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보수주의자로 살아가기
대한민국에서 보수주의자로 살아가기
  • 미래한국
  • 승인 2012.01.1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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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하트의 <미국 보수주의 마인드 만들기 - 내셔널리뷰와 그 시대>를 읽고

황성준 편집위원,전 조선일보모스크바특파원
“보수주의자라고요? 그렇게 보수적으로 보이지 않으시는데…”

“물론 그리 보수적이진 않습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입니다. 그리고 제가 상당히 사회적인 편인데, 그렇다고 사회주의자인 것은 아닙니다.”

“네???”

지난 연말 30~40대 문화인들이 주축이 된 어느 송년 모임에 나갔다가, <미래한국> 덕분에 필자는 보수주의자임을 ‘커밍아웃’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미래한국에 실린 필자의 글을 읽은 몇몇 참석자들이 필자의 정치적 입장을 묻는 것이었다. (해외출장 가던 도중에 기내에서 우연히 미래한국에 실린 글을 읽게 됐다는 것이었다.)

“맞습니다. 보수주의자입니다”라고 입을 떼자 참석자들이 당황해했다. 이 모임 참석자들은 결코 종북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 대부분은 북한 체제에 대해 적대적이며, “아직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는 덜 떨어진 놈들이 있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자신들을 ‘리버럴’이라 규정하면서 정치 이야기보다는 문화·예술적 담론을 즐기는 이들이었다. 단지 이들에게 ‘보수주의자’라는 용어는 ‘김일성주의자’란 단어 못지않게 경악스럽고 흉물스러웠던 것이다.

멸종위기에 놓인 보수주의자들

이들은 필자가 보수주의자가 아닌 자유주의자라고 이야기해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자유주의라면 몰라도 보수주의자라니?” 화석이 아닌 살아 있는 공룡을 본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듯했다. 이날 커밍아웃한 사람은 필자 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한 참석자는 자신이 동성연애자임을 커밍아웃했다. 그러나 그 커밍아웃에 대해서는 ‘쿨’(cool)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성적 소수자’를 탄압하는 사회를 규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일제히 필자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필자가 “지금 탄압받는 것은 성적 소수자가 아니라 멸종위기에 있는 보수주의자입니다”라고 외치니 참석자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최근 한나라당 비대위를 둘러싸고 말이 많다. 특히 ‘보수’란 용어를 정강정책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격앙된 목소리를 높이는 보수우익인사들이 많다. 필자도 분노했음은 물론이다. 머리만 기대도 5초안에 잠드는 필자가 잠자리를 뒤척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해 안 되는 바도 아니었다. 보수란 용어 자체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대중적 분위기 속에서 보수란 용어를 지키는 것이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80년대 한국 공산주의자들이 “좌경·용공 조작·매도하지 말라”라고 외쳤던 사실이 생각날 정도였다.(공산주의자들을 좌경 혹은 용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전술적 차원에서 보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될 정도이다.(문제는 과연 현재의 논쟁이 ‘전술적 차원’인가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세상’이라는 홍길동의 한탄이 요즘 우리 보수주의자들의 현실이라면 지나친 자학일까? 현재 보수주의자 하면 ‘기득권 수호세력’ 혹은 ‘말이 안 통하는 권위주의적 꼰대’를 떠올리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사람’이 ‘사회주의자’인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사람’이 반드시 ‘보수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아니 ‘보수주의자’라고 해서 반드시 ‘보수적인’인 것도 아니다.

우리가 ‘XX주의’(-ism)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용어 사용에 주의해야 한다. ‘XX주의’가 될 경우 그 용어는 복잡한 정치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실용적이라고 해서 실용주의(pragmatism)의 신봉자는 아닌 것이다. 정치철학으로서의 실용주의는 ‘절대적 가치’ 혹은 ‘진리’를 부정하는 철학이다. 따라서 영구불변의 진리를 믿는 종교인이 자신을 실용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모순적 표현이 될 수 밖에 없다. 또 ‘이즘’은 학문분야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현실주의(realism)의 경우 국제정치학에서 말하는 현실주의와 예술에서 말하는 현실주의는 사실상 아무런 연관을 찾아보기 힘든 개념들인 것이다.

정치이념으로서의 보수주의

그럼 ‘정치 이념’으로서의 보수주의는 무엇일까? 과연 보수주의는 아직도 유효한 정치 이념이자 도구가 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한 지적 모색의 일환으로 제프리 하트의 <미국 보수주의 마인드 만들기>(The Making of the American Conservative Mind - National Review and Its Times)란 책을 읽어 보았다. 이 책은 부제 ‘내셔널리뷰와 그 시대’가 말해주는 것처럼, 미국의 격주간 보수주의 정론지 <내셔널리뷰>의 역사를, 내셔널리뷰가 제기하고 선도해 간 미국 보수주의 담론들을 중심으로 서술한 책이다.

내셔널리뷰는 1955년 미국의 좌익적 리버럴의 지적·문화적 헤게모니에 맞서 싸우기 위해 ‘미국 보수주의 대부’ 윌리엄 버클리가 창간한 잡지이다. 이 잡지가 타깃으로 삼은 독자는 ‘교양 있는 미국인’이었다. 그리고 목표는 ‘경향으로서의 보수주의’를 이념(ideas)과 운동(movement)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된 전선이 ‘정치’임을 망각하지 않으면서도, 주요한 고지 쟁탈전은 ‘문화와 예술’영역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또 실천했다.

우선 이 책에서 다룬 현대 보수주의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우선 보수주의는 기득권 수호 혹은 과거에 집착하는 전통주의(traditionalism)와는 다른 정치철학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내셔널리뷰는 자신의 이익도 지킬 능력도 신념도 없는 미국 기득권층의 리버럴리즘을 ‘자살적 무능력’라고 비판했다. “기득권 엘리트들은 통치할 용기를 상실한 채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좌익들에게 아부하고 심지어는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철학도 이념도 없이 과거에만 매달리는 전통주의자들은 대중 설득 구조를 상실하면서 보수주의 운동을 이끌 동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보수주의를 다음과 같이 개념 규정하고 있다. 첫째, 불완전한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은 천사도 악마도 아닌 불완전한 존재이며, 결코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있다면 ‘신’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이 지상천국을 건설한다는 것은 망상이며, 이러한 유토피아주의는 항상 ‘현실의 지옥’을 만드는 데 기여할 뿐이다.

둘째, 인간 인식론의 한계를 인정한다. 미신적 몽매주의에 반대함과 동시에, 이성의 과도한 신뢰에 바탕 한 지적 오만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현실에 모든 사실을 인식할 수 있으며, 이를 기초로 사회를 ‘디자인’할 수 있다는 사회공학적 지적 교만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공학자들은 인간을 실험용 생쥐 삼아 실험을 거듭한다. 그리고 실패해도 책임지지 않고, 또 다른 실험을 추구할 뿐이다. 마오쩌둥의 문화혁명 등이 대표적 예이다. 따라서 섣부른 검증되지 않은 가설보다는 오랜 역사 동안 집단적으로 축적되고 경험에 의해 검증돼 온 지적 유산에 대해 신뢰를 표한다.

한국의 ‘참보수주의’운동을 주창함

셋째, 헌정적 민주주의(constitutional democracy)를 신봉한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다수의 통치’ 이념이 ‘소수 독재’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다수의 의견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없는 그리고 신 혹은 자연이 부여한 ‘뺏을 수 없는 권리’가 인간에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로 생명, 자유, 행복 추구권, 재산권 등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다수의 폭력을 신봉하는 ‘민중 민주주의’와 절대적 가치를 부인하는 ‘문화적 상대주의’에 반대한다.

넷째, 시장 자유주의야말로 가장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 자유와 헌정적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경제 체제이다.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는 20세기 후반 들어 보수주의에 한 기둥으로 용해됐다. 시장과 자유, 그리고 개인이 주된 개념이라는 점에서 현대 보수주의는 과거 전통주의와 구별된다.

다섯째, 앞의 내용을 담보하는 ‘정치적 공동체’에 대한 의무와 헌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현대 보수주의는 무정부적 자유지상주의와 구별되며, 또 무원칙한 코스모폴리타니즘에도 반대한다. 현 단계에서 국가는 현실적인 실체이며, 이 실체를 통해서만 자유와 질서를 담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애국과 안보는 보수주의자들의 중요한 덕목이다.

내셔널리뷰의 ‘미국 보수주의 마인드 만들기’는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좌익과 리버럴로부터 ‘매카시주의자’라는 욕설(?)을 들어야 했으며,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 강단에서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또 좌우편향과의 사상투쟁도 만만치 않았다. 존 버치협회를 중심으로 한 극단적 음모론주의자들과 싸우는 한편, 국가와 전통적 가치를 전면 부정하는 무정부적 자유지상주의자들과도 투쟁해야 했다. 또 무엇보다도 ‘현실정치와의 끊임없는 조우’에서 나타나는 전술적 갈등이 내셔널리뷰 내부의 불화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내셔널리뷰의 ‘실천하는 보수주의’ 철학은 계속됐으며, 오늘날 미국 토양에 굳게 뿌리내리게 됐다. 한국에서의 ‘참보수주의’(true conservatism)운동은 어떻게 실현되고 실천될 것일까? <미래한국>이 한국의 <내셔널리뷰>를 자임한다고 한다면 지나친 오만일까?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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