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에 묻혀 왜곡되는 국가 정책
구호에 묻혀 왜곡되는 국가 정책
  • 미래한국
  • 승인 2011.0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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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래교수의 세설직론]김정래 편집위원·부산교대 교수(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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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태가 여전히 사실의 호도(糊塗), 본말전도(本末顚倒), 부당추론에 의해 적지 않게 혼란스럽습니다. 일례로 얼마 전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복지는 ‘돈보다는 사회적 관심’이라는 정치적 수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내세운 복지플랜이 결코 국가재정 증대와는 무관한 듯한 발언을 한 바 있습니다. 아무리 정치가 언어의 마법에 의존한다고 하지만, 이는 국민들에게 사실을 호도하는 단초를 제공해 줍니다. 또 무상급식은 전체가 아닌 저소득층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여당 일각의 주장도 핵심적인 논점을 크게 빗나가고 있습니다. ‘무상’은 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는 부당추론에 따른 사실호도, 본말전도의 몇 가지 경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무상’이라는 명목으로 생산 수단 국유화

먼저 세간의 관심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보편적 복지’는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에 이르는 이른바 3종 세트로 구체화됩니다.


‘무상’이 붙은 복지정책의 폐해로 보편성(universality)의 부당 치환, 행정적 비효율성, 담세 증가, 국가재정 파탄 등을 이미 여러 차례 거론했으므로 여기서는 일반인들의 판단을 호도하는 논점만을 지적하겠습니다. 전원 무상급식의 폐해를 은폐하고자 ‘의무급식’이라는 말을 만들어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무급식의 논거가 무상의무교육의 정당성과 같다고 호도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기본적 무상의무교육의 논거는 전면적 무상급식의 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무상의무교육이 정치노선의 좌우 논리를 떠나 보편적 권리로서 정당화되는 것은 그것이 외부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면 무상급식의 경우에 그러한 외부효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외부효과와는 정반대로 비효율성만 제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식자들이 전면적 무상급식을 보편적 복지로 포장하는 또 다른 근거로 낙인효과(stigma effect)를 들고 있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낙인효과란 학교에서 급식을 무상과 유상으로 할 경우 무상급식을 받는 저소득층 아이들이 받을 수 있는 심리적 상처 또는 차별화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복지이론에서 거론되는 진정한 의미의 낙인효과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교직의 전문성이라는 논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교직이 전문직이라면 학교급식을 관리하는 교사는 가정 배경에 관계없이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대해야 합니다. 마치 전문직인 의사가 같은 질환을 놓고 환자의 경제적 사정에 따라 처방을 달리하는 것이 그릇된 것과 마찬가지로, 교사도 학교급식 문제에 있어서 이러한 낙인효과를 주장하는 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낙인효과를 핑계로 아이들의 차별화를 운운하는 것은 교사 스스로가 전문직임을 부정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증세-감세 논쟁으로 인식되는 보편적 복지의 이면에 매우 중요한 논점이 간과돼 있습니다. 복지는 생존적 필요(substantial needs)의 충족에서 연유합니다. 급식, 의료 등 생존에 필요한 재화(necessities)는 본래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행사 측면에서 정당화됩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급과 충족이 보편적 복지라는 미명 아래 국가가 독점하는 사태를 야기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생존에 필요한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보편적 복지라는 명분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생산수단의 국유화 문제는 국체(國體)와 헌법적 가치를 토대로 면밀하게 검증할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세태는 여야를 불문하고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조장하거나 방조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사회주의 국가나 전체주의 국가로 전락해도 좋은지 묻고 싶습니다.


평준화 명목으로 불평등 조장

부당추론의 또 다른 예는 이른바 ‘평준화’ 정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은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을 조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준화’라는 명칭 때문에 평준화 정책이 평등 실현의 핵심이라고 쉽게 예단합니다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이미 평준화 정책이 교육 만악(萬?)의 근원임을 졸저 ‘고혹평준화해부’(2009, 한국경제연구원)에서 밝히면서 그 근거로 평준화의 폐해를 조목조목 상세하게 분석한 바 있어 다시 상론하진 않겠습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서울대에 입학한 서울 8학군(강남, 서초) 소재 고교 졸업생의 1학군(동대문, 중랑) 소재 고교 졸업생보다 12배 이상 많습니다. 근거리 강제 배정을 원칙으로 하는 평준화 정책은 부모가 어느 지역에 거주하는가에 따라 아이들의 학력과 진로를 결정하는 불평등 조장의 원인입니다. 평준화로 인해 야기된 이 문제는 학력 신장과 명문대 진학을 위해 좋은 학군으로 이사가야만 해결됩니다. 그러나 저소득층과 중산층에게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컨대, 제가 현재 거주하는 중랑구 신내동 소재 38평 아파트의 매매가가 제가 한때 근무했던 한국교육개발원 옆에 위치한 서초구 우면동의 같은 회사의 같은 형평 아파트의 전세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평준화 정책이 야기하는 이러한 폐해는 강남의 부동산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게 하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평준화 정책의 명분 중의 하나가 중학교 교육 정상화입니다. 중학교 교육 정상화. 평준화 정책 덕분에 중학교 아이들이 학원이나 과외교습 등 사교육을 받지 않게 됐다고 하면 속된 말로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입니다. 또 다른 명분인 고등학교의 ‘평준’은 애초에 달성할 수 없는 사회주의적인 발상입니다. 고등학교의 시설, 재정, 교사, 학생의 ‘평준’을 도모한다는 것입니다. ‘평준(平準)’이라는 합성어를 낳은 ‘평형(平衡)’과 ‘기준(基準)’의 의미가 ‘니르바나완성(nirvana approach)’처럼 사회주의적인 국가 독점을 전제하는 개념입니다. 국가 독점과 함께 단위학교의 자율성 말살을 전제하고 들어가는 말입니다. 국가 독점으로 성공한 정책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면에 깔린 이러한 진실을 외면하고 평준화 정책이 평등을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실을 호도하고 왜곡하는 것입니다.


평준화 정책은 학교선택권 배제 자유권 침해하는 것

무엇보다도 심각한 평준화 정책의 문제점은 선택권의 박탈에 있습니다. 평준화로 학생과 학부모는 학교선택권을 원천적으로 박탈당하고 있으며, 단위학교는 학생선발권을 봉쇄당하고 있습니다. 선택의 박탈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헌법정신에도 배치(背馳)됩니다. ‘자유’의 의미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 핵심은 ‘선택’에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즉 선택권이 배제되면 자유가 박탈된 것입니다. 자유가 박탈된 존재는 노예입니다. 평준화 정책을 노예제에 비유하는 소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실은 평준화 폐지가 아니라 늘 평준화 정책의 ‘보완’에만 집중돼 있습니다. 노예제를 보완한다는 말이 성립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평준화 보완책 운운하는 것은 노예제를 폐지하지 않고 노예의 근무 여건(?)을 개선해 준다는 격입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평준화 정책의 논의는 여야, 좌우 노선에 관계없이 ‘평준화 보완’처럼 호도되고 있습니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평준화 정책이 보완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실현돼야 할 정책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입니다. 경기도 교육감이 의정부, 안산 등 몇몇 도시를 평준화 적용대상지역으로 일방적으로 지정하자 찬반 여론의 틈바구니에서 교과부는 절차적인 문제를 빌미로 평준화 확대시기를 1년 정도 연기하는 정도의 성과(?)를 낸 것으로 좌파 교육감과 기(氣)싸움 하는 대결양상입니다. 말로는 항상 ‘교육백년대계’ 운운하면서도 결과적으로 평준화가 폐지돼야 할 교육만악의 근원임을 망각하고 좌파 포퓰리즘에 끌려 다니는 형국입니다.

국가백년대계를 호도하는 또 다른 아젠더는 ‘지방분권’ 또는 ‘균형발전’입니다. 이 역시 그릇된 평등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작년까지 시끄러웠던 세종시 문제에 이어 이번에는 과학비즈니스벨트 입지 선정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며칠 전 대통령의 신년 좌담회에서 공약과 달리 원점에서 재검토한다고 해서 다시 야권과 충청권 민심이 술렁이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세종시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릅니다. 세종시 문제는 그 자체가 정치적인 고려대상이지만, 과학비즈니스벨트 선정은 과학기술 경쟁력 제고를 1차적으로 고려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 문제 역시 본래 취지와는 달리 아예 과학벨트를 분할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어 누더기로 전락할 가능성이 짙습니다.

지방분권의 그릇된 명분은 모든 것을 쪼개어 나누어 갖는다는 것이 최고라는 그릇된 평등사상에 기인합니다. 또 ‘분할’을 최고 덕목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이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국가발전 전략에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지방분권, 균형발전의 명분이 그릇된 평등 정서와 맞물리게 되면 사태의 본질이나 경쟁력 제고라는 정책의 본래 취지와는 상관없이 수도권은 무조건 배제됩니다. 경쟁력을 갖춘 지역의 역차별이 우려됩니다. 지방자치나 분권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과도한 민주주의 이념이 빚은 지방분권, 균형발전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국가적 재앙을 몰고 올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해당 지역의 발전도 저해합니다. 다가올 총선과 대선에서 충청권이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다고 해서 이 문제를 충청권 유치 여부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정책 혼선은 자유민주주의 신념 퇴색에서 비롯

이제는 사실호도와 부당추론된 정책 발상이 왜 자주 튀어나오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유는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데 있어서 확고한 이념 부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정부의 1차적인 책무인 국가안보에서부터 국리민복에 이르기까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투철한 신념이 자주 퇴색해 가기 때문입니다. 현 정부의 정책기조가 애당초 일관되게 나간 것이 아니라 갑자기 ‘중도’로 변질돼 사태의 본질을 흐리게 작용했습니다. 이념 없는 중도로는 국가경영의 조타수(操舵手)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보다 큰 문제는 ‘중도’라는 이념 없는 노선으로 혼선을 야기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흔히 ‘큰 틀의 정치’니 화합이니 하면서 내세우는 역지사지(易地急之) 논거가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자칫 혼란을 자초하는 위험한 수사입니다. 공정사회의 전제 또는 개인적 덕목으로서 회자되는 역지사지가 먹히지 않는 상황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외면 또는 묵살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학살을 당한 유태인들에게 나치의 심정을 역지사지하라고 한다면, 같은 맥락에서 천안함 폭침으로 자식 잃은 부모와 연평도 포격을 당한 주민들에게 김정일-김정은 세습 체제를 역지사지의 심정에서 수용하라면 어떨까요.

같은 논거로 저소득층을 배려한다고 하면서 역지사지를 내세우는 것 자체가 우습고 꼴사나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나마 얼마 되지도 않는 안보교육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교육경쟁력에 들어가야 할 예산과 교육시설 개선 재원을 근거도 없는 무상급식에 몽땅 털어 넣는 서울시교육청의 행태가 그것입니다. 공짜로 밥을 먹여준다고 하면서 학력 증진을 위한 제 조치는 묶어놓고 자율학습이나 방과후 수업도 학생인권 차원에서 사실상 못하게 하면, 아이들의 학력 증진을 위해 기댈 곳은 결국 사교육 시장밖에 없지요. 따라서 좌파 교육감의 행보는 저소득층, 중산층 자녀의 학력 신장을 원천적으로 저해하는 해괴한 결과를 자초하는 역주행입니다.

어려서 정치인은 대개 우국지사(憂國之士)라고 배웠습니다만, 내년 총선과 대선, 그리고 임기 내 성과에만 집착하는 요즈음 정치인들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듯합니다. 집권과 당선 여부에만 집착해 국가안보와 국리민복은 뒷전인 듯합니다. 심지어는 대한민국의 근간을 뒤집고 이적(利敵) 행위를 하는 정치인, 아예 ‘민란(民亂)’을 주장하는 이도 보입니다. 정치의 역할과 목적이 정치인의 계산에 따라 본말전도되니까, 정책의 핵심이 호도되고 부당한 치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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