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차기주석 시진핑의 정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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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0.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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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PHP 연구소 발행 Voice 12월호
▲ 중국의 반일 시위 장면



미야자키 마사히로(宮崎正弘) 평론가

중국공산당 제17기 중앙위 제5회 전체회의(5중전회)는 10월 18일 폐막됐지만 이 중요한 이벤트에 맞장구 치듯 16일 成都, 西安, 鄭州 다음날부터는 綿陽, 武漢, 德陽 등에서 과격한 반일 시위가 일어났다. 공안과 군 일부가 상해파와 짜고 한 것이라는 연출설이 강한 반일 시위였다.


중국의 고르바초프?

5중전회는 대파란이 예측됐었지만 정작 뚜껑을 여니 제12차 5개년 계획의 기본계획은 원안대로 통과됐고 또 앞으로 5년간의 경제, 사회, 민생 발전 방침도 무난히 가결됐다. 정치개혁에 관한 것은 원자바오 총리의 연설 뿐이었다.

가장 주목됐던 권력 투쟁에 있어서는 후진타오 등 주류파의 계획이 차질을 빚어 강력한 후계자 후보인 리커창 부총리의 약진은 이뤄지지 않았고 역으로 태자당(고급 간부들의 자제들)의 시진핑이 상해파의 강한 뒷받침을 받아 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됐다.

앞으로의 정국 운영을 예측한다면 후진타오파 대 상해파라는 권력 투쟁의 구도 균형에 큰 변화가 생겼다. 어느 편도 아니었던 태자당을 상해파가 끌어당겨 지금까지의 3파 정립에서 상해파와 태자당 연립의 흐름으로 변할 것도 같다.

후진타오 정권은 화해사회(和諧社會)를 지향해 소득의 균등화, 안정된 사회를 목표로 했다. 상해파와 태자당은 이러한 개혁 노선에 내심으로 반대하고 이권 구도를 활용해 부유층을 늘리고 공산당원이 특권을 유지하려 한다.

반일교육을 추진하고 내부 갈등을 일본으로 돌려 정권을 유지했던 장쩌민의 뒤를 이은 후진타오 정권은 독자적 색깔을 낸다고 ‘친민노선(親民路線)’이라는 포퓰리즘에 호소했다. 이를 통해 마오쩌뚱 사상으로 회귀를 내세우는 강기숙정(綱紀肅正), 오직추방(汚職追放)을 외쳤다. 형식적이지만 마오쩌뚱은 “성심 성의 인민에 봉사하라”고 강조했다.

후진타오가 정치개혁을 강조했지만 이를 주장하면 할수록 부를 추구하는 상해파가 반발하고 오직(汚職) 구조를 청산하려는 정책에 특권에 매달리는 태자당도 상해파에 편승해 반발해 왔다. 이 때문에 권력 중추는 각 파벌이 뒤섞여 어긋나기만 했다. 후진타오와 콤비인 원자바오 총리는 재해가 나면 즉시 피해 장소로 날아가곤 해 서민들로부터 인기는 높지만 당내 평가는 낮다. ‘원자바오는 영제(影帝· 허수아비 임금)’라고 불린다.

시진핑의 군사위원회 부주석 결정은 정치 투쟁면에서 보면 상해파의 승리로 끝난 것이고 후진타오 지도부는 레임덕으로 접어들 우려가 있다.

시진핑은 2년 후인 제18회 공산당대회에서 당총서기, 군사위 주석이 되고 3년 후 전인대에서는 국가 주석이 될 것으로 예측된다. 즉 3권 독점이 사정권에 들어온 셈이다. ‘새로운 황제’(이코노미스트 10/23)의 탄생이 일정에 올랐다는 것이다.

일본 언론의 평판과는 반대로 세계의 중국 관측통들의 평가는 좋지 않다. 홍콩의 링고일보(10/21)는 시진핑의 군사위원회 부주석 결정은 ‘다크호스가 왕권을 손에 쥐었지만 그는 고급간부 일족인 태자당 소속이며 특권계급의 권리를 옹호하고 독재체제 유지에 급급한 패거리가 지지 기반인 한 대개혁을 하지 못한다’고 냉담하게 분석한다.

시진핑이 개혁파, 개명파로 알려진 시중쉰의 아들이라는 것만을 이유로 정치개혁에 큰 힘을 휘둘러 ‘중국의 고르바초프’가 될지 모른다는 기대는 결국 사라질 것이다.


시진평, 군으로부터 호응 받아

5중전회 직전까지 중국 전문가 대부분은 국민이 혐오하는 상해파의 영향력을 깎아내리기 위해 후진타오는 시진핑의 군사위 부주석 취임을 1년 더 연기해 리커창과의 경쟁을 조정해가면서 정권 유지를 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5중전회 직전 노벨평화상이 민주활동가인 류샤오보로 결정된 것도 국민들이 상해파, 태자당에 반감과 원한을 폭발하는 절호의 기회가 됐다. 당은 언론매체를 통제하고 노벨평화상에 불쾌함을 표시했는데 민중은 인터넷이나 트위터를 통해 만세를 불렀다.

센카쿠제도 근해에서 일중간의 충돌을 기화로 장쩌민파(상해파)가 반일을 정치적 지렛대로 활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도중에 후진타오파가 기대했던 것에 차질이 생겼다. 중화사상이라는 마약은 대중을 자극하게 돼 있다.

반일 폭동을 배후에서 원격 조종한 것은 장쩌민 그룹이다. 여기서 상기할 것은 베이징 올림픽과 2009년 국경절에 후진타오와 나란히 단상에 섰던 장쩌민은 “군을 장악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라고 무의식 중에 화면을 통해 외쳤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아무 직책도 없었는데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일본의 일부가 기대하고 있었던 리커창은 난세 지도자로서는 선이 가늘고 사무관 출신이다. 아수라장 권력 투쟁의 화력에 힘을 소진해 차기 총리 자리조차 위태로워진 것 같다.

리커창과 굵은 줄이 닿아 있었던 오자와 이치로의 정치력도 일본에서는 침몰 직전이다.(리커창은 오자와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한 적이 있다.) 총리 후보로 ?岐山 부총리 등의 이름이 벌써부터 나돌고 있다. G20 회의 귀로에 가이트너 미 재무장관은 일부러 靑島에 들러 ?岐山과 밀담을 하는 형편이다.

그런데 차기 황제 시진핑은 어떤 성격의 인물일까. 일본 언론은 ‘협조적’ ‘온화’ 등의 말로 칭찬하고 있지만 과연 그런가. 당연히 미소 짓는 얼굴로 비취겠지만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시진핑의 아버지는 부총리를 했던 혁명원로의 하나인 시중쉰이지만 팽덕회 장군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마오쩌뚱에게 견제를 당해 실각했다.

실로 16년을 실의 속에 살아야 했다. 소년기와 청년기에 곤궁과 절망의 나날을 살았던 시진핑에게는 일종의 허무주의가 감돌고 있다. 늦게서야 칭화대학을 졸업하고 인민해방군 비서장으로 3년 동안 근무했다. 이때 인맥을 늘리기는 했지만 괄목할 만한 것이 못됐다. 무명이었다. 그러나 장신에다 침착함이 있고 일처리도 잘해 푸젠성 성장에서 저장성 서기로 대출세(성장은 서기보다 2단계 하급)했고 급작스럽게 상해 서기로 발탁된 것도 배후에 장쩌민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상해로 영전한 이유는 후진타오가 상해 서기였던 陳良宇가 악질 개발주도자와 짜고 난개발 등의 스캔들을 일으킨 것을 수사하게 해서 체포 기소했기 때문이다. 陳良宇 실각에 따라 상해 커넥션과는 관련이 없는 인물을 선정할 필요성이 있었다. 상해 남쪽 저장성 서기로 두각을 나타낸 시진핑이 장쩌민의 오른팔 쩡칭홍의 눈에 들었다.

당시 쩡칭홍은 국가 부주석으로서 일본에도 몇 차례 방문한 지일파, 모략가 그리고 니힐리스트이다. 아들을 호주에 유학시키고 있다. 그후 시진핑은 장쩌민-쩡칭홍 라인의 강한 연줄로 상해 서기로부터 단번에 중앙으로 2단계 특진, 정치국 상무위원이 됐다. 거듭된 대약진이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이렇다할 지도력이 없고 관료적 보스 체질이 강하다. 장쩌민의 미니체어라고 쑥덕거린다. 그렇지만 시진핑에게는 젊은 시절의 군 경력이 있고 부인인 펑리위안이 군 간부(소장 계급의 전속가수)이기 때문에 군의 수용도는 매우 좋다.


중국인으로서 反日은 오락(娛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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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의 주석 코스를 탄 시진핑은 권위를 더하기 위해 외유가 잦다. 가장 먼저 간 곳은 북한이다. 일본을 방문했을 때 억지를 부려 천황을 만난 것은 다 아는 바와 같다. 그가 2년 후에 당의 총서기와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고 2013년 3월 전인대에서 국가 주석과 국가군사위원회 주석도 되면 완전히 통수권을 확보하게 된다. 중국은 한층 더 군사노선을 강화하고 군의 지지가 강한 정권이 되기 위해 군사적 모험에 나설 위험성도 현 정권보다 높아진다.

센카쿠 충돌 직후와 노벨평화상 소동 직후 왜 과격한 반일 시위가 일어났는가?

본래 중국에서의 반일 시위는 관제 시위 즉 시켜서 하는 것이다.

첫째, 반일 시위가 특정 지역에서만 일어났다. 북경, 광주는 말할 것도 없고 ?連, 瀋陽, 靑島, 重慶 등 일본 영사관 소재지에서의 움직임도 전무했다.

둘째, 이상한 경비다. 2005년 반일 폭동 때 경비대는 제스처로 출동했는데 일본대사관에 대한 투석도 묵인하고 성실하게 경비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겨우 수천명의 시위에 출동했다. 폭동 다음날부터 수백 명의 경비대가 일본 기업 주변을 엄중히 경계했다. 분명히 반일이 반정부 폭동으로 될 것을 우려한 조치이다.

셋째, 센카쿠 충돌 자체가 미리 짜인 모략이라고 미국 정보 당국이나 외무성에서는 보고 있다. 트롤 어선 선장이나 선원은 석방 귀국 후에는 관영 언론만 간단한 취재를 할 수 있게 해 일반인들의 접촉이 금지됐다.

하물며 이에 영향을 받은 成都, 鄭州, 西安, 綿陽의 연속적 반일 폭동을 단순한 반일로만 보는 것은 위험하다. 민중이 갖고 있는 불만의 김빼기가 주목적이고 이면에는 상해파에 의한 권력 투쟁이고 후진타오에 대해 심술 부리는 행동이다.

처음에는 ‘센카쿠는 중국령이다’ ‘선장의 즉시 무조건적 석방’을 요구하는 반일 시위였다. 공안의 지시대로 참가자들은 움직였고 외국 언론만이 보도했다. 노벨평화상 소동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당내 좌파와 상해파가 궁지를 탈출하려고 연극을 하는 것이다. 마오쩌뚱은 말하지 않았는가. “국내 문제를 대외 문제로 전화(轉化)시켜라”고.젊은이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 당과 중국 언론이 노벨상을 평가하지 않는다는 모순을 알아차리고 무엇인가 화풀이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터넷에 집합 장소와 행진로까지 제시됐는데 여느 때라면 당국이 금방 삭제했을 텐데 西岸, 成都, 鄭州에서는 시위를 한다는 소식을 지우지 않았다.

10월 16일 成都에서 일본의 공기업인 이토요오카당과 아세탄을 습격한 시위대의 플래카드에 심한 내용이 있었다.

하나는 ‘沖繩(오키나와) 해방, 琉球 탈환’이라는 중화사상의 노골적 침략성이 쓰인 플래카드이다. ‘收回琉球 解放沖繩(오키나와)’ 이는 신화사계 환구시보가 대변한 말이다.

‘오키나와 독립 지지’의 논조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옷자락 속에서 내비치는 갑옷을 볼 수 있는 말이다. 같은 신문의 ‘오키나와 독립운동을 일본 정부가 억압하고 있다. 오키나와 인민은 독립을 지향하고 있다’는 주장은 장래에 대한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내부갈등 해결 위해 反日 부추겨

또 하나는 ‘日貨불매, 중국제품을 사자’는 현수말 주변에는 ‘索尼, 松下, 豊田’이라고 분명 일본기업을 지칭한 플래카드가 있었다는 점이다. 중국 경제 발전에 기여했던 일본 기업이 이번에는 습격 목표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런 간판을 걸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중국인이 경영하는 대리점들이 습격을 당했다. 바로 이는 정치에 대한 불만과 노벨상 소동의 김빼기 작전이다. 민주화, 자유, 인권, 법치를 요구하는 중국 젊은이들의 불만, 발산 장소를 인위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일중관계를 ‘우호에서 대립으로’ 몰아가고 센카쿠 카드에 반일 시위를 겹쳐 후진타오·원자바오 집행부를 때리려는 상해파 음모의 그림자가 짙다. 시위대의 플래카드를 보면 통일된 용어만 쓰인 것에 주목해야 한다. 모두 공안이 준비한 것들이다.

위안화 부정 조작에 진노하는 미국, 노벨상 문제에 때맞춰 부상한 인권문제로 서구의 중국에 대한 불신이 증대해 있다. 여기서 중국으로서는 한때 성공한 적이 있던 반일 카드를 다시 한번 사용해 위기를 면하려 했다. 노벨평화상을 범죄자에게 수여하는 것이 노벨상을 모독한다고 외쳐봤자 설득력이 없다. 의화단 사건처럼 내쇼널리즘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일어난 탄광 사고의 책임을 덮기 위해 일본을 이용하는 것이다. (칠레의 기적적인 광부 33명 전원의 생환에 비해 중국 광산 사고는 매년 수천명의 희생자를 내고 있다.)

일찍이 미국 언론이 쓴 적이 있다 ‘중국인에게 있어 반일은 오락이다’라고.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교수는 중국의 희토류 금수 조치에 대한 기고에서 이는 WTO 위반이며 국제사회가 합의한 룰을 지키지 않고 위안화를 부정한 수단으로 저가 조작하는 중국은 ‘불량배 경제 대국’이라고 몰아세웠다.

인기 작가 韓寒이 냉정하게 말했다. ‘반일은 매스게임’이라고. 이 인터넷상의 댓글은 당국에 의해 즉시 삭제됐다. 韓寒은 중국의 젊은 인기작가로서 카리스마적 존재이다. 젊은이의 심리, 현대 중국의 풍속을 묘사해 시사주간지 타임은 세계를 움직이는 100명 중 한 사람으로 그를 선정한 일이 있다.

반일 시위는 중요한 무언가를 감출 목적이 담겨 있다. 10월 17일 반일 시위가 四川省의 綿陽으로 비화됐다. 경비 차량이 뒤집히고 운행하던 일본차가 습격받고 소니, 파나소닉 간판이 달린 상점, 일본식당 등이 습격당했다. 반일이라는 이름을 빌린 반정부 폭동이었다.

綿陽은 2008년 5월의 四川省 대지진 때 가장 피해가 컸던 지역의 하나이다. 토사로 인해 하천 흐름이 바뀌고 갑자기 호수가 생기기도 했다.

무엇보다 綿陽(23일 데모가 있었던 이웃 거리인 德陽도)에는 핵물리학센터가 있고 부근에는 핵무기·미사일 개발 비밀 시설이 있어 군사기술로부터 파생되는 엔지니어 확보가 쉬우며 근래에는 전자부품 등의 공장 진출도 눈에 띌 정도이다. 재난 후 복구가 늦어져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이다. 무엇이든지 좋으니 난동 부릴 계기가 필요했다. 기름이 뿌려진 곳에 불이 던져진 꼴이 됐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진핑 정권이 탄생되더라도 반일 색채가 강해질 가능성이 높다.#


번역·이영훈 객원해설위원·교포교육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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