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북진통일론의 오해와 진실
이승만 북진통일론의 오해와 진실
  • 미래한국
  • 승인 2012.01.04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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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한국정부가 수립된 이후부터 6·25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1948~1950년은 여러 측면에서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대단히 역동적인 시기였으며, 이에 대한 관심은 주로 6·25전쟁의 배경이라는 측면에서 집중돼 왔다. 그러나 전쟁의 전사(前史)로만 인식할 경우 이 때의 실제로 존재했던 다양한 모습들을 자칫 지나치게 단순화시킬 수 있다.

이 시기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국민국가의 모습을 갖춰 가는 때이기도 하다. 정부의 대내 정책적 향방과 대외 관계도 자연 국내외 중요 사건들과 긴밀하게 연결돼 나타났으며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정부의 통일인식과 대미 관계도 당연히 그러한 대내외 흐름 속에서 이루어졌다.
남북한 지도부는 모두 소련군의 철수, 김일성 일행의 소련과 중국 방문, 미군의 철수, 38도선 옹진전투, 소련의 핵실험 성공, 중공 공산정부의 수립, 북한군 군사력 증강 등 역동적인 국내외 움직임에 조응하고 있었다. 이승만 역시 그런 흐름 속에서 자신의 정치정략을 이루기 위해 통일방안을 인식하고 있었고 미국의 지원을 받으려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통일인식은 실지회복이라는 차원에서 표출된 것이었으며 또한 그 방식은 평화적 혹은 무력적인 어떤 방법도 채택 가능한 것이었다. 다만 평화통일의 경우 유엔결의에 따라 38선 이북의 북한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무력통일의 경우도 미국과 합의를 전제로 구상된 것이었다.

이승만의 평화통일 인식

해방 이후 미소 양군의 분할 점령과 국내 정치세력들의 대립은 통일된 새로운 국가 건설에 장애가 됐으며 단독정부 수립 이후에는 평화통일 가능성이 더욱 멀어져 갔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실지회복을 전제로 통일 방안을 인식했으며 또한 그 방식은 평화적이든 무력적이든 어떤 방법도 채택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는 한국정부가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 내의 유일한 합법정부이므로 38선 이북지역에 대한 법적 권한도 갖고 있다는 것과 유엔감시 하의 선거를 통한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다. 이에 부응해 국회에서도 북한 대표들을 위해 100석의 의석을 공석으로 뒀고 이후 1949년 2월에 가서는 북한 도지사들을 임명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평화통일 방안을 대체로 실지회복의 입장에서 인식하고 있었음은 1948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는 실지회복을 강조하고 아울러 이른바 ‘공산당의 매국주의’를 배제한 평화통일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여기서 그의 실지회복 주장이 곧 무력통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은 평화통일 기대에 관한 국민적 정서를 고려해야 하고 또 평화통일을 위한 유엔의 중재 노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유엔 한국위원단이 소련 당국과 협의해 북한을 무장 해제시키고 자유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국회에서도 평화통일론이 지배적이었으며 그것이 당시 국민들이 인식하고 있는 일반적 정서였다. 국민들은 38선이 관념의 선에서 점차 유형의 선으로 고착돼 통일의 가능성이 멀어져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통일 방안과 관련해 국무회의에서 미국을 의심하거나 불신하는 의견이 다수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공동으로 반공전선을 형성해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고 필요한 경우 일본과도 공동 안보체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북진통일 주장의 의미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 한국위원단의 평화통일 방안을 존중하면서도 다른 한편 북진통일 의욕을 강하게 내비쳤다. 그는 미국을 상대로 군사원조와 한반도의 안보 공약을 요구해야 하는 이중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그는 트루먼 독트린을 한반도에까지 확장시키도록 꾸준히 노력하는 한편 경우에 따라 북한을 자극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북진 주장은 국내외 정치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표출된 것이었다. 그것을 각 시기와 유형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먼저 정부 수립과 소련군 철수와 관련한 북진 주장의 의미이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 정부는 내부 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했고 이에 자신감을 갖게 된 군부가 곧바로 실지회복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고 나섰다. 특히 1949년 2월 일련의 북진 발언은 소련군 철수 발표에 고무돼 나타난 것이었다.

다음으로 1949년 6월 전후 주한 미군 철수와 관련된 북진 주장의 의미이다. 이승만은 미군철수설과 관련한 북한의 공세적 입장에 대응하면서도 한편으로 미군철수 이후 미국의 안보공약 확보를 위해 북진 주장의 강도를 높였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의 NSC(8/2)의 전략결정을 넘어서는 요구였던 것이다.

그 후 소련의 핵실험, 중공정부 수립, 북한의 옹진 공격 등과 관련한 북진 주장의 의미이다. 이승만의 북진 주장은 1949년 9월부터 상당히 증폭되는데 그것은 역설적으로 북한의 도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는 전략이었다. 이 시기 북진 발언은 ‘비현실적 공갈’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으나 이러한 전략은 장기적인 측면에서 보면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된다.

다음으로 미국의 경제원조안 부결과 관련한 북진 주장이 갖는 의미이다. 이승만은 미군의 지원 확보를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해 왔으나 1950년 1월 결국 대한경제원조안 부결이라는 결과를 얻게 됐다. 이에 그는 북진 주장에 다소 조심스런 입장을 보였으나, 여전히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면서 냉전의 전초 진지로 부각시키려 했다.

이상과 같이 이승만 대통령이 현실 가능성과는 상관없이 북진통일을 주장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상징 조작을 위한 ‘허세’만으로 파악할 수 없으며 당시 전 세계적 냉전체제에 조응하는 전반적인 정치 전략으로서 보다 포괄적인 차원의 의미를 내포한 것이었다.(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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