린의 전쟁’이라 할 수 있더라도 김일성이 동포에게 저지른 죄과와 책임은 가벼워질 수 없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선 상의 포성은 멈췄지만 김일성을 이은 북한 지도부가 적화통일을 공언하고 끊임없이 각종 무력 도발을 하고 있어 6·25전쟁은 진행형이다.

6·25 남침전쟁의 첫 번째 교훈은 대한민국은 공산화 통일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북한의 정체를 똑바로 알고 대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북한만 바라보는 좌파정부의 친북유화정책과 북한의 ‘우리민족끼리’ 주술에 홀려 국민의 안보의식과 군의 기강이 매우 해이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집단적으로 북한의 정체를 잊거나 잘 못 인식하고 있고 6·25전쟁 이래 그렇게 속고도 속은 줄을 모르고 지내고 있다. 6·25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이들은 배우지 않았거나 잘 못 배워 70년 전의 사실을 제대로 알 수 없다. 후대들이 북한의 정체와 6·25전쟁을 제대로 알도록 학교와 가정에서 올바른 교육을 해야 한다.

1952년 발간 ‘대한민국 통계연감’에 의하면 6·25전쟁 기간 동안 한국군 전사자는 22만7800명, 부상자는 71만7100명이었고,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은 총 12만2799명, 납북자는 8만4532명에 이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학살됐다. 영광지역 여성 피살자는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다. 최소한 그 지역에 사는 후손들은 김일성이 6·25 남침전쟁 때 저지른 만행을 기억하고 우리민족끼리 주술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북한은 전쟁을 통해 적화통일을 성취하지 못하자 북한에 대해 유화적인 한국의 좌파정부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합의한 이후 대한민국 체제 특히 군사적 대비체제를 허물어 적화통일을 하려는 협상을 추진해 왔다. 2018년 ‘9월 평양선언’과 ‘판문점 선언 이행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로 대한민국 국군은 육지와 바다의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제대로 군사훈련도 하지 못하고 있다. 2018년 이후 미·북한 간에 ‘비핵화’에 대해 원칙적 합의를 했다고는 하나 용어 해석마저 달리했고 구체적 진전이 전혀 없다.

둘째, 6·25전쟁은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일본군 무장 해제와 한반도 분단 관리를 위해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이 1949년 7월 임무를 마치고 철수한 후 스탈린-김일성 간에 구체적으로 논의되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지난 5월 27일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별보좌관은 워싱턴 DC의 싱크탱크 퀸시 연구소의 화상 세미나에서 주한미군의 점진적 감축이 북한의 신속한 비핵화 이행을 위한 협상 카드의 일종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북한이 핵폐기를 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북한의 남침을 초래해 대한민국의 안보와 발전을 위태롭게 할 위험이 있어 극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지난 6월 16일 북한이 남북 화해·협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개성공동연락사무소룰 폭파하고 ‘말 폭탄’을 거듭하고 있는데도 좌파 정부가 북한과의 각종 교류를 제시하고 정부 고위인사가 주한미군 철수를 제기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안보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6·25 남침전쟁 70주년의 교훈

셋째, 대한민국에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유비무환의 안보를 확보하는 것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남침전쟁 승인을 48차례나 간청했을 때 중국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에서 소련의 손익을 면밀히 계산한 후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승인했고 마오쩌둥도 스탈린과 김일성의 남침전쟁 지원을 요청했을 때 이데올로기적 유대와 실질적 국가이익이 충돌하지 않을 경우 이데올로기적 유대를 내세워 정책 결정을 내세웠으나 충돌할 경우 자국의 이익을 내세워 남침전쟁 파병을 거부했다.

6·25 남침전쟁 전쟁 개시와 협상을 통해 확인된 것은 모든 국가에 자국의 이익이 우선이고 국가안보는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대한민국과의 평화적 공존을 거부하고 공산화 통일을 포기하지 않은 대남전략 하에 대한민국의 안위를 위협하는 대량살상무기를 실전배치했다. 대한민국은 북한의 위협을 막을 수단이 충분치 않다. 한국군 당국에 의하면 지난 해부터 증대되고 있는 이른바 ‘신종무기 4종 세트’로 불리는 북한의 새로운 방사포(다연장로켓)와 미사일을 막을 ‘한국형 아이언돔’ 개발이 3~4년 늦어져 2026~2027년까지 요격할 수단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국가안보를 확고히 하기 위해 당연히 스스로의 힘을 강화하면서 우방 동맹국과의 안보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그럼에도 현 한국 정부는 6·25전쟁에 참전한 피아를 모르는 것 같이 행동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12월 5일 베이징대 연설에서 시진핑이 2012년 11월 중국공산당 18차 대회에서 총서기로 선출된 직후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의미한 뜻으로 선언한 중국몽(中國夢)이 중국만이 아니라 인류가 함께 꾸는 꿈이 되기 바란다고 하면서 친중 정책 인상을 줬다.

중국은 중국몽을 발표한 이래 주도면밀하게 경제력과 군사력을 꾸준히 구축했다. 위협을 느낀 미국은 2018년부터 중국과 무역전쟁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 견제에 나섰다. 동년 10월 4일 펜스 미 부통령은 제2의 대중국 냉전을 선포했고 2020년 중국 우한발 코로나 사태로 미·중 간의 신 냉전체제는 격화되고 있다.

신 냉전체제가 격화되고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미 양국은 동맹정신으로 교착된 방위비분담금 협상을 조속히 타결해 북한의 핵,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대응 위주의 연합방위체제와 전략자산의 조기 전개 등 미국의 확장 억제책(Extended Deterrence)이 적시성 있게 실행되도록 구체적 협의를 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2013~2016년 대사로 재임한 파키스탄에서의 경험을 첨언하고자 한다. 1947년 8월 영국 식민지에서 인도와 분리 독립한 파키스탄은 인도와 세 번의 큰 전쟁을 했다. 한국 전문가들이 한국보다 발전한 파키스탄을 배우기 위해 1차 경제개발 5개년(1962~66)계획 수립에 앞서 파키스탄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한 선진 파키스탄은 1972~76년 알리 부토 좌파 정권이 들어와 복지 우선 정책을 시행하면서 민간 소유의 11개 기간 산업과 대학을 국유화함으로써 외국인의 투자 신용에 충격을 주고 국민경제의 비효율을 초래해 나락의 길로 떨어졌다.

그 후 군사 정부와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우파 정권이 집권해 국유화 조치를 대부분 완화했으나 복지 위주의 배급제도와 국유화의 폐단은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만 3년간 주재하면서 부러웠던 것은 좌파, 우파의 어느 정권이 집권하든 파키스탄 국가 지도부는 국가발전정책 방향과 지역 출신은 달랐어도 숙적 인도를 염두에 둔 국가안보태세만큼은 변경하지 않고 확고했던 것이다.

송종환 미래한국 편집고문·경남대 석좌교수
전 파키스탄 대사
전 유엔대표부·미국대사관 정무공사
전 안기부 해외정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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