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심리전의 과거와 현재
대북심리전의 과거와 현재
  • 미래한국
  • 승인 2010.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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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한정석 편집위원


4·23 천안함 사태 후, 결연한 대북제재를 천명하고 나선 이명박 정부가 북의 협박 아래 또 다시 흔들리고 있다.

지난달 24일 국방부는 천안함 후속조치로서 ‘대북심리전을 재개한다’고 당당하게 발표했다. 하지만 북한이 즉각 대북 확성기 및 전광판에 대한 ‘조준타격’과 ‘서울 불바다’론으로 위협하자 발표 한 달도 되지 못해‘예산부족’이라는 졸렬한 이유로 대북심리전을 사실상 포기해 버린 것이다.

심리전(心理戰)이 또 다른 형태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북의 위협에 의한 이명박 정부의 대북심리전 포기는 사실상 북에 대한 ‘항복선언’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군사전문가들의 중론이다. 14일 통일연구원의 주최로 열린 ‘대북심리전 전문가 토론’에서 김민석 중앙일보 군사전문기자는 “대북심리전 재개를 포기할 경우 북한은 더 큰 위협으로 나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패배한 심리전이 낳은 종북 신드롬

하지만 ‘더 큰 위협’못지 않게 위험한 것이 바로 국민들의 대북 트라우마(Trauma)다. 대북심리전이 비록 비군사적 대응이라 하더라도 북의 위협으로 이를 포기하면 대한민국 국군의 사기(士氣)와 애국시민들의 호국(護國)의지는 땅에 떨어지기 마련이다. 하이에나 같은 북의 김정일은 과거에도 이를 놓치지 않고 이용해 왔다.

2002년 9월, 부산 아시안게임과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는 대한민국이 어떻게 북한의 대남심리전의 포로가 되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당시 북한은 이들 경기에 각각 250명과 320명의 소위 ‘미녀응원단’을 내려 보냈다. 처음 보는 이 북한 여성들에 국민과 매스컴은 그야말로 ‘환호작약’했다.

경기장에서 북한 미녀들이 ‘우리는’을 선창하면 시민들은 ‘하나다’를 외쳤다.북한 미녀응원단이 있는 곳엔 언제나 30~40대 남성들이 구름떼같이 몰려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광란의 최초 시점이 제2 연평해전 참사로부터 불과 6개월도 안되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분석했다.

은행 강도에게 억류된 여성이 그 강도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 비이성적인 심리증후군은 흔히 자신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존재에 대해 자신과 그 존재를 동일시함으로써 불안을 회피하려는 심리기제로 설명된다.

실제로 북의 직격탄으로 함장과 우리 해군 6명이 사망한 제2 연평해전은 6·25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남북간 무력 충돌이었지만 김대중 정부는 아무런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로지 ‘전쟁만은 안 된다’라는 김대중 정부의 구호는 당시 ‘우리 대한민국의 운명은 북한에 달려 있다’라는 메시지에 다름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국민의 대북 트라우마는 당연한 것이었고 그 트라우마가 결국 북한의 미녀응원단이라는 대남심리전술에 의해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러한 대남심리전을 활용해 결국 핵무기 보유에 이르렀다. 2006년 북한이 핵실험을 할 때까지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북한은 결코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는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북이 핵실험을 강행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북의 핵은 자위권’이라고 비겁하게 말을 바꿨다. 전형적인 스톡홀름 신드롬을 보여준 것이다.


남한의 심리전 2000년 부터 北에 역전

북은 지난 10년간의 대남심리전을 통해 남한을 집요하게 무력화시켰다. 중요한 것은 그 트라우마와 신드롬의 후유증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이번 천안함 사태와 6·2 지방선거에 까지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북단체와 야당은 선거기간 내내 ‘한나라당 찍으면 전쟁난다’고 외쳤고 젊은이들이 여기에 호응했다.‘6월초 전쟁설’과‘한나라당 찍으면 소집 영장 나온다’라는 괴담이 20대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사실은 그들이 진정 평화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겁쟁이들의 트라우마적 행동이었음을 보여준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얼마나 대한민국의 안보를 시쳇말로 말아먹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흔히 심리전을 ‘포성 없는 전쟁’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심리전은‘전선 없는 전쟁’으로 비유되는 4세대 전쟁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전술이다. 전쟁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라면 결국 심리전에서의 승부는 곧 역사적 승부를 가른다는 의미가 된다.

이 심리전의 승부에서 남한은 1980~ 1990년대에 걸쳐 완연하게 북한을 압도했다.

1980년 6월 편성된 대북방송 <노동당 간부들에게> 는 당시 소련의 아프간 침공과 폴란드 노조의 자유화운동, 중국 등소평의 개혁개방의 소식을 북의 고급 엘리트들에게 알리면서 공산주의의 모순점과 민주체제의 우월성 등을 논리적으로 설득해 나갔던 대북심리전의 핵심 수단이었다.

그 결과 1983~1987년 사이에 고급 탈북자들의 귀순 러시가 시작됐다. 1983년 2월22일 미그기를 몰고 귀순한 이웅평을 비롯, 5월 7일 신중철 인민군 대위,1987년 김만철가족 ,유천수 하사, 홍명준 중사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웅평은 <노동당 간부들에게> 방송이 북한 간부들에게 매우 불편한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북한, 대남 선전 인터넷 사이트 이용

그러나 1998년 김대중 정부 집권 이후 대북 프로그램들에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이 금지됐다. 2000년 6·15선언 이후에는 30여년간 지속되던 <노동당 간부들에게>,<남과 북 마주보기>,<남북분단 50년사>등 주요 프로그램들이 폐지된다. 특히 <노동당 간부들에게>는 김대중의 직접 지시로 폐지됐다. 이때부터 남한의 대북심리전은 본격적으로 위축되기 시작하고 대북방송은 북한체제 비판을 금지로 연성화되기 시작한다.

결정적인 것은 2003년 북한이 대남선전방송 ‘구국의 소리’를 폐지하는 조건으로 남한의 대북방송 폐지 제안을 노무현 정권이 사실상 수용한 것이었다. 그 배경에는 비밀이 있었다.

경남대 안민자 박사는 그의 한 논문에서 ‘북한이 2003년 방송을 통한 상호비방 중지를 제안한 것은 남한에서 라디오 매체가 더 이상 어필하지 못하고 대신 인터넷이 보편화되자 대남선전 매체를 인터넷으로 변화시키고자 한 전략’이라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북한은 ‘구국의 소리’와 ‘민민전 방송’을 중지하고 그 채널에 중앙TV를 내보냈다. 대신 이들 방송은 2000년대 들어 온라인 사이트로 개편되었다.

최근 경찰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친북 사이트는 2004년 44개에서 2005년 52개, 2006년 64개, 2007년 73개, 2008년 82개, 2009년 6월말 현재 92개로 해가 거듭될수록 사그러지지 않고 오히려 점증하는 추세를 보였다. 또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3년간 인터넷에 게시된 친북 게시물수는 모두 6,997건이었다. 그 내용들은 대개 주한미군 철수, 국가 보안법 철폐, 징병제 폐지, 북핵 합리화, 이라크 파병반대, 김정일 우상화와 같은 선전물들이었다.

결국 북한은 남한의 대북심리전을 차단시키면서 동시에 대남심리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2007년 9월 28일 청와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방북에 앞서 ‘국정원 등이 폐쇄조치한 친북사이트들을 네티즌들이 열람할 수 있게 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대북심리전의 효과는 과거에 비할 수 없이 커졌다는 점에 예외 없이 일치한다. 1990년대 북한의 경제 실패로 인해 북한주민들의 체제 불만이 어느 때 보다 높아진 이유다. NK지식인연대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북한 주민들이 남한에서 넘어오는 삐라를 보지도 않고 신고했지만 지금은 찾아 읽어 보는 정도”라고 말한다. 체제에 대한 불만이 반체제 심리를 자극해서 남한의 삐라를 일부러 읽게 만든다는 것이다. 라디오 대북방송의 효과도 큰 것으로 전해진다.


대북심리전 기대 이상의 효과 있어

서강대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탈북민 안찬일 씨는 “북한의 중류층은 대개 라디오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남한의 방송을 자주 듣는다”라고 말한다. 특히 “전방의 군인들의 경우 대개 중류층 이상 계층이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으로 한 대북방송은 효과가 크다”라고도 한다. 다만 북한주민들의 기초상식을 바탕으로 해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한데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보다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가 더욱 효과적이라는 데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최근에는 몇몇 탈북민 단체를 중심으로 북한에 USB를 활용한 디지털 삐라에 대한 연구도 심도 있게 진행되고 있다. 북한에 젊은 층들을 중심으로 USB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이 저장장치 안에 세계동향과 대한민국의 실상을 가감 없이 담아 대량으로 보급한다는 전략이다. 문제는 정부의 입장과 시각이다. 현재와 같이 애매한 스탠스로는 민간단체가 자금력과 인력을 투입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대북심리전은 역사가 요구하는‘도전에 대한 응전’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역사란 도전에 대한 응전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수많은 나라들이 도전과 응전 속에서 흥망성쇠를 겪었다. 북한이 천안함을 도발한 것은 곧 우리 체제에 대한 도전이며 우리가 여기에 어떤 형태로든 응전해야 하는 것은 역사적 숙명일 것이다. 심리전이라는 것이 일종의 대항적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점과 과거 남북간의 심리전을 돌아볼 때 북한이 남한의 대북심리전을 두려워했다는 점에서 대북심리전은 분명히 우리에게 응전으로서 가치가 있다. 따라서 이를 선포해 놓고 포기한다는 것은 역사적 책무를 방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울러 대북심리전은 북한동포에게 세계에 대한 알권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반드시 재개되어야 한다. 북한 김정일과 그 집단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북한 주민들이 세상의 진실에 눈을 뜨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대북심리전을 재개하는 것은 군의 사기진작과 북의 도발로 인한 국민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비겁하게 얻은 평화는 전쟁의 초대장”이라고 말한 김희상 한국안보문제연구소장의 고언은 그러한 의미에서 충분히 되새겨 볼 만하다. 응전하지 않는 자에게 역사가 자비를 베푼 적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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