밉다고 쪽박을 깰 참인가?
밉다고 쪽박을 깰 참인가?
  • 미래한국
  • 승인 2012.01.3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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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역사이야기]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부자를 옹호하는 건 인기 없는 짓이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건 그렇다. 부자 자체는 질시의 대상이면서도 대개는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부자를 위한 변호는 거의 언제나 눈총감이다. 한국에서 그것도 財閥에 대해서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의 재벌은 유명하다. 국내적으로야 당연하지만 국제적으로도 그렇다. 영영사전에도 chaebol이라는 단어가 올라가 있다. 그런데 받아들여지는 인상은 다르다. 국제적으로는 그것을 한국경제의 강점의 하나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재벌은 그냥 악명이다. 재벌이라는 지칭은 백이면 백 부정적인 묘사에 사용된다.

그런 만큼 한국에서는 재벌을 비판해야 양식 있는 사람으로 대접받는다. 특히 정치권으로 가면 압도적으로 그렇다. 재벌을 옹호하는 소리를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자살행위다. 재벌을 때려야 정치적으로 산다. 여기에는 여야가 없다. 그래서 정치의 계절이 돌아오면 늘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재벌 때리기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강도가 예사롭지 않다. 선거 결과에 따라선 진짜로 재벌 해체를 보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까지 된 것은 재벌 자신의 자업자득이라는 지적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그간 재벌 기업들이 보여 온 갖가지 몰골들은 굳이 나열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져서 해체를 운운하자면 이 나라에는 해체해야 할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재벌 때리기에 열중하는 정치권부터가 그렇다. 다른 분야들은 또 어떤가? 어느 한 구석 문제없이 온전하다 자신할 만한 곳이 있는가?

좌익 선동의 가장 큰 특징은 문제를 과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놓는 대책도 대개 초가삼간 다 태워버리자는 식인 경우가 다반사다. 재벌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해체 운운은 과연 현명한 처방전인가? 쪽박만 깨뜨리는 것은 아닌가?

명나라 정화 함대 결말의 교훈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 시절 환관 정화(鄭和)는 대함대를 이끌고 이른바 남해원정을 시작했다. 당시 정화 함대의 규모는 엄청났다. 가장 큰 배였던 보선(寶船)의 규모는 길이 137m 선폭 56m 돛대 9개에 배수량은 약 2700톤으로 추정한다. 이것은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횡단해 아메리카를 발견할 때 탑승한 산타마리아호의 30배나 되는 크기였다. 1405년부터 시작된 1차 원정 때 이러한 보선만 62척에 장병이 2만7800여명이 분승했는데 선단 전체는 총 317척에 이르는 대함대였다. 정화 함대는 1433년까지 28년 동안 모두 7차례에 걸쳐 동남아 일대는 물론이요 인도양을 거쳐 아라비아 더 나아가 아프리카까지 항해를 했다.

영락제가 정화에게 이 같은 대항해를 지시한 이유는 단순한 정치적 동기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조카 건문제에게서 황위를 찬탈한 영락제가 쫓겨난 조카가 죽지 않고 해상으로 숨어들어갔다는 의심을 품고 이를 추적토록 했다는 것이다. 해상 무역로 개척 등의 진취적 비전이 있었던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리고 애초에 교역보다는 위력의 과시를 통한 시혜적 조공무역이 주목적이어서 실익은 없었다는 평가도 많다.

하지만 동기로 보자면 자기 왕관의 보석까지 팔아 콜럼버스의 항해를 지원한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의 경우도 매우 단순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이사벨라는 무엇보다도 아시아에 복음을 전파하겠다고 역설하는 콜럼버스의 ‘신심’을 높이 샀다. 오히려 영락제의 경우가 그래도 대외교역로 개척에 대한 관점이 분명했다. 영락제는 부친 홍무제 주원장과는 달리 실크로드나 해상로를 통한 교역에 큰 관심을 갖고 이를 장려했던 게 사실이다.

정화 함대의 성과에 대해선 당시에도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항해 자체만으로도 업적이라기에 손색이 없다. 정화 함대의 원정은 서양의 대항해 시대 개막기의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보다 거의 80~90년 앞서는 일이었다. 일부에서는 정화 함대가 콜럼버스에 앞서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마젤란보다 먼저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런 점은 차치하고라도 정화 함대가 활약하던 28년간 남지나해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바다가 거의 전적으로 명에 의해 지배된 것은 분명했다. 이에 따라 동남아에는 화교 인구가 크게 늘기도 했다. 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상인 계층의 성장도 두드려졌다. 만약 명나라가 이 대항해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갔다면 세계사의 흐름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놀라운 원정의 결말은 놀라울 정도로 허망했다.

1424년 영락제가 사망하자 뒤를 이은 홍희제는 항해를 중단시켰다. “아무 소용없는 일에 국력을 낭비할 뿐이니 마땅히 중단해야 한다”는 유학자 사대부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결국 명은 외국과의 접촉 통제는 물론이고 배가 바다를 들락거리는 것 자체를 금하는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취했다. 그리고 원정의 기록을 폐기하고 급기야는 배의 목재를 뜯어내 해체했을 뿐 아니라 조선소를 파괴하고 설계도마저 불살랐다. 홍희제의 뒤를 이은 선덕제가 다시 원정을 지시해 정화가 재차 항해에 나섰지만 대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정화의 마지막 함대는 1433년 항해 도중 숨을 거둔 정화를 싣고 돌아왔다. 그 뒤로 중국의 함대는 다시는 대양 항해의 무대에 등장하지 못했다.

왜 이런 허망한 결말을 맞았을까? 유학자 사대부들의 편협한 이념과 질시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정화는 환관이었다. 게다가 이민족 이슬람교도 출신이었다. 이런 인물이 대항해를 통해 정치적 권세와 함께 부 또한 크게 축적했다. 더욱이 상인 계층이 성장하고 외래문물도 유입됐다. 주원장의 명나라 건국에 참여한 유학자 세력들은 토지에 기초한 농업생산사회를 이상화하고 있었다.

정화를 위시한 항해 세력은 모든 점에서 명나라의 유학자 사대부들의 적일 수밖에 없었다. 명의 유학자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편협한 이념에 따라 아예 쪽박 자체를 깨버린 것이다. 그 대가가 드리운 역사적 그림자는 짙고 길었다. 원양 항해와 원거리 교역의 문화를 상실한 중국은 대항해 시대 이후 근대 세계의 형성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었다.

부의 분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뺏어서 나누거나 아니면 돈이 순환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자들이 돈을 쓰게 해 순환시키는 것은 인내를 요하는 만큼 대중적 인기는 없다. 그래서 선동가들은 늘 전자를 즐긴다.

재벌의 자업자득이 있다면…

부자를 때려잡자는 건 구호로는 쉽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가난의 구제에 궁극적으로 성공한 적은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 재벌 때리기도 구호로는 쉽다. 그러나 그것이 소위 99%에 이익이 된다고 보는 것은 단지 감정적 기대일 뿐이다. 한국의 재벌 해체에 가장 기뻐할 쪽은 우선 외국의 경쟁 기업들일 것이다. 밉다고 쪽박을 깨면 즐거워할 자는 따로 있고 손해는 결국 국민 모두에게 골고루 미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굳이 오늘 한국의 재벌이 처한 상황에 자업자득의 측면이 있다면 한 가지는 분명히 지적할 수 있다. 反기업적인 자들에게 떡 하나 더 주듯이 돈을 갖다 바친 건 재벌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참여연대를 키운 재정적 힘은 압도적으로 재벌 자신에게서 나온 것 아닌가?

하수는 기발한 묘책을 생각하지만 고수일수록 원칙에 입각한 정석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이제라도 반기업적인 세력에 대한 쓸모없는 지원부터 끊고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을 지면서 당당한 자세로 대국민 설득에 나서는 게 옳다.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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