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유럽의 리바이어던들은 국경을 넘어 서로 이질적인 정치, 경제, 문화의 배경을 가진 국가들을 통합해 이상적인 공동체라는‘유럽연합(EU)’으로 진화했다. 슈퍼 리바이어던, EU는 자신만만했다.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생존을 위해 시작된 유럽연합은 소련 붕괴 후 미국의 1극체제에 당당히 도전했고 그 과정에서 유로화 공동체, 즉 유로존(Euro Zone)을 탄생시켰다. 초기 성과는 긍정적이었다.
2008년 미국이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과 함께 금융위기가 왔을 때만해도 유럽의 은행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2009년 1월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독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독일 사회시장 경제는 자유시장과 사회적 보호주의의 사이에서 훌륭한 조화를 이룬 모델이다”고 자평했고 유럽의 경제인과 지식인들은 미국의 탐욕스러운 자본시장 논리를 비웃었다.
그런데 이 리바이어던, 또는 레비아탄이라 불리는 권세와 영광의 존재에 대해서 구약성경은 일찍이 그것을 교만과 질투의 화신이라고 경계했다. 세속적 표현으로 이야기 하자면 자유주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하이에크(1899∼1992)가 말한‘치명적 자만’(Fatal Conciet)의 상징이었던 것. 민경국 강원대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믿음이 하나 있죠. 바로 정부가 이상사회를 설계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그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풍요를 누리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려면 정부가 나서서 경제사회를 계획하고 조종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믿음에서 생겨난 것이 다름 아닌 사회주의였죠.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이것을 ‘치명적 자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전염되는 재정위기
2001년 유로존에 가입한 그리스에는 싼 금리의 유로화가 유입됐고 정부와 가계는 돈을 흥청망청 써대기 시작했다. 임금이 오르고 집값에 거품이 커졌다. 정부 몸집이 커지고 포퓰리즘 복지정책이 난무해 국가부채도 급증했다. 세금으로 모자라니 국채를 남발했고,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로 집값 거품이 꺼지면서 그리스 경제는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된다. 그리스는 경기침체로 세수가 줄어드는데도 방만한 공공부문과 복지혜택을 유지하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재정지출을 더 늘려 재정을 빠르게 악화시켰다.
각국의 정부 차원을 넘어 설계되는 계획과 통제의 새로운 유럽경제공동체의 모델은 결국 그리스와 같은 무임승차(Free Rider)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하이에크가 말한 ‘치명적인 자만’이 가져온 결과였고 성경이 말한 ‘온 몸이 찢겨져 울부짖는’교만한 레비아탄의 최후와 닮아 있다.
‘요원(燎原)의 불길’이란 바로 지금의 유럽경제 위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스로부터 시작된 유럽의 경제위기는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와 벨기에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지난 5일 국제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는 이탈리아의 국가신용등급을 3단계 떨어뜨렸고 프랑스와 벨기에의 합작은행 덱시아는 그리스 국채의 과다보유로 유럽 은행으로는 처음 구제금융 대상에 올랐다.
이탈리아 신용강등 원인은 경제성장 정체와 막대한 부채로 인한 신용경색 우려였다. 이탈리아 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120%에 달하며 올해 경제성장률은 0.7%에 그칠 전망이다. 이탈리아의 디폴트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은 예사롭지 않다. 유럽 내 경제규모 1위 독일과 2위 프랑스에 이어 유로존 3위의 경제대국인 이탈리아가 무너질 경우 전세계 경제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젠스 노르드빅 노무라증권 외환 투자전략가가 “이탈리아는 구제금융을 하기에는 너무 크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스는 인구 1천만 명에 실질 1인당GDP 3만 달러인 반면에 이탈리아는 인구 6천만 명에 실질 1인당 GDP 3만 달러로서 약 6배 경제규모가 크다. 이탈리아의 부채는 1조5980억 유로에 달하고 그 규모는 유로존 재정안정기금(4400억유로)의 3배나 되기 때문에 대처가 더 쉽지 않다.
이탈리아 신용등급 강등소식에 가장 놀란 나라는 다름 아닌 프랑스다. 프랑스는 신용등급이 3단계 떨어진 이탈리아의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전 세계 24개국 은행들이 8673억 달러 규모의 이탈리아 채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중 절반 가량인 3925억 달러가 프랑스 소유분이다. 이미 무디스는 프랑스 2,3위 은행인 소시에테제네랄과 크레디아그리콜에 대해 “재정위기국의 국채 보유 비중이 높다”며 신용등급을 강등한 바 있다. 올해 7월 영국 경제전문지 파이낸셜타임스는 그리스 경제위기가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번지고 있는데 그 다음은 프랑스가 될 수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유로존의 붕괴는 운명?
에벌루션 시큐리티스의 엘리자베스 아프세트 애널리스트는“프랑스는 유로존 위기에 가장 크게 노출된 국가”라고 밝혔고 씨티그룹의 마크 스코필드 글로벌 금리전략부문 대표도“투자자들은 프랑스의 위험자산을 팔기 시작했고 아무도 진입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유럽경제 2위인 프랑스가 경제위기에 안일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BNP파리바의 도미니크 바르벳 이코노미스트는“프랑스 시장에서는 리스크를 피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찾아볼 수 없다”면서“시장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자본이 프랑스보다 안전한 투자처인 독일로 이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도미노처럼 번지는 유럽의 경제위기는 마치 적벽(赤壁)에 묶인 조조의 배들에 불이 붙은 격이다. 유럽 좌파는 화재의 원인을 무디스와 같은 신용평가회사의 화공(火攻)으로 돌리기에 급급하다.독일 경제 일간 한델스블라트는 “신용평가 업계 거인이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을 울렸다”고 썼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는 1998년 유로존(Euro Zone)이라는 단일통화체제가 출범할 때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2001년 그리스가 국민투표로 유로존 가입이 확정됐을 때 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만은‘유럽 단일통화체제는 실패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프리드만은 그 이유로‘이자율이 서로 상이한 체제 내에서 단일통화정책은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유로화는 통합 이후 기세등등하게 발전했고 달러화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나아갔다. 2003년 90세의 프리드만이 다시 한번 유로통화정책에 우려를 나타내며‘나라마다 다른 재정적, 정치적 이질성을 숨기고 있는 유로통화체제(EMU)는 10년 안에 붕괴할 것’이라고 했을 때 유럽 경제학자들은 프리드만이 악담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7년이 지난 지금 프리드만의 예견은 현실이 되고 있다.
마이클 스펜스 뉴욕대 경제학 교수는 후버연구소의 기고문에서‘밀턴 프리드만이 옳았다’며‘유럽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더욱 강력한 정치적 통합으로 나아가든지 아니면 유로통화체제를 해체하는 수 밖에 없다’라고 썼다.
유럽 경제모델의 한계와‘치명적 자만’
그렇다면 유럽공동체(EU)를 통해 미국에 맞서겠다는 유럽인들의 꿈은 또 하나의 유토피아였던 것일까. 지난해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주최로 열린 유로화 위기의 대처방안 세미나에서 밥 퀘스터스 독일 보쿰대 교수는 “1992년 EU 창설 당시 각국이 합의했던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안정 및 성장 협약 (SGP·Sustainability & Growth Pact)’이 종잇조각에 불과한 상황이 왔다”며 “EU가 이들 국가에 대한 추가적인 지원을 통해 부채를 상대국에 전가시키는 기구로 전락해선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SGP는 유럽 각국이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 부채를 60% 이내로 유지하도록 했다.
그러나 2010년 프랑스의 공공부채는 GDP 대비 80% 수준이며 이탈리아는 조약 기준의 두 배가 넘는 120%에 근접한다. 독일 역시 공공부채는 80%대에 달하고 벨기에는 100%가 넘는다. 로버트 먼델 미 콜럼비아대 교수는 부채를 ‘오염(pollution)’으로 간주,유럽 각국이 이 같은 오염(부채)을 줄이기 위한 비용(이자)을 공동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EU의 맹주 독일은 과도한 부채국가를 탈퇴시키는 방안을 선호한다.
문제는 그럴 경우 유럽공동체의 해체를 각오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디폴트라는 최대의 경제위기 파고를 넘어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다. 독일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을 때 그리스에서는 재정축소에 반대하는 시위가 연일 터졌고 이에 독일판 이코노미스트지는 그리스를 가리켜 ’유로 패밀리의 사기꾼들‘이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내보냈다.
유럽연합이 거대 연합 정부를 통해 경제적 번영을 이루겠다는 믿음에는 그들의 사회주의적 정책의 효과를 여전히 신봉하고 있는 점이 작용한다. 유럽의 경제에는 독일의 사회시장경제 모델과 스웨덴의 사민주의 모델이 혼재하고 공통적으로 사회적 분배와 평등을 중요시하며 정부가 사회복지정책을 주도한다. 따라서 사회적 연대(Solidarity)는 중요한 덕목이다.
자본시장도 은행을 중심으로 하는 관치의 성격이 강하고 주식시장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작다. 그러다 보니 기업의 자금조달은 주로 채권에 의존한다. 금리의 변동이 기업의 수익성에 깊은 영향을 주고 이 금리는 다시 국가의 재정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정부의 공공부채가 기업의 성장과 이윤에 직결돼 있다.
미국도 안심할 수 없다
마이클 스펜서 뉴욕대 교수는“유럽이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각국의 공공부채를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유럽 각국의 재정적자가 50%까지 줄어야 경제회복의 모멘텀이 생겨난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이 서로 다른 유럽의 국가들에게 그것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문제는 이미 복지에 익숙한 유럽인들에게 공공부채 축소는 곧 복지의 축소를 뜻하며 그것은 자신들의 행복추구권이 위협에 처한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지난 1일부터 시작된 그리스의 공공부문 파업과 시위는 그러한 양상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 의회는 공공부문 노동자 연금과 임금 삭감을 위한 새 법안을 승인할 계획이다.
이 법안에 의해 적어도 10만 명 이상의 근로자가 해고되거나 퇴직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트로이카(국제통화기금, 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의 구조기금을 받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그리스는 지불해야 할 부채를 갚지 못하고 디폴트된다. 문제는 그리스 정부의 긴축에 반대하는 공공부문 최대 노동조합인 공공노조연맹(ADEDY)과 노동자총연맹(GSEE)이 수도 아테네는 물론 테살로니키시에서 1만여 명이 벌이는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부채감소의 정부 결정을 투표에 부치자는 제안이 내무장관 입에서 나왔다.
이러한 저항과 포퓰리즘이 그리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프랑스로 벨기에로 나아가는 것은 어쩌면 시간 문제일지도 모른다. 한 지붕, 한 가족이라는 유럽의 꿈이 복지와 정부의 계획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는 그들의‘치명적 자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이제 그 치명적 자만에 대해 고백해야 할 또 다른 정부, 미국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5월 오바마 대통령은 호세 사파테로 스페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그리스의 부도위기가 전파되지 않도록 스페인이 강력한 긴축재정을 실행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경제사학자 니알 퍼거슨 교수는“그리스 다음은 미국이다”라고 비난했다.
미국의 부채는 14조 달러에 달하고 국가부채율은 GDP의 100%에 육박해 있다. 그러나 미 연준위(FED)는 단기적인 긴축재정을 거부했고 버냉키 의장은‘미국의 긴축재정이 더 많은 실업과 부작용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다시 말해 정부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월가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미국의 기업들은 정부재정이 균형점을 향해 이동하는 시그널이 나올 때까지 투자를 늘리지 않으려 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이제 미 연방준비위원회도 하나의‘리바이어던’같은 존재가 됐는지도 모른다. 유로존의 몰락을 예견한 프리드만 교수가 “美 연준위는 사실 필요 없다”고 말한 것은 이 오랜 리바이어던에 대한 완곡한 경고인지도 모른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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