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붕괴의 의미
베를린 장벽 붕괴의 의미
  • 미래한국
  • 승인 2009.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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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진단] 이영기 명지대 겸임교수
▲ 명지대 독일및유럽연구센터 소장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통쾌하게 무너졌다. 1961년 8월 13일 구축한 이후 28년 만에 일어난 세계사적 사건이다. 어느덧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 독일에서는 정부 및 민간단체 주관으로 수많은 기념행사가 진행되는가 하면 장벽 붕괴에 관한 수많은 서적, 잡지, TV 라디오, CD 등이 출간되고 있다. 특히 동독 평화혁명의 본고장이었던 베를린에서는 각종 박람회가 열리고 있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역사적 우연인가 아니면 다양한 인과관계에서 비롯된 것인가? 필자는 단연코 후자라고 생각한다. 역사의 흐름에는 ‘우연’이 없다.
베를린 장벽 붕괴의 원인에는 국제적 측면과 국내적 측면이 있다.

국제적 측면에는 3가지가 있는데 첫째,  고르바초프의 역할이다. 1985년 집권한 그의 ‘신사고’를 통한 평화사상은 독일 및 유럽의 변화에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평화공존의 수정을 통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이데올로기적 투쟁이 아닌 논쟁 문화를 통한 선의의 체제 경쟁을 하자고 했다. 이것은 동유럽제국에 자유로운 체제의 선택을 준 셈이다.

둘째, 헬싱키 프로세스이다. 1975년 8월 1일의 헬싱키의정서는 전후 가장 큰 국제회의로 유럽의 평화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이 의정서의 합의 내용은 집단적 평화 확보, 경제적 공동 노력 그리고 국가주권, 경계선의 불가침, 영토적 통합, 국내문제의 불간섭 같은 기본 원칙이었다. 또한 인권 존중, 기본권 및 자유권의 보장 그리고 인도적 분야에서의 공동 노력에 대한 요구사항도 내포했다. 특히 이 인권조항은 그 후 동유럽과 동독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셋째,  서독의 통일정책이다. 독일의 통일은 흔히 아데나워, 브란트 그리고 콜의 합작품이라고 한다. 그들은 모두 적시, 적소에서 통일정책을 감행했다. 아데나워가 그의 서방정책을 통해 통일의 토대를 닦았다면, 브란트는 그것을 바탕으로 동방정책을 감행했다. 이 두 정책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고 상호 보완 관계로 서독의 외교정책이 전 유럽의 평화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독일인들은 이 속에서 자결권을 통한 통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1983년 집권한 콜은 역동적인 통일정책을 감행했다. 그는 확고한 서방세계와의 결속과 NATO를 통한 완전무결한 안보체제의 확립을 토대로 소련과 동유럽과의 대화 및 협력을 추구했다. 통일과정은 서유럽 뿐만 아니라 전 유럽의 통합을 위한 원동력으로 간주했다. 동·서독 관계에서는 철저한 상호주의 원칙을 고수했다.

국내적 측면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었다. 우선 동독의 경우 정치적으로 모든 것은 당에 의하여 결정되고,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은 주어지지 않았으며 ‘Stasi’와 같은 감시체제는 국민들의 불안과 공포를 조성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동독 주민들은 동독의 유사시 고르바초프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경제적인 문제로서 계획경제에 의한 생활수준의 저하, 열악한 주거환경, 미발달의 하부구조 그리고 특권계급과 서민 간의 현격한 생활 차이를 들 수 있다.

셋째, 사회적 원인으로 상이한 생활수준을 가진 계급사회, 헌법적 이론과 사실상의 사회정책 간의 차이 그리고 서독체제와의 비교에서 오는 차이를 들 수 있다.

동독 정권은 베를린 장벽 구축 후 28년 간 정치적 안정화, 경제적 활성화 그리고 사회적 평등사회를 위해 노력했으나 체제 자체의 모순성과 취약성으로 정치, 경제 및 사회적 위기를 맞이하게 됐다.

1989년 전국적으로 전개된 동독의 평화혁명은 동독의 국내·외적 조건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1989년 5월부터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1년 4개월의 기간은 그야말로 극적인 장면의 연출이었다.

1989년 5월 2일 헝가리·오스트리아 경계선의 일부가 열리면서 철의 장막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5월 7일 동독의 지방선거가 부정선거로 끝나자 동독주민들의 시위가 비록 그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공공연한 반정부 데모의 형태로 일어났다.

7, 8월 여름에 접어들면서 동독 주민들은 휴가철을 이용해 서독 탈출을 위해 폴란드, 체코, 헝가리에 있는 서독 대사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탈출이 안전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프라하 대사관은 4000명이나 수용했다. 서독 정부는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그들의 서독 이주를 가능케 했다. 1989년 한 해 동독인들의 서독 이주는 약 35만 명에 달했다.

이와 같은 대량 탈출은 남은 동독인들에게 동요를 일으켰고, 그 와중에도 거리 시위가 9, 10, 11월에 걸쳐 전개되었다. 그 거리 시위의 중심지는 라이프치히이다. 월요데모로 유명해진 곳으로 이 월요데모는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교회는 반대세력의 중심지이자 결정체로서 역사적인 역할을 하였다.

월요데모 중 가장 중요한 날은 10월 9일로, 평화혁명 성공의 날로 기록된다. 게반드하우스 음악협회 지휘자인 쿠르트 마즈어의 역할로 동독정권의 무력진압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고르바초프의 신사고에 따라 과거와는 달리 소련군의 진압도 없었다. 이 시위에서 7만 명의 동독 주민들은 “우리는 국민이다”라고 함성을 질렀다. 10월 9일은 혁명이 평화스럽게 흘러간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또한 국민 승리의 날로 부각됨으로써 동독의 자체 해방과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시간문제임을 뜻하기도 했다.

10월 18일 18년 간 집권했던 호네커는 저항 없이 국민의 힘에 의하여 물러났고 그 후임에 에곤 크렌츠가 들어앉는다.

1989년 11월 4일은 동베를린에 있는 알렉산더 광장에 50만 명 이상의 군중들이 모여 항의한 날이다. 동독 역사상 가장 많은 군중이 운집한 날이다. 시위 군중은 언론의 자유, 의견의 자유, 집회의 자유 그리고 자유선거 같은 동독의 개혁과 민주화를 원했던 것이지 일당독재하의 삶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11월 7일 빌리스토프 정부 내각이 경질되고 개혁파로 알려진 모드로브 정부가 그 자리를 이어받는다.

드디어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의 날이 왔다. 공보비서인 샤보브스키가 오후 6시 여행 규정에 관한 발표를 하게 되자, 한 기자는 언제부터 그것이 효력이 있는가 물었고 그는 얼떨결에 ‘즉시’라고 회답했다. 이 ‘즉시’라는 대답은 TV로 생중계되었기 때문에 동·서 베를린 시민들이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양 베를린 주민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장벽 초소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명령계통이 마비된 상태에서 장벽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독일인들은 9일에서 10일로 넘어가는 밤을 ‘밤 중의 밤’으로 불렀고, 장벽 붕괴 후 10일 동안 천백 만의 동독 주민이 서베를린과 서독을 방문했다.

당시 바이체커 대통령은 평화혁명을 자유의 승리로 풀이했고, 자유철학자 칼 포퍼는 역사상 민주주의와 관련해 국민에 대한 통제는 있었어도 국민에 의한 지배는 없었다고 동독 국민의 힘을 극찬했다. 동독의 민권운동가이고 목사이기도하며 지금도 동독독재체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있는 에펠만은 1989년 혁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그것은 한 독재체제에 대한 승리의 해이다. 동독인들은 자유, 민주적 주권, 인권 그리고 하나의 법치국가를 쟁취했다.”

또한 라이프치히 평화혁명을 이끌었던 니콜라이 교회 담임목사는 2008년 그의 은퇴를 계기로 평화혁명의 의의를 “그것은 가장 위대했다”고 하면서 “그 성공의 비결은 예수의 힘입은 ‘비폭력’ 이다”라고 회고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결국 ‘우리는 국민이다’라는 대중의 힘에 의하여 무너진 것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독일통일과 유럽 통합을 가져왔고, 미·소간의 냉전을 종식시킨 세계사적 사건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시장경제라는 세계 보편적 가치 하에서만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한반도의 진정한 자유와 평화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하에서 하나가 될 때 가능하다.

통일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독일의 경우는 적극적인 통일옹호론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통일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과는 통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독일 통일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

 
고대 정외과 졸업
함부르크대 정치학석사
자유베를린대 정치학박사
명지대 독일및유럽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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