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이승만의 정읍선언이 대한민국을 구하다
[세미나] 이승만의 정읍선언이 대한민국을 구하다
  • 최창묵 얼역사연구소·전 원광대 외래교수
  • 승인 2023.07.3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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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쇼와 덴노의 항복 연설은 한민족에게 꿈에도 그리던 해방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일제강점 36년의 식민지 통치가 끝장난 것이다. 한민족은 1943년 카이로 선언으로 연합국의 국제적인 공약과, 우리 민족의 오랜 투쟁을 통한 간난의 극복 그리고 일본의 패전에 따라 해방과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 직후 여운형과 안재홍을 중심으로 재빨리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활동에 들어갔고, 수천 명의 사상범·정치범이 민중의 환호 속에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자유를 찾은 해방 정국은 저마다 정당과 사회단체를 만들어 정치 활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혼란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만한 구심력이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정치 조직이 난립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자들은 장차의 정당정치를 지향하기 위하여 안재홍을 중심으로 조선국민당, 송진우·김성수를 중심으로 한국민주당 등의 정당 결성이 추진되었다. 여운형·박현영 등 다수의 좌익 세력들은 건국준비위원회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정치 조직체를 선포했다. 

해외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하던 시기 만주나 연해주에서 또는 상해임시정부 안에서 통일전선을 펼 수 없게 했던 좌·우 세력의 분열·대립이 이제 해방을 맞이한 국내의 정국에서 다시 노정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읍선언의 배경

그러한 와중에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외상회의에서 “미·소 양국의 주둔군사령관은 2주일 이내에 회담을 개최하여 양국 공동위원회를 설치한 후 한국 임시민주정부 설립을 원조한다. 그리고 미·영·소·중 4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최장 5년 기간으로 실시한다”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청천벽력과 같은 신탁통치 소식은 해방의 감격이 비분강개하는 민중의 울부짖음으로 변하는 가운데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국민총동원위원회가 이승만·김구·송진우 등의 주도로 설치되게 되었다. 

이후 미·소간의 복잡한 줄다리기 끝에 드디어 제1차 미소공위가 1946년 3월 20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렸다. 미소공위는 4월을 거쳐 5월 5일까지 지루한 신경전과 밀고 당기는 협상은 계속되었지만 뚜렷한 결과물을 내지 못하고 답보 상태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시기 남조선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던 이승만은 당시 220여개의 건준 지부가 인민위원회로 재편 활동하여 좌익세력이 강했던 지방의 상황 속에서 역사적인 정읍선언이 나왔던 것이다. 

이승만은 미군정의 후원과 독립촉성국민회의의 협조로 4월 16일부터 남선순행을 시작하게 된다. 천안의 첫 번째 연설회에서 이승만은 우리가 연합국의 힘으로 해방되었음을 인식하고 민족통일전선을 이뤄 독립할 능력이 있는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주도록 단합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주독립을 성취하고 자유와 자율을 누리는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자고 역설했다. 

이 시기에 이숭만은 민족이 단합해 노력하면 통일적인 임시정부를 세워 궁극적으로는 민주정부를 세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충청도와 경상도를 거쳐 전라도 목포를 지나면서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휴회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연설회를 중단하고 광주에서 급거 귀경한 이승만은 민주의원회의에 참석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소련의 단독행위로 미소공위가 무기휴회된 것에 강한 유감을 표시했다. 1차 남선순행 소감으로 전국 동포들의 사상은 민족적으로 통일성을 보이고 있으며 대다수 민중들은 신속하게 우리 정부가 서기를 바라는 열망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미소공위의 무기휴회에 따라 5월 12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우파의 독립전취국민대회에 10만여 명의 군중이 운집해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독립을 촉구하는 연설이 있었는데 김규식 민주의장 대리의 폭탄선언이 있었다. 

한반도 운명을 감지했던 이승만

김규식은 미소의 협력을 기대할 수 없으니 우리 손으로 정부를 만들어 열국에 자랑해야 하며 그 정부가 대구에 있든지 제주도에 있든지 통일정부가 된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시국에 이승만은 서울의 독립전취국민대회의 열기와, 1차 남선순행에서 직접 접촉한 지방 유지들과 민중들의 신속한 독립국가 건설 열망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많은 고심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도 가능하면 미소공위가 타협하여 인구비례에 따른 임시통일정부가 수립되기를 강력히 희망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유럽의 폴란드가 소련의 획책으로 공산화되고 북한에서는 준 국가 형태의 임시인민위원회가 운영되는 상황을 보고, 새로운 활로와 방책을 모색할 수 밖에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 독립을 위해 오랜 세월 수많은 경험을 하고 국제 외교 정세에 능통한 이승만이 고심 끝에 선택한 해답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6월 3일 정읍 동초등학교에서 밝힌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야 삼팔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의 일명 남한단독정부 수립 방안이었던 것이다. 

이승만이 이러한 중대 선언을 하기까지는 수많은 고심과 번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일찍이 미국에서 국제연맹에 조선위임통치안을 제출하였다 하여,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비난을 받았으며 상해임정 의정원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탄핵을 당한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통일정부를 원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 안은 거센 반대와 비난이 몰아칠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미소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자칫하면 폴란드처럼 한국도 공산화 될 수 있다는 우려감에서 차선책이지만 부득이하게 남한단독정부 수립 안을 선언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승만은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정책 변화를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여러 대도시에서도 밝힐 수 있었겠지만 왜, 남한단정 수립 안을 정읍에서 밝히게 되었을까? 그것은 여러 여건과 한국 근현대사에서 정읍이 차지하고 있는 역사적 위상을 고려했기 때문에 정읍이라는 무대에서 발표하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1894년 정읍에서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을 소재로 한 드라마 ‘녹두꽃’. / 녹두꽃 홈페이지
1894년 정읍에서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을 소재로 한 드라마 ‘녹두꽃’. / 녹두꽃 홈페이지

정읍선언의 의미

정읍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운명적으로 많은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변혁을 추구하는 역사적인 땅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시원이며 뿌리로 평가받고 있는 정읍에 어떠한 역사적 사건들이 전개되었을까?

첫째, 평등과 인권을 추구한 동학농민혁명을 언급할 수 있다. 수천 년 봉건왕조체제에 속박된 민중들은 양반상놈과 노비제도를 타고난 숙명으로 인식하여 신분제 사회에 순응해 살아왔던 것이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인간관계를 사람이 하늘이며 모두가 평등하다는 동학이념에 입각한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사회에 경천동지할 일대 사건이 된 것이다. 

조선 팔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300만여 명이 참여하였고 30만여 명의 희생자를 낸 민중항쟁은 척족세도정치 타파와 민주적 군주제를 추구하였고 집강소를 통해 지방자치제를 구현하였다. 사회적으로 양반상놈의 반상체제를 혁파하고, 경제적으로 토지의 평균 분작 요구와 무명잡세 폐지를 추구한 민주혁명의 횃불을 들었던 것이다. 

둘째, 항일애국운동으로는 대한제국시기에 영학당 항쟁으로 일제의 경제침탈에 저항하였고, 1906년 무성서원에서 최익현과 임병찬이 일으킨 병오창의는 전국 의병항쟁의 선봉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3·1 만세운동에는 정읍 산외의 박준승 선생이 33인에 참여하였고, 태인 만세운동 등 13차례의 독립만세시위가 있었다. 정읍농업학교 시위사건과 미륵불교의 ‘조국광복기도사건’이 있었고 정읍 청년들의 실력배양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있었다. 

셋째, 정읍 입암 대흥리를 중심으로 조선총독부를 긴장시킨 증산·보천교 민족종교운동을 들 수 있다. 조선 말 정읍 덕천 객망리 출신 강일순은 후천개벽과 지상선경사회건설을 위한 천지공사를 시행하였다. 장차 조선이 독립하여 세계문명지도국이 될 것을 주창하며 희망을 잃고 실의에 빠진 조선 민중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강증산은 제자들에게 일본 사람은 머슴에 불과한데 주인의 집을 빼앗으려 하므로 크게 패망한다, 일본은 조선을 잠시 강점하지만 잔혹한 통치행위로 쫓겨날 때는 품삯도 못 받고 빈손으로 돌아간다, 쌀은 미국이고 솥은 조선인데 일본이 패망하고 미국이 들어온 뒤 복된 지천태운이 열리게 된다, 만국을 살려낼 활방은 오직 남쪽 조선에 있다는 ‘남조선운수론’을 주창한 바 있다. 

강증산의 수제자 차경석은 천자 등극식을 거친 후 입암 대흥리에 거대한 보천교 중앙본소를 지었고 장차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를 통일하여 계룡산에서 등극한다고 설파하였다. 보천교는 미국이 참전하여 조선이 독립하고 미국과 연대하여 세계문명지도국이 된다는 독립사상을 민중들에게 암암리에 전파시키는 종교사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자칭 600만 교도를 배경으로 상해임정 등 독립운동 진영에 거금의 독립자금을 지원하였고, 잡지 보광을 창간하고 민립대학설립을 후원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1946년 해방정국에서 한반도 북쪽에서는 소련의 후원 하에 공산체제가 일사불란하게 등장하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민주주의 체제가 수많은 시련 속에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이러한 엄중한 현실 속에서 이승만이 발표한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의 취지는 북한의 공산정권수립에 대응한 ‘남한민주정부’ 수립 구상을 밝힌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오늘날 세계인으로부터 지지와 사랑을 받는 한류문화의 탄생지이며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게 된 근원은 자유와 인권과 창의성이 보장되는 민주주의체제를 선택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승만이 발표한 정읍선언은 한반도의 분단을 획책했다기보다는, 북한의 공산정부 수립에 대응해 남한에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선언으로 대한민국이 출범하는 모태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야 이 나라를 위해 피땀 흘린 수많은 건국세대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고 우리의 후세들에게 자랑스러운 민주국가 대한민국을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읍선언을 통해 이뤄진 대한민국의 처음은 진흙탕 속과 같은 험한 가시밭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단군 이래 가장 풍요롭고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인간 존중의 나라가 되었음을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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