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평화상 후보가 밝히는 중국의 소수민족 박해 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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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09.09.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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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의 어머니’가 말하는 ‘조국’의 참상
▲ 일본 문예춘추 2009호 9월호 표지

[일본 문예춘추 2009년 9월호] 레비야 카디르 세계위구르회의 의장

나는 7월초 동투르크스탄(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일어난 위구르인과 한족의 충돌에 대해 일본국민과 일본정부의 관심을 요청하기 위해 동경에 찾아왔다.

중국정부는 위구르 자치구에서 대규모 학살을 행하고 그 직후 그들의 범죄를 은폐했다. 이 사건의 진상은 그들의 변명만으로는 분명하지 않다. 일본정부가 중국정부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나를 입국허가해주고 발언의 장을 마련해준 데 대해 감사하다.

나는 전화나 메일로 지난 7월 5일 시위를 선동한 사실이 없다. 그때를 전후해 위구르에 메일을 보낸 적이 없다. 전화를 중국정부가 도청한 기록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자치수도 우루무치에 사는 동생에게 전화한 것은 사실이다.

‘내일 오후 5시반부터 우루무치에서 시위를 결행’이라는 쪽지를 인터넷에서 발견하고 그 전날인 7월 4일 동생에게 “무슨 일이냐? 무사하냐?”라고 물었다. 중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시위를 준비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다만 내 11명의 아이들 중 2명은 지금도 중국에 투옥돼 있고 현지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면 당국은 반드시 내 친족을 주시하므로 걱정이 돼 전화를 했던 것 뿐이다.

1997년 위구르 구르자 시에서 시위에 참가했던 위구르인들이 구속돼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구르자 사건이 있었다. 이때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교훈에서 우리는 이번에 반드시 정보를 파악해 국제사회에 제대로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 직원을 포함 현지의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전해 5일 아침부터 열심히 정보 수집을 계속해 왔다.

 

시내가 모두 정전

그들의 말을 종합하면 현지 시간으로 오후 4시반부터 5시 사이에는 이미 시위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경찰도 현장에 없었고 평화적이었던 것 같다. 6월 26일 광동성 장난감 공장에서 발생한 위구르인 노동자에 대한 한족의 폭행사건에 관련된 시위였는데 결코 폭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위구르 학생들은 중국 국기를 가지고 그 현장에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평화적 시위이다. 당신들을 믿으니 우리 얘기를 들어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미국에 있는 우리에게 많은 전화가 왔다. 경찰이 큰길을 양쪽에서 봉쇄하고 시위대를 진압하며 무차별 발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50명이 넘게 쓰러졌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그 시간에는 인터넷도 국제전화도 차단되지 않아 현장의 사람들이 도망치며 송신한 정보이다.

해가 진 뒤 우루무치 시내 전체가 정전이 됐다고 한다. 동시에 우루무치에 국제전화가 안 되고 정보를 파악하기 어렵게 됐다. 그러나 중국 국내 전화는 아직 연결돼 동경에 거주하는 동지가 북경에 전화를 해 그 우인을 경유해 정보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정전 직후 귀가 찢어질 듯한 총소리가 여기저기 들리고 4~5시간이나 계속됐다고 한다.

시위 다음날부터 중국정부는 거국적으로 피해를 입은 한족 상점들을 유별나게 크게 보도해 한족의 일반 시민들도 위구르족에 보복해야 한다는 듯한 선동을 시작했다. 한족이 무기를 들고 폭동을 해도 중국 경찰당국은 아무 제재를 하지 않았다.

그후 우루무치는 물론 신장 전 지역에서 경찰이 한집 한집 수색해 위구르 남자들을 잡아갔다. 당국은 1,400명으로 발표한 모양인데 실제는 그 몇 배, 몇 십 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일련의 충돌에서 피해를 입은 한족에 대해서는 유족 1인당 20만 위안(약 270만엔)의 보상금을 지급한다는 방침이 제시됐다. 그러나 위구르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없었다.

 

조국에서 쫓겨나는 젊은이들

중국정부의 탄압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특히 강한 반발을 사는 것은 위구르 젊은이들을 강제로 중국 내륙부로 보내고 대신 한족을 위구르에 유입시키는 정책이다. 여성은 한족과 결혼시키고 남성은 노동력으로 혹사한다.

정부가 발표한 통계로는 2006년 이후 중국 각지에 강제 연행돼 간 위구르인은 여성만 3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들의 태반은 빈곤한 농민 자녀들이다. 예를 들면 그들이 4,000킬로미터 떨어진 광동성까지 가는 데 교통비만해도 상당히 든다. 신변 잡화도 사야 한다. 그 돈을 마을의 관리가 은행에서 빌리게 한다. 그렇게 해서 연행돼 간 곳에서 약속된 급료의 몇 분의 1 정도에 일을 해야 한다. 마을에 남은 부모가 빌린 돈을 갚아야 한다. 여성들은 공장 뿐 아니라 술집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다.

중국정부는 위구르인 등 소수민족을 우대해 직업을 갖게 한다고 선전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위구르 청년들이 보통의 직장에서 생활하지 않는다. 24시간 엄격한 감시 속에서 일을 한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한가. 예를 들면 어느 마을에서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 몇 명을 반정부적 주장을 한다는 이유로 구속해 처벌한다. 주변 사람들이 무서워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면 마을마다 정부가 결정한 대로 사람들을 연행해가고 대신 한족이 들어오게 한다.

정부는 위구르인들을 노동자로 받아들이도록 기업에 요청한다. 기업으로서도 싼 노동력이 매력이 있다. 현지의 한족에 비하면 위구르인 노동자는 3분의 1 정도의 급료를 주면 되기 때문이다. 노사계약서를 주고 받을 때도 실제 노동하는 위구르인은 일체 관여하지 못한다. 정부 관리와 기업이 체결한다. 급료의 30%가 노동자에 주어지고 70%는 정부로 간다. 전근대적 노예제와 같은 상황이 현재 존재하는 것이다.

중국정부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결혼증명서도 발급받지 못한다. 농민의 경우 가족 전체의 토지가 몰수된다. 그래도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중국에 반항하는 반정부주의자, 분리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여지고 구속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가혹행위가 행해지는 데도 한족의 질투를 사는 경우도 있다. ‘위구르인들처럼 싼 노동력이 오니까 우리 직장을 뺏긴다’고 생각하는 한족도 있다. 한족은 정부가 얼마나 위구르인을 꼼짝 못하게 하는지 전혀 모른다.

7월 5일 시위의 계기가 됐던 6월 26일 광동성의 장난감 폭동도 정부의 교묘한 도식(圖式)에서 발생한 것이다. 위구르인 노동자 800명이 거주하는 합숙소를 심야에 쇠파이프를 든 수천명의 한족들이 습격한 것으로 듣고 있다.

이 폭동을 둘러싸고 정부는 최초에 위구르인 남성이 한족 여성을 폭행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 원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진상은 확실하지 않다.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정보에는 그 800명 중 약 600명이 도망을 할 수 있었으나 200명 정도는 중상을 입거나 사망했다는 것이다. 60여 명이 사망, 12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는 정보도 있는데 중국정부는 사망자가 2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느 외국 언론기관이 광동성에서 현지 한족 사람을 인터뷰하면서 혼자 7명의 위구르인을 죽였다고 자랑삼아 말하는 한족이 있었다. 이를 봐도 어떻게 사망자가 2명 뿐이겠는가.

자유아시아방송의 광동어 방송은 위구르인 부상자를 치료한 병원에 전화 취재를 했는데 거기서 한족 의사가 “위구르인 같은 자들은 모두 죽어 싸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때의 영상이 유투브에 나오니까 한족들의 댓글이 쏟아졌다. 가해자를 찬양하고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위구르인은 모두 죽여 버려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것이 위구르인의 반발을 일으켰다. 장난감 공장 사건 이후 열흘이 지난 7월 5일까지 정부의 제대로 된 코멘트가 한마디도 없었다. 이에 위구르인 학생들이 항의 의지를 호소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 7월 5일 시위였던 것이다.

 

남은 방법은 세 가지 뿐

어째서 14억 중국에서 이런 사태에 대해 이상하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인가. 공산당이 최근 10년 동안 선전기관을 총동원, 위구르인을 테러리스트라고 선전해온 것이 효과를 발휘해 이런 오해가 한족의 머리에 자리 잡았고 현재와 같은 가공할 사태를 낳은 것이다.

최근에는 중국정부가 위구르를 필사적으로 동화시키려 하고 있다. 이미 만주족은 완전히 동화됐고 내몽골도 거의 동화됐다. 오늘날 일정한 존재감을 보이는 소수민족은 티베트족과 위구르족 뿐이라는 인식이 정부에는 분명 있을 것이다.

티베트에는 역사적으로 전세계에서 응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도 티베트를 가혹하게 대하지 못한다.

그러나 위구르의 경우 주목을 별로 받지 않고 현지 정보는 차단돼 있다. 우리의 목소리는 최근까지도 국제사회에 전달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강제로 위구르의 종교와 언어를 빼앗고 많은 정치범을 투옥해왔다.

장애가 되는 것은 힘으로 배제하면서도 마음먹은 대로 동화정책이 진전되지 않는 것에 초조한 모양이다. 우리가 없어진다면 풍요로운 땅을 자기들 좋을 대로 쓸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그들에게 있는 것이 확실하다.

우리가 지리적으로 속해 있는 곳은 중앙아시아로 불리는 지역이다. 문화적으로도 중국보다는 중앙아시아가 가깝다. 소련 붕괴 후 서투르크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우즈베키스탄은 차례로 독립을 성취했는데 투르크스탄 중에서 독립하지 못한 곳은 우리 위구르 뿐이다. 그 독립을 막기 위해 위구르인을 반드시 동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중국정부는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줄곧 질문을 던지고 싶다. 중국정부가 항상 민족단결, 민족융화만을 선전하고 있는 것은 자기들의 민족정책이 실패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고.

중국공산당이 그들이 주장하는 만큼 정의로운 정당이라면 위구르인들이 왜 지지하지 않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나는 지금 위구르인에게 남은 길은 세 가지 뿐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하루 세끼 식사를 거르지 않는 것만을 생각하고 그 밖의 일은 일체 생각하지 않고 정부의 뜻을 받아들인다. 둘째, 정부가 하는 것에 불만을 말하고 감옥살이 하는 것 셋째, 이번처럼 시위에 참가하는 것 그런데 시위에는 바로 얼마 전까지 밝혀진 바와 같이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 것

지금 우리는 온힘을 다해 세계에 호소해 현장에서 행방불명된 위구르인의 숫자를 파악하려 한다. 이 일과 동시에 유엔에 대해 독립된 조사단을 파견할 것을 의뢰하고 있다.

위구르인은 유구한 옛날부터 자신의 슬픔을 노래나 춤으로 해소해 왔다. 위구르의 노래는 그 시대 시대에 들이닥친 재난과 고난을 주제로 한 것이 대부분이다. 아무리 대단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노래와 춤으로 승화시켜 고통을 견뎌왔다. 한 달에 한 번 부락의 또래들이 모여 노래와 춤을 즐기는 장소를 위구르어로 ‘메슈라프’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대대로 이어온 멋진 풍속이다.

우리 ‘세계위구르회의’가 하고 있는 것도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활동이다. 세계의 민주국가는 중국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나를 활동하게 한다. 앞으로도 끝까지 우리의 자유와 자결권을 요구하는 활동을 할 것이다. #

번역·이영훈 교포교육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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