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의 임기가 끝나간다. 오는 9월 24일은 김명수 대법원장이 6년간의 임기를 마치는 마지막 날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임인 이균용 후보자를 지명했고, 청문절차가 준비 중이다. 1일 김 대법원장은 법조 출입기자단과 기자간담회를 열었고, 지난 6년간 사법부 수장으로서 느낀 여러 소회를 밝혔다. 그 소회를 지켜본 바, 결론은 두 번 다시 대한민국에 이런 대법원장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나는 많은 분들이 지적하는 ‘재판 지연’에 대해서는 김 대법원장 탓을 크게 하고 싶지는 않다.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었던 코로나로 인해 밀린 재판들이 너무 많았고, 그 밀려 있는 재판들의 영향을 신규 사건들이 아직도 받고 있다.
김 대법원장 말대로 연수원에서부터 판사로 법조인 경력을 시작한 법관들에 비해, 몇 년의 변호사 근무 후 임관되는 경력 법관들은 적응 기간이 필요해서 일 처리 능률이 높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또한 코로나를 극복하기 위해 화상 재판을 적극 도입한 조치는 시대 발전에 발맞춘 거라 오히려 가점을 주고 싶다.
그러나 김 대법원장은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를 폐지하는 우를 범했다. 이른바 ‘고법 부장’은 사법부에서 그 동안 열심히 공정하게 재판해 온 유능한 법관의 승진 자리였고, 고법 부장 중에서 법원장으로 영전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러한 승진제도를 폐지하면서 동시에 법원장도 요즘 반장 선거 하듯 투표로 뽑는 공모제 형식의 법원장 후보 추천제를 도입하여 승진이라는 제도를 사실상 없애버렸다.
법관 역시 한 명의 직업인이다. 재판을 잘하고 못하는 것이 판별될 수 밖에 없다. 변호사들도 법관의 능력을 평가하는데, 같은 법관들이 다른 법관의 능력을 평가 못할 리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재판을 잘하는 법관에게 승진도 없다면, 재판 못하는 무능한 법관만 가장 큰 이익을 보게 된다. 특히, 공모제로 법원장이 뽑힌다면 일단 재판 능력보다 친소 관계나 사교 능력이 더 중요한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투표와 선거가 기본인 현대 정치에서 포퓰리즘이 판치는 것을 누구나 보고 있지 않은가.
김 대법원장은 법관은 승진제도가 없어도 원래부터 다 잘할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나, 그것은 오만한 선민의식에 불과하다. 결국 김 대법원장은 코로나 등의 사유로 발생한 재판 지연을 적극적으로 해소하지 못하는 구조적인 비효율을 만들어 냈다.
무엇보다 이런 모든 제도적인 부분보다 더 큰 문제는 결국 재판에 있어서의 ‘판결’ 그 자체에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부 신뢰의 근본은 결국 재판이라고 하면서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재판을 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사법부 신뢰의 근본이 재판에 있어 ‘판결’임을 모르는 법조인은 없을 것이다. 그 많은 사법제도 역시 재판의 판결이 신뢰를 받을 때 유효하게 인정받을 수 있다. 김 대법원장은 뭔가 본인이 가장 의미 있는 그럴듯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런데 그 말이 바로 큰 문제가 된다.
왜 법원이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재판’을 하나, ‘공정한 재판’을 해야지. 김명수 대법원장이 밝힌 그 ‘국민’은 과연 어떤 국민인가? 국민들의 상당수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진영이 있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은 아니다. 다당제를 채택한 국가에서 국민들이 각자 지향하는 정당을 선택하고, 그 진영에 지지 의사를 밝히는 것은 필수적이며 중대한 정치적 자유다. 우리나라가 공산당 일당 독재국가가 아닌 다음에야 국민들은 여러 가지 생각과 이해관계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럼 다시 묻자. 김명수 대법원장이 밝힌 그 ‘국민’은 어떤 국민인가? 그 국민은 모든 국민인가? 그렇다면 김명수 대법원장은 스스로 재판의 신이 되려고 한, 아니 재판의 신이 되겠다는 오만을 부린 사람이다. 왜냐하면 모든 국민이 감동 받는 재판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오만함은 바로 무능함과 직결된다.
법관의 정의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임을 자처하는 정의가 아니다. 신이 아니기에 판결을 내리는 법관은 항상 괴로울 수 밖에 없다. 그 괴로움에 비례하여 법관은 스스로 더 많이 공부하고 연구해서, 더 똑똑하고 유능해져야 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오판을 경계하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되돌아보는 유능함을 갖춘 ‘의심하는 정의’가 법관의 정의다.
모든 국민이 아니라면 그 국민은 다수의 국민인가? 그렇다면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 본분을 망각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영원한 ‘다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제의 소수가 오늘의 다수가 되고, 오늘의 다수가 내일의 소수가 되기도 한다. 그런 변동성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가 나라를 발전시키는 큰 힘이다. 사법부는 내일의 다수가 될지도 모르는 오늘의 소수를 원칙을 가지고 보호해야 한다. 다수결로 민주주의가 소수자를 억압하려고 할 때 그 균형을 맞추는 것이 사법부가 가진 삼권분립의 한 축으로서의 역할이다.
특정 진영 입장의 판결 의구심
마지막으로 그 국민은 특정 진영의 국민인가? 그렇다면 김명수 대법원장은 정치인이지 법관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김명수 대법원장이 받는 가장 큰 의심이 바로 이 부분이다. 법관의 탈을 쓴 정치인. ‘우리법연구회’ 출신인 김 대법원장은 임기 내내 진영에 충성한 대법원장이었다.
김 대법원장이 2020년 5월 22일 임성근 전 부장판사와의 면담에서 눈치를 본 국회는 탄핵안 의결을 단독으로 할 수 있는 180석의 민주당 국회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적어도 개헌 저지선까지 밀려버린 국민의힘 국회가 아님은 확실하다.
나는 앞서 전체적인 재판 지연에 대해 김 대법원장을 탓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재판 지연이 아닌 아주 특정한 정치인 재판의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지연은 심각한 문제다. 조국 재판은 아직도 겨우 2심이다. 1심에서 법정 구속을 하지 않았기에, 조국은 무죄추정 원칙을 적용 받아 내년 총선 출마가 확실시된다. 조국이 여전히 피선거권을 가지는 이 상황은 특정 진영의 국민에게만 감동을 주는 재판이 아니었나? 특정 진영에게 감동을 주는 재판은 다른 진영에게는 상처와 좌절을 줄 뿐이다.
김명수 사법부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정진석 의원 명예훼손 형사 판결이다. 정진석 의원에게 6개월 실형을 선고한 판사는 판결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공적 인물이 아니라는 논거를 이유 중에 설시했다. 전 대통령이 공인이 아니면 누가 공인인가. 이 판결은 그래도 판결 주문과 이유는 맞추려고 했던 최소한의 법관의 양심마저도 내팽개친 판결이었다. 김 대법원장이 자기가 내린 판결이 아니라고 변명한다면, 왜 그전에는 없던 이런 황당한 판결이 김명수 사법부에서는 발생하는지 되묻고 싶다.
김 대법원장은 퇴임으로 스스로의 공적 행로를 마무리하기를 원하겠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특정 진영, 즉 민주당 측 눈치를 어떻게 본 것인지에 대한 전말을 밝혀야 한다. 피의자로서 본인에 대한 수사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김 대법원장은 피의자가 된 사법 역사상 최초의 대법원장으로 남게 되었다.
김 대법원장은 마지막 말을 덧붙이면서 자신은 변호사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여전히 ‘의심하는 정의’가 부족한 법관이다. 그는 사법부의 수장을 하면서 이미 특정 진영을 위한 변호사 노릇을 충실히 했다. 6년간 대법원장의 직함을 가진 변호사를 했는데 더 할 필요가 있을까. 두 번 다시 피의자가 되는, 아니 특정 진영을 위한 변호사를 겸했던 대법원장이 우리나라 역사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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