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에서 매주 30여명 모여 예배 드리다 발각
산속에서 매주 30여명 모여 예배 드리다 발각
  • 미래한국
  • 승인 2010.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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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이야기] 2008년까지 지속된 북한내 어느 지하교회


하나원 교육과정을 마치고 남한사회에 첫걸음 내디딘 한 탈북 청년을 지난 4월 서울의 한 지하철역 부근 커피숍에서 만났다.

아직 커피가 익숙하지 않고 지하철을 탈 줄 모르는 ‘진짜 북한 사람’인 황정태 씨(28)는 계속되는 ‘서울 스트레스’에 피곤해 보였다. 그가 사는 지역의 탈북자지원센터에서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낯선 남한생활에서 오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교차되는 심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는 탈북과 남한입국 과정에 대해 중국과 태국을 거쳐 남한에 들어오는 3개월의 고통의 시간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여정이었다고 말했다. 부모를 떠나 목숨을 걸고 실행한 탈북. 그는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는지 번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북한 무산의 국경지역 경비부대에서 운전병으로 일하던 그가 하루아침에 탈북민으로 변한 것은 박 씨라는 한 아주머니 때문이었다. 현재 육순 정도 되는 박 씨 아주머니는 ‘고난의 행군’ 시절부터 무산 지역 국경선을 드나들던 장사꾼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좋은 물건들을 들여와 경비대 군인들에게 주고 또 보위부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면서 국경을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겉은 장사꾼, 속은 기독교 전도자

2000년까지만 해도 무산지역의 초소는 저녁 9시부터 새벽 3시까지 사실상 개방되어 있었고 배고픈 북한 사람들은 경비병에게 술이나 담배를 안겨주면 그냥 중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주머니도 그런 상황에서 중국에서 가져온 보따리를 검색 없이 북한으로 들여올 수 있었다. 당시 몇 년간은 박 씨에게 ‘전성기’였다. 그러나 2008년 무렵 상부에서 국경 경비 업무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이 내려왔고 박 씨 아주머니로부터 뭔가를 얻어먹은 군인들은 모두 검열 대상에 올라 있었다. 황정태 씨도 그 대상이라는 얘기를 본부의 친구로부터 듣고 그는 그날 밤 지체 없이 탈북해야 했다.

황 씨는 이 아주머니에 대해 놀라운 증언을 했다. 박 씨 아주머니는 겉으로는 장사꾼이었지만 사실은 북한에 기독교 복음을 전한 전도자였다는 것이다. 황정태 씨도 박 씨로부터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때부터 더 깊이 박 씨 아주머니와 신앙적 교제를 했다고 한다. 황 씨가 중국으로 탈북하여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박 씨 아주머니 덕분이었다.

박 씨 아주머니가 처음에 중국으로 간 것은 굶주린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목적이 전부였다고 한다. 멀리 함경북도 샛별군에서 무산까지 내려와 국경을 넘어 중국에 들어가 화룡에 있는 친척을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박 씨는 친척을 찾지 못하고 어느 조선족교회에서 정 집사라는 여자 교인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 그녀는 보름간 교회 지하방에 머물면서 정 집사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박 씨는 이때부터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성경을 배우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훈련을 받았다. 막연하지만 예수를 믿으면 약품과 물품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약속을 받고 정 집사와 교제를 이어갔다. 최소한 먹는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 집사가 넘겨주는 약과 쌀과 옷을 북한에 들여보냈다. 확실치는 않지만 남한이나 미국의 어느 선교단체가 이 조선족교회에 많은 지원을 해준 것으로 생각됐다. 박 씨 아주머니는 정 집사로부터 시시때때로 전도에 필요한 돈까지 지원받았다.

박 씨는 그 돈을 밑천으로 제법 장사도 잘해서 박 씨 집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박 씨는 자신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 믿음이 가는 사람을 선별하여 한 사람씩 중국으로 데려가 정 집사 집에서 보름 가까이 머물게 했다. 그러면 정 집사는 이 사람을 잘 양육하여 기독교인이 되는 과정을 밟게 했다.

모두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복음을 듣고 변화되었다. 정 집사로부터 전도를 받은 사람이 북한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을 소개하면서 전도 받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러나 박 씨는 이러한 전도 과정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도 박 씨가 전도자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박 씨는 중국에서 우연히 정 집사를 만난 것처럼 꾸몄기 때문이다.

이 무렵 박 씨는 성경을 북한으로 반입하는 일을 본격화했다. 초기에는 쌀자루나 된장 단지 속에 작은 성경들을 비닐에 싸서 숨겨 갔다. 당시만 해도 경비대의 검열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을 가져가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이 성경들은 이미 예수를 아는 북한의 지하교인들에게 전해졌다.


주일마다 30여명이 함께 드린 예배

무산에서 걸어서 하룻길이 되는 깊은 산속에 위치한 박 씨네 집은 낡은 농가다. 남편이 군으로부터 1정보의 땅을 위탁받아 밭으로 개간한 곳에 지어진 집이다. 넓은 땅에 농사를 짓기 위해 지하교회 교인들을 노동자로 불러들였고 박 씨는 그들과 함께 주일마다 산 속에서 예배를 드렸다. 농사는 주로 감자를 심었고 자급자족할 만큼 수확이 되었다. 산골짝에 100여 통의 양봉을 쳐서 꿀을 장마당에 팔기도 하며 그런대로 먹고 살만 했다.

특히 무산 광산에 끌려온 평양 소개민(평양에서 추방당한 자)들 가운데는 중국 친척이나 남한 친척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박 씨와 가까이 친하게 지냈다. 그들은 중국 경험이 많은 박 씨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고 중국서 가져온 성경책이나 전도 소책자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산속의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시 북한 당국은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청년들을 모아 ‘백두산선군돌격대’를 만들어 주택, 발전소 건설 등의 특별사업을 전개했다. 당시 5만여 명에 달하는 청년들이 돌격대에 동원되기는 했지만 노동과 굶주림을 견딜 수 없어 이탈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 약 20여 명이 박 씨네 집이 있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왔다. 박 씨는 그들을 받아들여 먹을 것을 주고 또 잠잘 곳을 마련해 주었다.

보위부의 추격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그들에게 박 씨는 복음을 전했다.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를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도 있었다. 또 더러는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중국으로 데려가 성경공부를 하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주일이 되면 산 속은 쥐죽은 듯 조용했지만 모두가 분주했다. 돌격대 청년들과 지하교회 성도들이 함께 약 30여 명의 성도가 모이는 ‘산 속 예배’가 드려졌다. 예배는 성경 봉독과 기도로 이루어졌으며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속삭이는 목소리로 드리는 예배였지만 참석자들의 마음은 뜨거웠다고 한다.

그러나 산 속의 교회는 2008년 들어 깨지고 말았다. 함경북도 도검찰소에서 특별 검열 명령이 내려져 산 속은 발칵 뒤집혔다. 박 씨는 평소에 군부대와 보위부에 손을 써놓아서 그동안 별탈없이 잘 지낼 수 있었지만, 누군가가 박 씨를 상부에 고발하는 통에 박 씨는 체포되고 말았다. 수색 과정에서 기독교인이라는 물증으로 성경책이 나왔고 중국과 통화한 근거가 남아 있는 휴대폰이 적발되었다.

박 씨는 도 보위부의 조사를 받은 후 결국 정치범 수용소로 갈 것을 각오하고 있을 때 놀랍게도 노동단련대로 보내졌다. 그 곳에서 박 씨는 1년을 고생하고 풀려날 수 있었다. 기적이었다. 박 씨는 평소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 말씀대로 이웃에게 선을 베풀며 살아왔다. 그래서 아주머니를 취조하는 보위부 사람들 자신이 박 씨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탈북청년 황정태 씨는 매일 박 씨 아주머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한다. 언젠가는 남한 땅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김창범 편집위원 cbkim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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