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모택동-김일성 비밀 서신 북한의 남침승인 과정 드러내
스탈린-모택동-김일성 비밀 서신 북한의 남침승인 과정 드러내
  • 미래한국
  • 승인 2010.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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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송종환 미래한국 편집위원·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
▲ 송종환 편집위원


6·25의 북침 주장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전쟁을 구상하고 시작할 때부터 갖고 있던 위장전술임이 북한 자료 분석을 통해 밝혀졌다.

1992년부터 러시아가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을 정도의 ‘결정적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전쟁 전후 스탈린-김일성-모택동 간에 오고 간 비밀전문들을 공개함으로써 1970년대 이후 수정주의론자들이 주장해온 북침설이나 남침유도설은 지탱되기 어려워졌고 남침, 북침 논쟁도 사실상 끝난 것처럼 보인다.


1992년 이후 러시아 비밀문서 공개


1992년부터 러시아에 의해 공개된 세 종류의 한국전쟁 관련 비밀문서들은 한국전쟁이 남한의 북침에 대한 북한의 반격이라고 되풀이해 온 구 소련과 북한의 주장이 거짓 선전에 불과하고 전쟁은 스탈린의 계획과 소련 군사고문관들이 작성한 군사작전계획에 따른 북한의 남침이며 김일성의 역사적 결단에 의한 전쟁이 아니라 스탈린의 전쟁임을 밝혀 주고 있다. 즉, 김일성이 남침 전쟁의 승인을 수차례 스탈린에게 요구해 승인을 얻은 후 남침전쟁의 주연을 맡았지만 전쟁 개시나 그 시기가 김일성의 뜻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

옐친 대통령이 1994년 6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제공하기 위해 한국전 개전에 관해 정리한 216건의 ‘한국전쟁 관련 러시아 외교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무력통일을 위한 대규모 남침 의사를 최초로 밝힌 것은 1949년 3월 5일 모스크바에서의 스탈린·김일성 간 회담에서 김일성이 무력통일을 위한 남침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때 스탈린은 한국군과 한국주둔 미군규모, 남북한 군대의 우열을 질문한 후 북한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답변했다.

해가 바뀌어 1950년 1월 17일 북경 향발 이두연 북한대사를 위한 박헌영 외상 주최 오찬 시 김일성은 소련대사관원들에게 이제는 중국의 통일이 완료되었으므로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중국과 한 차례 더 상의한 후, 2월 9일 군사적 방법으로 통일을 달성하겠다는 북한의 의도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의사를 표명하면서 한반도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의 준비를 시작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 후 소련은 북한을 향해 탱크, 탄약, 군 장비, 대포, 의약품 및 석유 등을 적극적으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자신이 선택한 시기의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1950년 2월과 3월 중 북한 내 전쟁 준비를 감독하기 시작했다. 2월 4일 김일성은 북한의 추가 창설 3개 보병사단용 무기 구입을 위해 1951년 소련의 대북한 차관을 1950년 중에 사용할 수 있도록 스탈린의 허가를 구해줄 것을 쉬티코프 대사에게 요청하고 3월 9일 추가로 1억 2천~5천만 루블 상당의 무기 구입을 요청하는 공한을 쉬티코프 대사를 통해 소련 정부에 송부했다.

소련은 3월 12자 비신스키 외상의 쉬티코프 대사 앞 전문과 3월 18일자 스탈린의 김일성 앞 메시지를 통해 동의했다. 또한 스탈린은 2월 23일 쉬티코프 대사가 겸직하던 북한인민군 군사고문단장직에 전쟁영웅 바시리에프 중장을 임명했다.

그러나 스탈린과 김일성간의 대화 시 스탈린이 강조한 내용은 5월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해 남한 공격에 대한 스탈린의 방침을 설명하자 모택동이 이를 스탈린에게 확인하는 전문을 타전한 데 대해 스탈린이 답변을 해주는 5월 14일자 전문에 나타나 있다.

스탈린은 1950년 4월 모스크바 회담에서 김일성에게 국제환경이 변하고 있다면서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되, 이 문제의 최종 결정은 중국과 북한이 함께 내려야 하며 만일 중국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이 문제의 결정을 연기하자고 제의해 북한과 합의했다면서 김이 모택동에게 설명한 내용을 확인해주었다.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면서 중국을 한국전쟁에 끌어들였는데, 이는 소련이 직접 싸우지 않고 중국을 내세우려는 의도였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끈질기게 남침 승인을 요청했기 때문에 승인을 한 것이 아니라 당시 국제정세와 한국전 개전 시 소련의 손익을 면밀히 계산해 남침 승인 결정을 내렸다.

스탈린이 1949년 계속 김의 남침승인 요청을 거부하고 38선에서의 무력충돌이 전면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쉬티코프 대사로 하여금 철저히 감독을 하도록 10월 이후 수차에 걸쳐 지시했던 것과는 달리 태도를 바꿔 1950년 1월 30일자 전문에서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게 된 이유를 밝히는 자료로는 상기 5월 14일자 스탈린의 모택동 앞 전문과 ‘변화된 국제환경’에 대한 스탈린 자신의 설명을 수록한 보고서가 있다.

러시아대통령실 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에 관한 구 소련공산당 국제부 보고서는 ‘변화된 국제환경’에 대한 스탈린 자신의 설명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1949년 8월 소련의 원자탄 보유, 10월 중국공산당의 승리, 1950년 1월 중 구체화되고 있던 중·소 우호, 협력, 상호 원조조약(이하 중·소 동맹조약으로 약칭)의 체결로 중국이 북한을 도울 수 있고 또 미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에 도전하는 데 더욱 주저하게 될 것이라고 김일성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1월 12일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 밖에 위치한다고 한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선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스탈린, 한국전쟁에 중국 참전 유도

스탈린은 한국 전쟁을 모택동과 먼저 협의했다. 1949년 12월부터 1950년 2월 모택동의 모스크바 방문 후반기에 북한의 남한 공격 실현 가능성에 대해 토의했다는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소련비밀문서 공개 시 중요한 역할을 한 볼코고노프 장군은 모택동의 모스크바 방문 시 스탈린과 1950년 초 여름이 대만과 한반도 문제를 완전히 결정짓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한국전쟁을 일으킨 스탈린의 전략적 의도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949년 스탈린은 군사적으로 미국이 소련보다 월등 강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후 대미관계가 급속히 악화돼 가고 있음에도 만주에 비해 부차적 가치 밖에 없는 한반도에서는 미국과 군사적으로 대결할 의사가 추호도 없었으며 북반부의 소비에트화만을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이 원하던 것과는 달리 모택동이 1949년 후반 중국 대륙을 석권, 공산혁명을 달성하자 1950년 초 그동안 반대해왔던 북한의 한국전쟁 개시 요청을 승인했다. 그는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전쟁 물자를 지원하고 다수의 군사고문단을 보내 철저한 전쟁 감독을 하면서도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끝까지 회피하면서 중국을 한국전쟁에 필사적으로 끌어 들였다. 스탈린은 북한이 남침할 경우 미국이 개입할 것으로 보고 한반도에서 중국과 미국을 싸우게 해 양국을 모두 약화시키려는 세계 전략적 차원에서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부차적으로 한국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대서방 관계 개선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므로 중국공산혁명이 성취되지 않았다면 스탈린은 북한지도부가 무력남침을 주장하더라도 이를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며 최소한 그 시점에서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가 공개한 문서를 통해 스탈린이 한국전쟁 개시 승인, 전쟁 진행 및 지원과 종전, 중국 참전 유도의 핵심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한반도 공산화 통일을 위한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공산집단의 거듭된 남침전쟁 개시 요청의 책임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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