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총연맹 뭐하는 조직인가
자유총연맹 뭐하는 조직인가
  • 미래한국
  • 승인 2010.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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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이승만·장개석 합의로 反共단체로 출발한 우파운동 맏형
▲ 좌파세력에 의해 주도된 2008년 6월 촛불집회 광경. 10년 좌파정권의 뿌리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느끼게 해주는 모습이었다. 이 10년간 자유총연맹도 정체성의 큰 혼란을 겪었다.

 

“본 총연맹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항구적으로 옹호·발전시키고 이와 관련된 민간단체들에 대한 협조와 세계 각국과의 유대를 다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단법인 한국자유총연맹(이하 자유총연맹) 정관에 명시된 이 단체의 공식 목적이다. 자유총연맹은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창설된 반공성향 단체로, 지난 수십년간 가장 큰 규모의 우파단체로 존재해 왔다. 현존하는 우파단체들 중에서 역사가 가장 깊을 뿐 아니라 회원수, 부대사업, 조직력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최근 일부 우파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자유총연맹이 제 역할을 다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김대중-노무현 좌파정권 10년을 거치면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등 활동이 위축됐을 뿐 아니라, 2008년 정권교체 이후에도 반공-우파 단체로서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돌출되고 있다.


대한민국 반공운동의 맏형, 자유총연맹

김대중 정부가 북한 독재자 김정일과 체결한 6·15 공동선언에 대해서도 한국자유총연맹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6·15 선언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명시했는데, 이는 북한의 대남적화 노선인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일부분 수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자유총연맹은 6·15 선언의 위헌성과 관련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전국 65만명 회원 조직 촛불앞에서 무력화, 무관한 수익사업에 치중 비리 의혹도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500여만표 차이로 당선되고 좌파정권이 종식됐음에도 자유총연맹은 과거와 같은 반공·우파단체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자유총연맹은 이승만 전 대통령과 장개석 대만 총통이 함께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해 만든 반공성향 이념단체로, 대한민국 반공-우파 운동의 맏형과도 같은 존재다. 양국 정상은 1949년 8월 8일 정상회담에서 반(反)공산주의 태평양 동맹 결성을 당시 퀴리노 필리핀 대통령에게 제의했다.

6·25를 겪은 이후로 ‘반공’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기에 이르렀고, 1954년 6월 15일에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이 창립됐는데 이것이 현재 자유총연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 1956년 5월 30일에는 한국아시아민족반공연맹이 설립됐고, 1959년 6월 1일에는 제5차 아시아민족반공연맹 총회가 서울에서 개최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혁명 이후 자유총연맹은 또 한번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1963년 12월 5일 ‘한국반공연맹법’이 제정되면서 이 단체를 국가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보다 체계적인 틀이 갖춰졌고 1964년에는 한국반공연맹이 설립됐으며 시·도 지부도 설치됐다.

1966년에는 제12차 아시아민족반공연맹 총회가 다시 서울에서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한국의 주도로 세계반공연맹(WACL) 헌장 제정 및 WACL 창설이 결정됐다. 이어 1967년에는 대만(당시 중화민국)에서 제1차 세계반공연맹 총회가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자유총연맹’이라는 호칭이 확정된 것은 1980년대다. 민주화 이후인 1989년 2월에 한국자유총연맹 설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창립총회가 열렸다. 이어 사단법인 설립 허가를 받았고, 그해 3월에는 ‘한국자유총연맹 육성에 관한 법률’이 공포된 후 4월에 한국자유총연맹이 공식 창립됐다.


좌파정권 출범 이후 정체성 혼란

그러나 1997년 12월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되고, 대한민국 건국 사상 최초로 좌파정권이 시작되면서 자유총연맹은 시련을 맞이했다. 자유총연맹의 기존 조력자였던 반공·우파성향 국민들과 김대중·노무현 좌파정권 사이에서 애매모호한 스탠스를 유지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김대중 정권 말기였던 2001년 취임한 권정달 전 총재는 당시 인사말에서 “화해와 공존이라는 세기사적 흐름에 동참하여 대북지원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중략) ‘개혁적 보수’를 지향하고 있는 연맹은 북한 정권과 주민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극좌를 반대하는 것과 같이 극우도 반대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 발언은 정통우파 인사들 사이에서 큰 논란이 됐다. 2001년에도, 현재도 대한민국에 극우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자유통일을 희망하며 ‘정통 우파’ 세력과 폭력 등의 과격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자유시장경제를 무너뜨리고 북한식 연방제 통일을 이룩하고자 하는 한총련, 민주노총 등의 ‘극좌세력’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당시 자유총연맹은 있지도 않은 ‘극우’를 언급하며 ‘극좌’와 함께 양비론적 비판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권정달 총재는 친북좌파 성향 인사들과 함께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반공·자유주의 수호단체로서의 모습은 아니었다.

지난 2009년 8월 15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자유총연맹은 “김대중 전 대통령님이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남북화해를 위해 헌신하신 것을 높이 평가하며 재임기간 중 외환위기를 극복함으로써 경제회생과 대한민국의 선진화의 기틀을 마련하신 데 대해 경의를 표한다”며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유지가 국민통합과 민족통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원하며 진심어린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이는 고인의 위헌성 짙은 6·15 선언과 굴종적인 대북정책 등 실정까지도 ‘남북화해’라는 단어를 앞세워 미화한 것으로 풀이될 여지가 있다. 당시 자유총연맹은 국가적인 추모기간임을 감안해 창립 55주년 기념행사도 연기했다.

2008년 여름 촛불사태 때도 자유총연맹은 촛불 좌파세력에 적극적으로 맞서지 않았다. 전국 65만 명의 회원과 시·도 지부를 가진 자유총연맹이 광우병 관련 유언비어와 좌익 폭력시위에 대해 적극 반발하고 대규모 맞불 시위를 다수 개최하는 등 체계적으로 반격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스팔트 우파’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 중 하나다. 지난 10년간 자유총연맹의 어깨를 짓누르던 좌파정권은 종식됐지만, 아시아와 전세계를 무대로 한 선도적인 반공운동에 헌신하던 과거의 명성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총연맹은 수익사업 및 반공·안보운동과는 거리가 있는 사업에 너무 치중한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현재 자유총연맹은 ‘(주)한전산업개발’의 최대 주주다. 그간 자유총연맹의 수익이 자회사인 한전산업개발과 그 산하 몇 개의 자회사로부터 나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권정달 전 자유총연맹 총재는 비리 의혹에 연루되기도 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이규진 부장판사)는 지난해 12월 30일 거액의 공금을 빼돌리고 회사에 손해를 끼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로 기소된 권정달 전 자유총연맹 총재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민영화를 반대하는 한전산업개발 노조위원장에게 2억 원을 주고 이를 연맹자금으로 채운 것은 배임의 고의가 있고 수익이나 자산이 미미한 K사에 거액을 대여해 6억3,000만 원의 손해를 끼친 점도 인정된다”고 밝혔다.

권 전 총재는 자유총연맹 총재로 재직하던 2006년 8월 연맹 형편이 어려운데도 국회의원 시절 자신을 보좌한 A씨가 운영하던 K사에 8억여 원을 대여하고 연맹 사업을 위해 빌린 10억 원을 개인적으로 사용한 혐의, 한전산업 노조위원장에게 2억 원을 제공한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바 있다.

아직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기에 권 전 총재의 유죄 여부를 확언할 수는 없지만 이 사건이 자유총연맹 뿐 아니라 보수우파 전체의 도덕성에도 치명타를 가했다는 사실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정권교체 이후에도 변화 미흡, 희망의 조짐도

박창달 자유총연맹 신임 총재도 이 부분을 아쉬워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취임한 박 신임 총재는 언론 인터뷰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정부의 지원은 전무했고, 과거 정권은 연맹을 해산 직전까지 몰고 갔다”며 “그래서 연맹이 독자 생존할 수밖에 없는 과정에서 전직 총재의 비리로 인한 구속 사건까지 일어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박 총재는 “과거에는 연맹의 총재가 한전산업개발의 대표이사직을 맡는 것이 당연시됐지만 나는 한전산업개발의 대표직을 맡지 않고 다른 적임자에게 맡겼다”며 “영업력을 통해 자유총연맹의 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제도화해 놓은 것”이라고 밝혔다.

박창달 총재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지난해 취임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좌파정권 시절 자유총연맹이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앞으로 우리 자유총연맹 회원들의 사기 진작과 대국민 이미지 변화, 그리고 연맹의 활성화 등을 적극 추진하여 시대정신에 맞게 달라진 자유총연맹을 만들어 나가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박 총재는 자유총연맹 홈페이지 인사말을 통해 “기존의 연맹이 가진 이미지를 탈피해 젊고 참신하며 역동적인 조직으로 변화시키고, 인사와 조직 운영의 투명성을 높여 보수단체와 관변단체 중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가장 모범적이고 역동적인 단체가 되도록 만들 것”이라는 포부도 밝힌 상태다.

몇 가지 희망적인 징후도 보인다. 자유총연맹은 지난해 3월 천안함 폭침 이후 대북 규탄에 적극 나섰으며, 지난 6월 참여연대의 유엔 안보리 서신 파문 직후에는 타 우파단체들과 함께 참여연대의 이적행위를 강하게 규탄했다. 또한 시진핑 중국 국가 부주석이 최근 공식 석상에서 ‘6·25 전쟁은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미화한 데 대해서도 즉각 성명을 내고 “시진핑 부주석의 발언은 1950년 냉전체제 하에서 북한 김일성이 동족을 상대로 자행한 반민족적 남침전쟁의 진실을 호도하는 명백한 역사왜곡”이라고 비판했다.

▲ 최근 자유총연맹이 주최한 2010 자유수호희생자 합동위령제

2008년 ‘촛불사태’에 대한 강한 비판도 최근 눈에 띄었다. 자유총연맹은 지난 5월 “당시 촛불시위와 유언비어 확산 등으로 온 국민을 혼란과 공포로 몰고 간 데 대한 사죄와 책임은 커녕 여전히 전 방위적인 국론분열을 멈추지 않는 세력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한다”며 2년 전 좌파세력이 주도했던 촛불시위를 성토했다.

최근 10여년간 자유총연맹의 행적을 돌이켜 보면 연맹의 정체성을 뒤흔든 가장 큰 사건은 김대중·노무현 좌파정권의 집권이었다. 그렇다면 관건은 오는 2012년 대선에서 만약 좌파가 다시 집권할 경우 자유총연맹이 보수우파 단체로서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인지 여부다.

이에 대해 자유총연맹 관계자는 <미래한국>과의 전화인터뷰에서 “자유총연맹이 과거 권정달 총재 시절과는 달리 사업 영역도 다각화됐고, 다양한 활동을 하는 국민운동 단체로 거듭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차기 정권의 향방과 무관하게 보수우파 단체로서의 정체성을 지켜 나갈 수 있으리라고 본다”고 밝혔다.

자유총연맹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이후로 친북좌파세력보다도 ‘아군’인 우파세력으로부터 더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자유총연맹에 대한 우파진영의 비판은 이 단체가 원래의 소임을 다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애정과 관심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북한 급변사태 가능성과 맞물려 북한과 국내 친북좌파 세력의 대남공세가 정점에 달한 지금, 상당수 국민들은 자유총연맹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자유통일에 앞장서는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김주년 객원기자 anubis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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