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독립의 문, 카이로 선언
대한민국 독립의 문, 카이로 선언
  • 미래한국
  • 승인 2010.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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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정일화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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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카이로선언’은 연합국이 한국의 독립을 처음 인정한 선언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카이로선언’의 제정 과정은 물론 이 선언을 입안한 사람에 대해서도 그동안 거의 알려진 바 없었다.

한일합방 100주년을 맞이해 한국을 식민지에서 해방하기로 한 첫 결정인 ‘카이로선언’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책(선한약속 刊, 2010)이 한국언론재단의 지원으로 출간됐다. 이 책의 저자 정일화 박사(본지 편집위원 역임)는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과 논설위원을 지낸 언론인 출신이자 국제관계학을 전공한 학자로 1,000페이지 가량의 미 국무부 기록과 처칠 회고록, 루스벨트 전기 등을 바탕으로 이 책을 펴냈다. 600페이지 가량의 두툼한 책이지만 쉽고 재미 있게 글을 구성했다. 지난 3월 23일 전쟁기념관에서 만난 저자는 이 책을 저술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카이로선언에 의해서 대한민국이 독립됐다는 것은 다 압니다. 카이로선언에 대한 책이나 논문이 지금은 100편도 넘게 나왔어야 하는데 국제사회에 내놓을 만한 논문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걸 모르는 채 지나왔다는 것이 이 책을 저술한 하나의 관점입니다. 또 국내에서는 한국의 역사를 김구 쪽으로 할 것이냐, 이승만 쪽으로 할 것이냐를 두고 다툼을 하는데 국제 수준에 맞는 대한민국의 독립 절차를 알고 그 다음에 김구 또는 이승만이 어떠한 역할을 했다고 해야 국제적으로도 인정이 됩니다. 그런 것이 전체적으로 제가 말하고 싶었던 외침입니다.”


한일합방 100주년, 지나간 역사로부터의 교훈

지나간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하는 의미도 있다.

▲ 저자 정일화 박사
“금년이 한일합방 100주년입니다. 너무 치욕적인 역사 경험인데 그때 어떻게 해서 한일합방이 됐는지, 또 만일 그런 일이 온다면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지, 역사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국민들이나 역사학계에서는 이완용이나 송병준 같은 친일파가 나라를 팔아먹어서 한일합방이 된 것이라고 재단하고 있습니다. 물론 1910년으로 돌아가 보면 그것도 하나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주원인은 일본입니다. 일본은 치밀한 전략에 의해서 한국을 침략했습니다. 도저히 우리 힘으로 풀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1943년에 덜커덕 카이로선언이 나와서 일본의 계산을 한꺼번에 무너뜨린 겁니다.”

1943년 11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 총리 그리고 장제스 중국 총통은 이집트 카이로에 모여 2차 세계대전 종전 방안을 협의하는 회담에서 공동선언서를 발표한다. 이 공동성명은 카이로에서 만들어졌지만 선언은 같은 해 12월 1일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 테헤란 회담에서 발표되었다.

카이로 회담은 2차 대전을 마무리를 위해 열린 군사회담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공동선언서에는 유럽 문제는 없고 모두 아시아 문제로 내용이 채워진데다 회담의 공식의제에 한 번도 오른 일이 없는 한국의 독립이 선언에 들어갔다. 그 당시 100개 이상의 식민지가 있었지만 유독 한국을 꼽아서 “일본은 폭력과 탐욕에 의해 약취(略取)한 모든 영토로부터 축출될 것이며 한국인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과정을 통해 (한국을) 자유독립하게 한다”는 결의가 이 선언서에 포함된 것이다. 이 조항 중 ‘폭력과 탐욕’ 구절은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분명한 국제적 근거도 제시하고 있다. 독도는 대한제국이 일본침략세력에 의해 점진적으로 침탈되고 있던 1905년 2월 일본 시마네현이 일본영토로 편입했기 때문에 분명히 ‘폭력과 탐욕’에 의해 점령한 땅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한국 독립 조항 들어간 자체가 기적

이후 ‘카이로선언’은 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모든 국제회의의 표준이 되었고 미 국무부는 얄타회담(1944년 2월 4~11일)과 포츠담 회담(1945년 7월 17일-8월 2일)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철저히 카이로선언을 기본으로 삼아 한국 독립을 챙겼다.

이 선언서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있은 후 유엔총회로 효력이 계승되어 유엔선거감시단에 의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게 되었고 결국 1948년 8월 15일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인 대한민국을 수립하게 되었다. 카이로 공동 선언은 1919년 최남선이 쓴 기미독립선언서에 이어 연합국이 동의한 대한민국 제2의 독립선언서였던 셈이다. 저자는 카이로선언에 한국의 독립 조항이 들어간 자체가 기적이었다고 말했다.

“연합국 수뇌부들이 카이로에서 만난 것은 히틀러를 빨리 망하게 하기 위한 군사작전계획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처음에 회담을 열기로 했을 때는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과 참모들이 모이기로 구상한 것인데 스탈린이 카이로까지 오지 못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장제스가 초청되었고 회담 진행 순서와 의제도 당초 계획과 달라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카이로 회담이 처음 계획과 약간씩 다르게 진행되면서 간격이 생겼고 벌어진 그 틈을 통해 공동선언서에 한국독립조항이 들어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이 조항을 초안한 루스벨트의 오랜 동반자인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Harry Lloyd Hopkins)의 역할에 주목했다.

“공동성명을 작성할 만큼 아직 연합국들은 서로의 입장과 주장이 합쳐지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때 해리 홉킨스는 회담 3일째인 11월 24일 루스벨트 숙소의 조용한 일광욕실에서 백악관 문서기록관을 불러 생각을 정리해가며 공동성명 초안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초안은 네 번 고쳐지는 과정을 거쳐 다섯 번째 완성되었는데 초안에 포함되어 있던 한국 독립 원칙은 끝까지 유지됐습니다. 영국이 미국 초안을 보고 실망한 나머지 수정을 제의하면서 오탈자만 손을 보겠다는 전제를 붙이고 수정 제의를 했지만 핵심내용은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루스벨트나 홉킨스는 영국을 위기로부터 구해준 인물이었기 때문에 처칠이 정면으로 부딪힐 수는 없었죠.”

저자는 홉킨스가 침략주의 철학에 의해 억눌린 식민지 국가를 자유케 해야 한다는 루스벨트의 정치철학을 그대로 갖고 선언서를 초안했다고 강조했다. 이 책에 소개된 해리 홉킨스는 감리교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기 까지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그 당시 미국 감리교의 특징이었다. 루스벨트와 홉킨스는 카이로 회담을 마치고 테헤란 회담으로 가면서 예루살렘을 일부러 돌아보는 등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한국 같은 식민지 노예생활을 하는 국민을 해방시키는 것이 이번 전쟁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홉킨스가 초안한 카이로선언에도 그러한 철학이 녹아져 있었던 것이다. 

“자유, 독립은 민주주의 개념이고 크리스천 개념입니다. 동양에는 이러한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 독립, 평등 개념을 카이로선언에서 이어받아 결국 대한민국을 건국했습니다. 홉킨스가 한국 독립의 대외적인 전환점을 만든 사람이라면 1919년 독립선언서를 만든 최남선은 그것을 할 수 있도록 내면적으로 씨를 뿌린 사람입니다. 저는 두 사람에 대해서 우리 정부가 독립건국 훈장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서은옥 기자 seo0709@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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