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언급한 격차와 양극화의 실체
대통령이 언급한 격차와 양극화의 실체
  • 김동연 대한민국수호예비역장성단 국제홍보팀장
  • 승인 2021.02.1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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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 국민과 소통하겠다”며 광화문에 대통령 집무실을 만들겠다고 했던 문재인 정부는 2021년 신년기자회견을 포함해 고작 6회의 대국민 소통기록을 남겼다고 알려졌다. 기자협회보에 따르면 역대 정부중 기자간담회 횟수는 노무현 150회, 이명박 20회, 박근혜 5회, 문재인 6회다. 올해를 빼면 현 정부가 ‘불통 정부’로 불렀던 박근혜 정부와 동률을 이룬다.


신년기자회견에서 입양 문제에 대한 대통령의 발언이 마치 어린아이를 물건 취급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면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런데 사실 여론이 간과한 부분은 다른 데 있다. 바로 ‘격차’와 ‘양극화’다. 이번 기자회견을 살펴보면 기자들의 질문 내용을 포함해 총 10회의 ‘격차’라는 단어가 나오며 10회 중 7회는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다. ‘양극화’란 단어는 총 7회중 3회가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다. 그만큼 사회 전반에 이런 단어가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격차(隔差)란 무엇인가. ‘사이 격(隔)’ 자와 ‘다를 차(差)’를 합쳐 부르는 이 말은 부정적인 용어로 자리 잡았다. 격차라는 용어만 들어도 벌써부터 사람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기자회견에서 대통령과 기자들은 격차라는 단어를 홀로 쓰지 않고 다른 용어와 함께 썼다. 격차란 용어가 홀로 등장한 횟수는 총 10회중 단 1회뿐이다. 나머지는 사회적 격차, 교육격차, 학력격차, 디지털 격차, 코로나 격차로 타 단어와 함께 사용됐다. 언제부터인가 사회 전반에 모든 사안에 대해 격차라는 용어를 붙이게 됐고 그런 사용에 우리의 반감은 사라졌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복지격차, 자유격차, 복무격차, 의무격차, 성별격차, 남북격차, 투표격차, 수사격차, 정의격차 등 아무데나 다 가져다 붙일 수 있다.

신년기자회견에서 입양아를 마치 물건 취급하는 듯한 발언으로 문재인 대통령은 질타를 받았다. /청와대
신년기자회견에서 입양아를 마치 물건 취급하는 듯한 발언으로 문재인 대통령은 질타를 받았다. /청와대

격차는 사실 ‘차이’를 의미하는 용어일 뿐이다. 남과 나의 다름을 의미한다. 이러한 다름은 자연적인 현상으로 이 세상에 누구도 태초부터 다르게 시작한다. 하물며 한 부모 밑에서 자란 형제자매도 공산품마냥 같을 수 없는 게 자연의 이치이자 섭리다. 이런 정언명령적 현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다름을 마치 적폐처럼 간주하는 의미가 ‘격차’란 단어 속에 내포되어 있다.


소득격차란 모름지기 그 어떤 국가에서도 발생하는 자연적 현상이다. 국가의 법을 제정하고 운영하려면 수치적 통계를 내야 하고, 그 수치를 토대로 세금을 매기고 국가를 운영한다. 그 수치적 통계를 내다보면 지구상 모든 국가에서는 최고소득을 버는 사람이 있는 동시에 최저소득을 버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소득격차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자본시장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경쟁을 통해 최저소득자도 얼마든지 최고소득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시장은 알아서 노력하는 자에게 얼마든지 고수익을 보장한다.


민주주의 헌법의 기본은 남과 나의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때문에 소수의 참정권과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이며 다수에 속하지 못한 사회적 약자의 인권도 헌법에서 존중받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남과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개념이자, 완전히 다른 여당과 야당이 공존함으로써 서로 상반된 의견을 개진하고, 지속적인 견제와 균형을 유지한다. 그런데 격차란 이러한 민주주의 기본적 다름을 무시하고, 짓밟는 것으로 우리 스스로 남과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부도덕하다고 여기게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격차가 얼마만큼 벌어졌는지 알려면 비교 대상간 구체적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상호 비교가 격차를 정의하는 기본이다. 가령 A와 B의 격차를 알려면 A와 B 사이에 발생한 구체적인 데이터를 산출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격차를 논할 때 무조건적으로 이미 그러한 차이가 존재하고, 더 심화되고 있다는 전제를 하고 있는 것도 맹점이자 문제다.

2021년 1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 모습 /청와대
2021년 1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 모습 /청와대

‘격차’라는 단어 오용하며 선동하는 정부

신년기자회견에서 언급한 소득격차, 코로나 격차, 교육격차, 디지털 격차 등은 도대체 그 대상이 누구인지, 무엇이 기준인지 단 한 차례도 언급된 바 없으며 이러한 유사한 사례를 외국에서 찾아볼 수조차 없다. 어디에 무슨 수치나 통계를 바탕으로 했는지도 의문이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말한 ‘코로나 격차’라 함은 무엇인가? 백신을 공급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확진자와 비확진자의 차이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확진자가 완치되어 사회로 돌아온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코로나 장기화로 영업을 하지 못하는 소상공인과 영업을 하고 있는 자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북한 인민과 우리 국민의 코로나 상황을 비교하는 것인가. 도대체 무슨 격차를 말하는 것인가.


디지털 격차란 무엇인가. 인터넷과 단절된 북한 인민을 지적하는 말인가. 인터넷을 검열받는 중국인들과 우리를 비교하는 말인가? 아직 5G 통신이 개통되지 못한 북한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인가? 컴퓨터는 있는데 인터넷은 없는 사람을 말하나? 아니면 SNS 활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하나?
교육격차는 또 무언가?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차이를 말하는 것인가? 학교별 차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그럼 구체적으로 무슨 차이를 말하나? 중국 학생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인가? 대통령의 시각에는 이 세상은 온통 극심한 차이로 벌어진 간극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만 생각하는 것인가. 국민 모두가 모든 격차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가 되기를 바라는 것인가. 애당초 격차가 왜 나쁜지도 모르겠다. 이 땅의 모든 만물이 다를지언데 왜 그것이 나쁘다고 단언하는가. 왜 항상 격차 뒤에는 ‘해소’를 붙여 격차를 해소하겠다고 하는 것인가. 


격차에는 항시 우리가 알 수 없는 이면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기업 총수가 경제적 지위를 누리는 한편, 그들이 주말까지 일을 하는지, 고민 없이 두발 뻗고 자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외면으로 보이는 경제적 지위만 가지고 모든 사안을 평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공부를 못하는 학생과의 격차 때문에 우등생이 게을리 공부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이런 식이면 향후 대한민국은 그 어떤 올림픽에서도 외국인 선수들과의 실력 격차를 불쌍히 여겨 금메달을 따오지 못할 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도록 유도하는 정부의 정책은 사회적 분열뿐 아니라 국제적 화합을 망치는 지름길이 된다. 북한뿐 아니라 일본이나 미국과의 소득격차나 국제적 지위격차는 어찌할 참인가.


정작 우리 안에서는 격차를 남발하면서도 북한과의 핵무기 개발 격차, 미국과 연합훈련을 지속하는 일본과 우리의 안보적 격차나 대북억제력 격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다. 방탄 벤츠를 타고 돌아다니는 북한 최고 존엄과 인민들의 소득격차나, 북한 인민들에게 보장되지 않는 인권과 우리의 인권격차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지 않은가. 북한 사회의 종교적 자유격차, 중국의 인터넷 검열과 우리의 인터넷 자유간 디지털 격차는 어떤가. 또 이스라엘과 우리의 미사일 방어망 수준 격차는 외면하는 이유가 무언가. 격차를 다 없애야 한다면 국제적으로 잘나가는 K-pop (케이팝)의 문화격차는 그대로 내버려둘 참인가.


격차의 끝은 ‘양극화’라는 용어로 귀결된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공산권 국가조차 최고 존엄과 인민간 소득격차는 수치로 표현조차 어렵다. 그 처절한 양극화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고 있는가. 각 국가별 국민들의 수익을 수치로 만들면 그 양쪽 끝부분은 양극이다. 그런 양극이 심화 된다는 양극화(兩極化, polarization)는 왜 항상 심해지고 있다고 설치는가. 


전 세계 양극화 데이터(중산층 추이)를 살펴보면, 각 극 부분의 상류층과 하류층 데이터가 적게 몰려 중산층이 많을수록 민주주의 선진국들이고, 각 극 부분에 데이터가 많이 몰려 중산층이 적은 장구 모양의 그래프가 두드러진 국가들은 대부분 공산권 국가들이다. 두터운 중산층을 만들 궁리는 외면한 채 나보다 잘사는 타인을 시기하고 질투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또 그 타인의 실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보이지 않는 그림자와 끝없는 싸움을 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모두 돌아봐야 할 때다. 잘 사는 사람을 보고 엄지를 치켜세워 들어줄 수 있는 국민성은 선진 민주국가 반열로 가기 위한 기본요건이다. 언제까지 실체 없는 격차 갈등에 악용될 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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