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광복절만큼이나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세계적으로 코로나 사태로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 계속되고 있고 이로 인한 경제 대공황이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 우리나라는 좌파정권의 거듭된 실정으로 안보위기와 경제위기 등이 겹친 ‘쌍둥이 재앙(Twin disaster)’에 직면해 과연 ‘한국의 미래’가 있을 것인지 위태로워 보인다.
현재 한국의 좌우 분열 상황은 마치 ‘해방 정국’을 연상시킨다. 당시의 좌우 분열은 사회주의가 세계적으로 강건하고 제3세계권에 가장 인기 있는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에 좌파의 행태가 이해 가능한 측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좌파는 사회주의 전체가 몰락한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 어떤 유토피아적 미래(Erehwon)’를 향해 끝없이 국민들을 몰아세우는 형국에 놓여 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미소만 남기고 사라진 고양이’를 연상시킨다. 몸은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날개만 남은 나방처럼 도대체 이들은 어디를 향해 무엇을 위해 나아가려고 하는 것일까?
한국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처럼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에 들어섰다. 더불어민주당은 국회의 모든 상임위를 장악하고 그 위원장을 모두 민주당으로 채우고 노골적인 일당 독재체제로 국가 경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탄핵안에 코웃음치는 법무장관이 있는가 하면, “서울은 천박하고 부산은 초라한 도시”라는 당대표가 있다. 한국 좌파는 이구동성으로 촛불혁명의 공신(功臣)으로 추켜세우면서 임명한 검찰총장을 ‘살아 있는 권력의 비리’에 칼끝을 겨누자 바로 공적(公敵)으로 몰아 세운다.
실정과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여차하면 ‘친일·반일 논쟁’을 전가의 보도처럼 빼내 칼춤을 춘다. 그런데 그 실체가 여지없이 드러난 사건이 발생했다.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고 반박도 할 수 없었던 반일운동의 선봉장인 윤미향의 비리 사건은 좌파의 민족주의의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보여준다. 그동안의 보도들이 사실이라면 위안부 할머니들은 윤미향과 일부 좌파 불교 단체의 ‘앵벌이’로 전락한 것이 분명하다. 아마 위안부 할머니들은 다시 한번 삶에 절망했을 것이다.
묘수를 세 번 두면 망수
부동산정책의 실패를 행정수도이전이라는 ‘신종 천도론’으로 넘어가려는 노련한 시도도 묘수(妙手)는 묘수다. 실제로 행정수도 완성이라는 것은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현재 당면한 부동산 문제는 매우 촉박하고 단기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좌파의 특기인 심리전술로 파국에 이른 경제 문제를 회피하려는 정치적 묘수로 선택된 것이다. 즉 서울 부동산값도 잡고 자칫 우파로 넘어가려는 충청권도 안정적으로 장악하려는 일석이조를 노린 묘수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서울의 집값이 떨어지면 손대지 않고 부동산 문제를 해결한 것이 된다.
그러나 바둑의 수도 묘수를 세 번 두게 되면 망수(亡手)가 되는 것인데 이것을 이들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묘수는 상대가 나의 전략대로 움직여 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만약에 나의 전략을 간파해 그 반대로 움직이면 나는 필패(必敗) 하게 된다. 결과는 즉각 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서울의 집값은 그대로 둔 채 세종시의 집값만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이것은 이들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언발 오줌 누기식’인지를 보여준다.
좌파의 경제정책은 하나같이 이런 식이다. 경제의 그 복잡한 변수들을 모두 고정시켜 놓고 포퓰리즘을 자극하는 하나의 요소를 변화시켜 그 긍정적인 선순환 과정만 예측하면서 경제정책을 시행한다. 결과는 모두가 최악의 상태로 나타나고 있다. 경제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광복절을 다시 맞은 이 시점에서 친중·친미의 갈등, 친일·반일의 갈등, 천도론 갈등, 중앙·지방의 갈등, 지역간 갈등, 빈부의 갈등, 청·장년의 갈등, 남녀의 갈등 등 우리 사회가 지난 75년간 경험하고 있었던 모든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다.
놀랍고도 슬픈 일은 한반도의 안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전작권 전환’에는 관심도 없었던 이 나라 국민들이 강남발 부동산 급등에는 발끈했다는 것이다. ‘전작권 전환’은 궁극적으로 미군 철수를 유발하고 북한의 ‘핵 그림자 전략(Nuclear shadow strategy)’에 의한 한국 정치의 지배, 나아가 종국적으로 북핵을 기반한 무력통일이 되면, 우리의 재산권 모두가 박탈될 수 있는 상황인데도 무관심하던 국민들이 부동산 가격의 폭등으로 촛불집회를 나서는 것을 보면 아연해진다.
한국 좌파의 근거 없는 자신감
기본적으로 좌파는 현대의 선진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본주의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궁극적으로 세계 체제에서 이미 승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부동산 문제는 좌파정권이 얼마나 현대 경제에 무지한가를 보여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들이 말하는 적폐중의 적폐인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빨리 가서 과외를 받아야 한다. 그동안 좌파정권의 경제 운용 과정을 보면 국가경영을 하기에는 함량 미달임을 확실히 보여준다.
현재의 세계 체제는 감당하기 힘든 국가별 빈부격차와 산업격차, 기술격차와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 등과 해결하기 힘든 후진국 문제 등이 있다. 그런데 한국 좌파는 이 첨예한 문제도 우리가 해결할 수 있다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이미 선진 자본주의에 들어선 한국에 베네수엘라식 모델을 적용하려는 놀라운 시도들을 하기도 하고 어느 나라도 가보지 못한 ‘소득주도성장의 시대’를 고집하고 있다.
한때 리영희가 시대착오적으로 모택동의 문화혁명을 이상사회의 구현처럼 어린 학생들을 세뇌시키더니 이후에도 좌파의 이론가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리스, 베네수엘라 등을 찬양하고 그 모두가 실패하자 이젠 차라리 ‘우리가 하면 된다’는 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동북아 균형자론’, ‘한반도 운전자론’ 등 천재적인 ‘말꾼’들의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국민을 현혹시키더니 결국은 세계적인 코미디가 되고 말았다.
이런 류의 불필요한 ‘근자감’보다는 차라리 우리 내부의 문제에만 집중해야 한다. 지금은 보다 안정된 안보와 경제, 사회와 체제를 후세에 물려줘야 될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을 좌파가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좌파를 모르는 우파
우파는 좌파에 대해 그 실체를 보다 정교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좌파는 마르크스 이후 정체된 것이 아니고 복잡다단(複雜多端)하게 변해 왔는데 대부분의 우파는 이 부분을 간과한다. 좌파라고 하면 으레 스탈린식 통치나 북한식 참담한 봉건주의만으로 이해하여 좌파를 공격하거나 아니면 유럽식의 사회민주주의 형태로 한국에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초기 자본주의가 현대 자본주의가 아니듯이 현대 좌파도 그 궤적을 추적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 좌파는 수많은 좌절과 적응을 통해 ‘이데올로기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후보 청문회에서 “나는 주사파인 적이 없다”라고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우파는 거의 없을 것이다. 주사파가 아니라고 해서 우리의 현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좌파를 이해하려면 기독교와 비교해보면 쉽다. 기독교의 종파처럼 좌파도 많은 종파가 있다. 좌파도 기독교처럼 종파들 사이의 적대감이 강하다. 그러나 기독교의 많은 종파들이 반기독교적인 행태에 대해서는 모두 단결해 이를 분쇄하듯이 좌파도 반좌파적인 책동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단결하여 파괴해 나간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의 지적처럼 천박한 서울의 시장실과 초라한 부산의 시장실에서 전형적인 ‘위력에 의한 성추행’이 일어났다. 그런데 도무지 수사가 진척이 되지 않는다. 원래 한국의 ‘미투 운동’은 우파 인사들을 타깃으로 한 것인데 막상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니 노벨상 후보였던 대표적 좌파 시인 고은을 필두로 수많은 좌파 연예인과 정치인들이 나타났다.
연이은 ‘조국 사태’와 ‘박원순 사태’는 좌파의 도덕 불감증과 ‘내로남불’식의 당파적 진영논리가 위험수위를 넘었다는 것을 노정했다. 이것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들었다면 통곡했을 것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1891.2.11)에서 “공식적 지위를 페스트처럼 멀리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당에 들어가겠는가? 우리가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 우리 스스로 잘못 보게도 되기 때문에 인기라면 침을 뱉는 우리에게 당이 무엇인가?”라고 했다.
수많은 좌파 지식인들의 순수성과 진보에 대한 갈망은 레닌과 스탈린, 모택동에 의해 극심하게 오염되었다. 레닌의 사상적 스승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뚜카체프(Tkachev, 1844∼1885)로 그는 볼셰비키의 아버지였다. 엥겔스는 “뚜카체프를 폭동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또 하나의 독재체제를 수립하려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1891.2.11) 놀라운 일이지만 러시아 사회주의가 들어서기 30년이나 전에 그들의 실체를 예측한 것이다.
스탈린을 거치면서 세계 좌파의 이데올로기적 순수성과 도덕성이 극심하게 타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로지 ‘계급의식’을 최고의 미덕으로만 간주하고 모든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하는 체제의 등장을 가져온 것이고 이것이 2020년 한국에서 그대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좌파는 옳은 좌파가 아니며 이른바 ‘사회주의적 진보’를 논할 자격을 상실한 ‘사이비 좌파’임을 자인하는 꼴이 되었다.
현대 한국 좌파의 주변에는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도 없이 권력의 주변에 기생하는 수많은 인간 군상이 ‘권력의 쾌락’을 쫓아 모여들고 있다. 어떤 의미에선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보험을 드는 것일 것이다.
전가의 보도 ‘항일무장 투쟁’
좌파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항일무장 투쟁’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봐야 한다. 그 의도가 무엇이든간에 김일성의 업적을 간접적으로 옹호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김일성은 무장독립투쟁으로 북한을 해방한 것으로 극적으로 날조·연출되었고 한국 좌파들도 이에 심각하게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김일성은 항일무장 독립투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고 그는 중공군 또는 러시아군 소속이었던 사람이다. 특히 이종락(李鍾洛, 1907~1940)의 체포 이후 김일성의 행각은 일반인이 들으면 혼절할 수준이다.
장준하의 자서전 <돌베개>에서 지적되었듯이 우리 독립운동에 대해서 지나친 과장이나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유시참변(1921) 이후 사실상 무장투쟁이 제구실을 할 수 없었다. 일본의 만주 침략이 본격화된 것도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무장 투쟁에 관해서도 우리는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정규군의 경우에도 보급 시스템 등으로 인해 상당한 민폐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지역이든지 군대가 주둔하는 곳은 군민 간의 갈등이 심각했다. 하물며 아무런 정상적 지원 시스템이 없는 상태의 소수 무장세력들이 별 탈 없이 항일무장투쟁에만 전념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환상이다. 독립군의 실체를 실존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무장 독립 투쟁은 중국공산당이나 장개석 정부의 지원 하에서 정상적인 군편제를 갖추고 난 뒤 또는 해방 직전의 미군의 도움으로 제대로 진행된 것이지 그 이전에 지원 세력도 없이 무장투쟁이 수천 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900만 명에 육박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제대로 싸웠을 거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1945년 8월을 기준으로 일본 후생성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제국의 군대는 육군만 보면 중국 본토(105.57만), 만주(66.4만), 조선 북부(9.4만), 조선 남부(20.02만) 등으로 201만 명 이상의 대군이 주둔했다.(<東京新聞> ‘終戰の日を考える’ 2010.8.8)
일제강점기 당시 한반도 북부나 만주 일대를 생각해보면 군대를 구성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특히 그 시기는 ‘전쟁의 시대’였고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였기 때문에 입에 풀칠만 할 수 있다면 앞을 다퉈 입대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문제는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지원 체제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면 사실상 어려운 것이다.
항일무장 독립단의 부정적이고 암울한 실체에 대해서는 당시 동아일보에 여러 차례 보도된 바 있다(1921.3.25/1921.4.17/1921.4.23/1921.5.3/1921.5. 9/1921.8.28/1921.9.2/1922.1.27/1923.11.14/1923.12.23). 그렇다고 해서 이 같은 독립단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 나라를 잃었을 때 나라를 찾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민족의 보배이기 때문이다. 다만 구국 의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경제력이 있어야 하는데 바로 이 문제가 딜레마이다.
지리산의 빨치산들도 좌파 이데올로기를 위한 투쟁보다는 대부분 보급투쟁(생존투쟁)으로 일관했다가 김일성의 버림을 받고 궤멸되고 말았다. 이 점에 있어 무장투쟁보다도 지식인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그 체제 내에서 사회변혁을 시도하려는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혁명과 변혁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다. 세계사적으로도 획기적인 변화이다. 그러나 이 운동도 1940년대 접어들면서 일제의 강경한 탄압으로 유명무실해졌다.
사회주의, 무지인가 부채인가
좌우를 막론하고 우리의 역사는 그러한 ‘구국의 헌신’의 역사보다는 그 과실과 열매를 따기 위한 ‘부나방들의 권력 투쟁’의 역사에 더 가깝다. 그리고 이것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왔던 이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여차하면 친일을 우파에 연계시키는 좌파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우파의 심장인 곳에서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의 수가 2080명으로 이 숫자는 한국의 그 어떤 지역과 비교해 봐도 2배 이상으로 많고[2015년 3월 기준,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 ‘자정 순국자(殉國者)’ 수도 가장 많다.
80년대 좌파 운동권 세력들도 권력의 단맛만 향유하는 변질된 세력으로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고은-조국-오거돈-윤미향-박원순 사태 등을 통해 본다면 한국 좌파에서 합리적 지성이나 역사적 이성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
서울과 부산의 시장 보궐선거에 대해 좌파의 대표적인 대권 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는 “장사꾼도 신뢰가 중요하다. 아프고 손실이 크더라도 약속을 지키고 공천하지 않는 게 맞다(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2020.7.20)”라고 하더니 당내에서 문제가 되자 즉각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YTN, 2020.7.23)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이성을 가진 사람인가?
이들은 좌파와 진보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다시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임을 확인시켜 줬다. 좌파 노릇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는데 한국 좌파들은 좌파의 기본 이론조차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 좌파의 북한 정권에 대한 대응 방식이다. 마르크스·엥겔스는 물론이고 그람시-베블렌·슘페터-루카치-알뛰제-호베르 브와에 등의 이론들을 제대로 알고 북한 체제를 봐야 하는데 도대체 무슨 부채를 지고 있는 지 한국 좌파의 ‘북한에 대한 짝사랑’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한국 좌파가 ‘봉건왕조’인 북한 정권에 대해서 ‘변증법적 적대적 모순’임을 분명히 알지 못한 정도로 우둔하지는 않는데 왜 한국 좌파는 이를 회피하고만 있을까? 급기야 문정복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탈북민 출신 태영호 미래통합당 의원을 향해 “변절자의 발악으로 보였다”고 했다. 이 자는 과연 대한민국 국민인가? 이런 사람을 국회의원을 시켜주는 민주당은 도대체 어떤 정당인가?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이에 대해 “장군님께서 크게 실망할 것”이라고 응수했다. 문정복 의원은 과연 북한에서의 일반 주민 생활을 한달이라도 버틸 수 있을까?
문재인 정권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롭다”는 말로 국민을 현혹하고 정권을 장악했지만 이제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이 땅에는 없다. 그동안 이들의 행태를 보면 이 나라의 장래나 민족의 장래보다 자기들이 나가야 하는 길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어느 네티즌의 “더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번 정권처럼 국민과 국가에 애정이 없다고 느꼈던 적이 없어요”라는 절규처럼 좌파정권은 ‘경제기적의 대명사인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이 없고 절반 이상의 국민에 대해서도 적대적인 듯하다. 이들의 의식에는 ‘대한민국은 없어져야 할 또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될 나라’로 각인된 것도 같다. 지난 코로나 사태를 보더라도 좌파의 선전·선동을 주도하는 방송인이 특정 지역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서울처럼 천박한 도시를 만들면 안 된다고 강변했는데 이 부분이 바로 이들의 현주소이다. 현대의 경제체제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면 이 같은 말이 나오는가? 아니면 사회주의를 완성하여 서울의 전체 아파트와 주택들을 압수하여 배분하면 속이 시원하다는 말일까? 그렇게 하면 서울은 우아한 도시가 될까?
꼼수에 의존하는 국가경영
현 정권의 가장 위험한 점 중의 하나는 국가 경영을 꼼수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경제는 시장원리를 기반으로 해야 하는 것이지 꼼수에 의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자유를 기반으로 하고 다양한 집단들이 자기 표현에 충실하기 때문에 일부는 천박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천박한 다양성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의 힘이고 사회적 모순들을 해결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일종의 ‘철인정치’를 표방하는 공산 귀족 엘리트를 중심으로 운영했던 사회주의 체제는 70년도 안 되어 속절없이 무너졌다. 권력을 가진 소수의 천재(정치국원 등)가 다수의 천재와 일반인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 것이다.
한국 좌파는 마치 봉건시대의 조선과 같은 좌파 엘리트 사회를 꿈꾸는 듯하다. 그들은 일종의 ‘양반의식’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이해찬, 조국, 추미애 등을 비롯한 많은 좌파 리더들의 발언들에서 이런 점을 엿볼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분산된 권력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복잡하고 어수선하지만 적어도 위험하지는 않다. 코로나 사태에서 보듯이 시장 권력들은 쉽게 소멸되기도 한다. 대기업이라도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음을 우리는 봤다.
소수 엘리트가 주도하는 전체주의는 정제되어 있고 ‘정치적 환타지’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천박한 서울의 자본주의보다도 더 훨씬 더 천박한 전체주의 권력을 보고 있다. 180석을 가진 권력이 이 정도인데 이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던 사회가 되면 도대체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천박하다고 천박한 것이 아니고 우아하다고 우아한 것이 아니다. 착각하면 안 된다.
광복 이후 처음으로 우리는 가해자나 피의자 그룹이 피해자보다 더 당당하고 외곽에 있던 그들의 ‘빠’들이 모두 연대해 옹위하는 것을 봤다. 우파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행태들이다. 가장 천박한 좌파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에게 도덕과 이성은 민초들만을 위한 용어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나 그람시가 말하는 ‘계급의식’을 제대로 가지고 있지도 않다. 한마디로 ‘괴물 사이비 좌파’인 것이다. 이들이 ‘사회주의’를 입에 올리는 것은 건강한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모독이다.
이제 광복절을 맞이해 좌우 모두는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의 좌우 모두 민족의 미래를 위한 가장 바람직한 방향을 새롭게 찾아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가 우리에게 부여한 사명이다.
김운회
미래한국 편집위원·동양대 교수
한국외국어대 경제학 박사
서울대 한국정치연구회 지도간사
기독교문화연구회 사회과학 지도간사
<왜 자본주의는 고쳐 쓸 수 없는가> 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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