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딛고 일어나 행복 전하는 ‘따봉남’
고난 딛고 일어나 행복 전하는 ‘따봉남’
  • 이근미
  • 승인 2012.01.06 14: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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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가 띈다] 개그맨 권영찬 알앤디클럽 대표

 
돈과 명예와 건강을 거의 동시에 잃었을 때 다시 일어설 확률은 몇 퍼센트 일까. 아마도 ‘희박, 어려움’ 등의 전망이 나올 듯하다. 유명 연예인이 강간치상 혐의로 1심에서 2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아 온갖 소문에 휩싸였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기확률 0%”라고 답할 것이다.

개그맨이자 사업가인 권영찬 씨가 위의 두 케이스를 모두 경험한 장본인이다. 하지만 요즘 그는 방송진행과 CF모델, 홍보대사로 종횡무진 달리고 있다. 알앤디클럽 대표로 웨딩사업을 활발히 하고 있으며 기업과 각종 단체에서 ‘행복재테크’를 전하는 명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소문 한 번 잘못 나면 그날로 퇴출돼 재기가 거의 불가능한 살벌한 현장을 그는 어떻게 이겨내고 다시 일어섰을까.

1991년 데뷔한 그는 한국외국어대 영어학과 출신으로 당시 최고의 학벌로 주목받았다. 데뷔하자마자 개그 프로그램 출연은 물론 오락 프로그램 MC까지 섭렵해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CF 모델로도 각광받아 4년 만에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샀을 정도로 수입도 좋았다. 여세를 몰아 1998년 노량진에 ‘권영찬의 짝궁뎅이’라는 바를 개업해 성황을 이뤘고 이듬해 PC방 사업에 뛰어들었다.

“대형 PC방을 개업했는데 월수입이 1,500만 원 이상 나올 정도로 잘됐어요. 창업모범사례로 선정돼 강의를 하러 다녔어요. 대학 다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5개씩 하면서 학비를 직접 벌어 썼어요. 그때부터 마케팅에 재주가 좀 있었던 것 같아요.”

2002년 현우정보통신을 설립해 개그개그PC방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본격화했다. 18개 지점을 설치할 정도로 번창하는 가운데 스팀청소기 홈쇼핑 런칭을 비롯한 프로모션 일도 병행했다. 당시 5개 프로그램의 MC를 보면서 사업까지 잘 돼 거칠 것이 없었다.

 
모태신앙인 그는 어릴 때부터 봉사하는 일이 몸에 배어 개그맨이 된 뒤에도 장애인 단체를 비롯해 여러 단체에 봉사를 많이 다녔다. 출연료가 적은 장애인 프로그램 KBS <사랑의 가족>에도 13년이나 출연했다. 그런데 사업이 잘 되면서부터 교회 출석을 등한히 했다.

“당시 천호동에 있는 큰 교회에 다녔는데 큰 교회에 대한 반감이 들더군요. 그래서 주일성수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교회에 안 나갔어요. 현장에 나가서 도우면 되지 굳이 교회 내에 있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인기도 있고 사업도 잘 되고 거칠 것이 없었던 시절이지만 사람에 대한 상처로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한다. 그로 인한 번민으로 술을 많이 마셨다. 

모든 것을 잃다

2005년 6월 4일 권영찬 씨는 사업과 관련하여 여러 사람과 3차를 돌면서 무려 10시간이나 술을 마셨다. 인사불성이 된 상황이었는데 나중에 강간치상이라는 죄명으로 구속됐다.

“제가 지방공연을 다니니까 주거부정이라며 구속을 시켜서 37일간 구치소에 수감됐어요. 다들 무죄라고 하는 데도 긴장해서 머리카락이 빠졌어요. 나중에 알았는데 강간치상은 진단서가 있어야 성립이 된답니다. 진단서 없이 강간치상범으로 몰린 건 제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1심 재판 결과는 예상과 달리 2년 6개월의 실형 선고였다.

“합의를 봤으면 집행유예가 되었겠지만 아무 일도 없었는데 무슨 합의를 봅니까. 그런데 실형을 받고는 오히려 법정구속이 안되었어요. 제가 강력하게 아니라고 하니까 구속을 못 시킨 거죠.”

2심 재판 변호는 주병진 사건에서 무죄판결을 받아낸 이재만 변호사가 맡았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재만 변호사를 취재한 일이 있는데 당시 이 변호사는 권영찬 씨 사건에 대해 이런 견해를 밝혔다.

“술을 마시고 방심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연예인, 연예인 사업가, 언론보도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노리는 ‘꽃뱀’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술에 취한 남자를 대상으로 여성이 정교하게 거짓말을 하면 밝혀내기 어렵습니다.”

이재만 변호사는 여자가 거짓말한 정황을 다 찾았고 권영찬 씨는 2006년 12월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사건이 터졌을 때 대대적으로 보도하지만 무죄판결은 단신으로 처리하는 것이 언론의 속성이다.

“원래 밝고 긍정적인 성격인데 그때 이후로 불면증이 생겼고 요즘도 가끔 자다가 깜짝깜짝 놀랍니다. 어려운 시절을 신앙으로 견뎠어요. 당시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린 심정으로 기도했어요. 어머니는 저를 위해 매일 새벽기도 드리셨지요.”

재판받는 1년 6개월 동안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방송활동도 못하고 사업은 도미노처럼 무너지면서 바닥까지 갔다. 당시 연수입이 5억 원이 넘었으나 수입이 딱 끊기면서 아파트를 담보로 돈을 빌려야 했다.

“그 일을 겪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모 정당의 선거캠프를 도왔기 때문에 정계에 아는 분들이 많았어요. 37일간 구치소에 있을 때 여기저기 힘 있는 분들께 연락을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더군요. 구치소에서 뉴스를 보는데 저와 잘 아는 정치인이 TV에 나오더군요. 채널을 돌리니까 연예가중계에서는 ‘개그맨 K모 사업가가 성추문에 휘말려’ 뭐 이런 뉴스가 나왔습니다. 2005년에 저는 죽었고, 지금 덤으로 인생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솔로몬 왕이 ‘인생의 모든 게 헛되다’고 한 말씀을 실감했습니다.”

돈과 명예가 하루아침에 날아간 이후 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게 됐다.

“돈 없어서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겠더군요. 제가 잘못이 없으니 구치소에 간 건 견딜 수 있었어요. 그런데 돈이 없으니 정말 힘들더군요.”

다들 떠났지만 2002년부터 사귄 여자 친구가 그의 곁을 꿋꿋이 지켜줬다. 불신자였던 그녀는 “당신이 무죄받으면 교회 가겠다”고 하더니 2심에서 무죄를 받자 교회에 함께 나갔고, 2007년 3월 24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이 그에게 전환점이 됐다.

전환점이 된 결혼식

“제 사건으로 법관이 옷을 벗고 담당 경찰도 일계급 강등이 되었습니다. 그런 걸 기자들이 다 알았죠. 제가 무죄판결 받았을 때 기사를 크게 못 내준 기자들이 제가 결혼할 때 마치 한류스타가 결혼하는 것처럼 기사를 크게 써줬어요. 나를 믿고 기다려준 아내의 순애보가 부각됐지요. 아내가 기다려주고 어머니가 기도해주신 덕분입니다.”

결혼 이후 서서히 방송 출연 요청이 오면서 활동을 재개하게 됐다. 그런데 그해 12월 24일 촬영 중에 세트장이 무너지면서 대형사고를 당했다. 6개월 동안 꼼짝없이 병상에 누워 지내야 했다.

“지금도 발목에 텅스텐이 박혀 있고 후유증이 있어요. 어머니께서 ‘네가 워낙 강하니 사람 만들려고 이런 사고가 난 거 같다’고 하셨어요. 그때 뇌진탕으로 죽을 수도 있었는데 살아있으니 감사하죠. 그 사고로 보상금이 나와 이자를 갚았어요. 그때 이자를 못 갚으면 이것저것 도미노로 다 넘어갔을 텐데, 딱 이자만큼 나왔어요. 감사하죠. 큰일을 여러 번 당하면서 단련이 되어 이제 무슨 일이 생기면 ‘이것 또한 뜻이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마음이 들어요.”

큰일을 겪고 나자 삶 자체가 달라졌다고 전한다.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철저히 합니다. 그리고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 달려갑니다. 강의를 가든 구치소에 위문을 가든 제가 얘기를 하면 다들 귀를 기울이니 감사하죠. 얼마 전 의왕리 교도소에 갔는데 젊은 목사님이 목청을 높여 열정적으로 설교해도 사람들이 잘 안 들어요. 제가 단에 서서 ‘1심에서 2년 6개월 실형받은 형이야’라고 말하니까 바로 조용해졌습니다. 저한테 관심을 가지니까 전달하기가 쉽죠.”

무엇보다도 억울한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바리새인이 아닌 사마리아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재판을 하면서 ‘아닌 걸 아니라고 해도 상대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게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이 세상에는 있더군요. 그걸 알고 나서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너 왜 그래’라고 정죄하지 않고 그냥 바라봐 줍니다.”

신앙 좋다고 알려진 분들 가운데도 상처가 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고 한다.

“상처 있는 사람들은 얘기를 잘 안 해요. 그런 분들을 만나면 제 얘기를 먼저 꺼냅니다. 지나간 얘기를 하면 기자들이 오히려 ‘7년이나 지난 얘기 이제 그만하라’고 합니다. 그 일을 잊으면 경거망동할 수 있습니다. 강의를 가서도 제가 겪은 얘기를 통해 공감을 끌어냅니다.”

과거에도 사회봉사를 했던 권영찬 씨는 큰일을 겪고 뒤 더 많이 더 깊게 실천하고 있다.

“예전에는 사람을 도와주되 일정부분만 했어요. 이제는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합니다. 방송출연을 못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후배들이 많아요. 그 친구들 결혼할 때 협찬을 받아 지원해주면 저한테 보답을 하려고 합니다. 그 때 크리스천들에게는 ‘아내한테 잘 해줘라. 기도할 때 1초만 내 생각해라’ 그렇게 말하고 교회 안다니는 친구들한테는 ‘혹시 기회가 되어 교회에 나가면 내가 너한테 왜 이렇게 하는지 느낄 거다’ 그렇게만 말하고 일부러 전도하지 않아요.”

따뜻한 봉사를 하는 남자

그는 바쁜 시간을 쪼개 교도소와 보육원, 다문화가정 등 소외된 곳을 자주 찾는다. 그래서 어느 기자가 그의 별명을 ‘따봉남’이라고 지어줬다. ‘따뜻한 봉사를 하는 남자’라는 뜻이다.

얼마 전 결혼 4년 만에 아들을 얻었다. 시험관아기 시술 두 번 만에 낳은 도연이가 백일이 됐을 때 실로암안과를 통해 청소년 시각장애인 개안수술을 지원했다.

“많은 사람이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가족만 사랑합니다. 절대 주위 사람 사랑하지 않아요.  큰일을 겪고 나서 남에게 감사하고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된 게 수확입니다. 무죄 받고 돌아와서 처음 한 방송이 라디오 DJ였는데 회당 8만원이었어요. 17년 전에 했던 일을 자존심을 버리고 할 수 있었던 건 기도로 얻은 용기 덕분입니다. 남의 눈을 너무 의식하는 분들이 있어요. 저 분(하나님)만 바라보면 됩니다. 저 분은 어디를 가든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2005년 사건 이후 성경을 5번 통독한 그는 기회가 되면 신학교에 진학해서 신학과 상담심리학을 공부할 계획이다. 비신자들이 자신을 편안하게 대하자 책임감이 더 든다고 말한다.

“강의를 할 기회가 많은데 하나님에 대한 느낌만 설명할 게 아니라 자세하게 알려주고 싶어 공부하려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전하고 싶어요. 저희 아버지도 모태신앙인데 교회를 떠났다가 어머니가 30년 기도해서 돌아오셨어요. 남의 말 안 듣는 분들 많아요. A, B, C 타입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굳이 A 타입만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저한테 다른 예수쟁이들과 좀 다르다들 해요. 제가 실패해봤기 때문에 다들 제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아요. 그런 만큼 책임감이 커서 공부하려는 겁니다.”

큰 교회에 반발을 느껴 교회를 떠났던 그는 재판을 받으면서 소망교회에 나가게 됐다. 큰 교회여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데다 연예인이 많아 다니기 편했기 때문이다. 현재 1부 성가대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권사님들이 기도를 많이 해줘 그 힘으로 잘 되는 것 같다며 웃는다.

지난 4년간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 드디어 2005년 당시 수입으로 회복됐다. 공백없이 달려왔다면 훨씬 수입이 많아졌겠지만, 그는 지금 감사하다고 전한다.

“구치소 가게 되어 감사합니다, 사업 망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촬영하다 세트장 무너져 병원에 6개월 입원해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2005년부터 저는 ‘내일은 없다.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살자’는 각오로 달립니다. 그때 죽어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요. 제 아들이 하나님 의지해 살도록 신앙 물려주고, 오늘 기도할 거 기도하고, 남 도울 거 도와주면서 살고 싶어요.”

인터뷰 내내 권영찬 씨는 한 점 그늘이라곤 없는 밝은 표정으로 얘기했다. 큰일을 겪은 이후 그는 ‘십일조, 주일성수, 정죄하지 않기, 섬김’을 열심히 실천하며 살고 있다. (미래한국)
글 / 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사진/ 박영실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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