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후퇴작전, 중공군 공격 늦춰
성공한 후퇴작전, 중공군 공격 늦춰
  • 미래한국
  • 승인 2010.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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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아, 장진호!> 이종연 著, 북마크 刊


6·25 60주년인 올해 여러 곳에서 기념행사가 열리고 각종 매체는 특집 기사와 프로그램을 제작해 알리고 있다.

6·25 당시 유명한 전투의 하나가 장진호(長?湖) 전투이다. 학도병으로 참전, 통역장교로 근무하며 이 전투에 참여했던 이종연 미국변호사가 당시의 경험을 담아 <아, 장진호!>를 출간했다.

장진호 전투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갑자기 밀리게 된 미 해병대가 대대적으로 펼친 후퇴작전이다.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 근처 산속에 숨어 있던 중공군 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된 미 해병대가 간신히 탈출에 성공 후퇴했다. 당시 미군들은 일본어 지도 밖에 없어 ‘장진(長?)’을 일본어 독음을 따 Chosin으로 불렀다.

이 전투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으로 불리며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돼 있다. 2차 세계대전 때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2대 동계 전투로도 유명하다.

해발 1,000미터인 산악지대로 낮에는 영하 20도, 밤에는 영하 32도까지 떨어지는 살인적인 추위가 계속됐다. 병기가 얼어붙고 양측의 군대가 방한복이 절대부족해 절반 이상 심한 동상에 걸릴 정도였다.

비록 후퇴작전이었지만 미 해병 1사단은 스미스 사단장이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이라는 의지를 가지고 과감한 돌파 작전을 전개, 함흥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함흥 진출이 2주일이나 지연돼 동북지방으로 진격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흥남으로 철수해 집결하는 시간을 얻어 흥남철수작전도 가능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으면 대규모 병력이 포로가 되고 전세에도 큰 영향을 줬을 것이다.

중공군 9병단은 이때의 피해로 3차 공세에 참가하지 못했다. 후속 병력 부족으로 전선을 확대하지 못하고 수원 일대에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의 기틀을 잡고 다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내용을 자신의 참전 경험을 살려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특히 공산 치하에 살던 민간인들이 장진호에서 어떻게 유엔군을 대했는지 또 흥남에서 남쪽으로 철수하던 과정은 어떠했는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뜻을 나타냈다. 나아가 한민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6·25가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고찰하는 데까지 이른다. 2차 세계대전 후 미·소 양대 세력이 충돌해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를 통해 오늘날 아직도 휴전 상태인 한반도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교훈으로 삼고 싶다고 말한다.

저자는 서울에서 시작해 낙동강 전선, 미 해병대 배속, 인천 상륙, 서울 수복, 중공군 참전, 장진호 전투, 휴전 제안 등 6·25 전황에 따라 이동하며 겪은 일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중요하고 힘들었던 장진호 전투를 생각해 책의 이름도 <아, 장진호!>로 정한 것이다.#

강시영 편집국장 ksiyeong@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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