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인 판결, 곽노현 부활시키다
화성인 판결, 곽노현 부활시키다
  • 미래한국
  • 승인 2012.02.02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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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 <저격수다> 출연자

‘화성인’ 판결로 곽노현이 교육감에 복귀했습니다. 돈을 건넨 주범인 곽노현은 석방되고 돈을 받은 종범인 박명기는 실형을 사는, 웃기지도 않는 판결이지요. 그러고 보면 곽노현은 참으로 깊은 통찰을 가진 사람인 셈입니다. “내가 주면 선의, 내가 준 것을 받으면 범죄”라는 진실을 일찌감치 꿰뚫어 본 셈이니까요.

주범은 석방, 종범은 감방

곽노현은 민주화가 이루어진 1987년 이후에 운동을 시작한 늦깎이 운동권 인사입니다. 좋은 시절 되니까 민주화운동이라는 열차에 올라 탄 것이지요. 제일 먼저 한 일이 ‘인민민주주의 법학회’를 만든 것이었죠. 스탈린은 인민민주주의라는 ‘획기적’인 개념을 내놓았습니다. 막무가내로 사회주의 혁명을 하지 말고 집요하게 몇 년에 걸쳐서, 최상위, 차상위, 차차상위… 이런 식으로 사회 상류층을 차례로 제거해 가는 전술입니다. 곽노현은 인민민주주의 전술을 적용해 먼저, 감옥에 갇힌 전두환, 노태우를 때렸습니다.

그는 전, 노를 일종의 혁명재판으로 다뤄야 한다고 싸움을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명세를 탄 다음에는 삼성 이재용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오프라인 시민판의 싸움은 박원순의 참여연대가 주도했고 법정 싸움은 곽노현이 주도했습니다. ‘인민민주주의 법학회’ 및 전-노-이재용에 대한 싸움을 통해 곽노현은 서울 법대 후배들을 확실하게 장악했습니다. 곽노현은 이미 법조계 최대의 실세인 셈입니다.

곽노현이 석방되자 마자 한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고교선택제 거부, 다른 하나는 학생타락조례(일명 ‘학생인권조례’) 밀어붙이기입니다. 둘 다 이미 빈사상태에 이른 학교라는 제도를 최종적으로 박살내는 조치입니다.

중고등 학교교육 즉 공교육이 박살난 가장 큰 이유는 하나의 학급 안에 학력 차이가 너무 커서 수업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교육이 마비돼 붕괴하기 시작한 지 이미 이십여년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굴러가는 것은 네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국가는 거둬들인 세금을 써야 합니다. 둘째, 교사는 봉급을 받아가야 합니다. 셋째, 아이는 졸업장을 받아가야 합니다. 넷째, 부모는 어딘가에 아이를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와 둘째는 철밥통의 문제이고 셋째와 넷째는 두려움의 문제입니다.

사악한 명제, ‘학교는 목적이다’

10여년전에 교육부 장관 이해찬은 이 같은 끔찍한 사정을 합리화하는 명언을 남겼지요. 이해찬은 “학교는 목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칸트의 “인간은 목적이다. 수단이 아니다”란 말을 표절한 말입니다. 이 유식한 듯 들리는 자못 철학적인 명제는 사악하기 짝이 없는 소리입니다. 세상에! 그 자체로서 목적인 존재가 몇 개나 되겠습니까? 구원, 해탈, 깨달음, ‘생명의 번영’ 뿐 아닐까요? 학교는 목적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길러내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 멋있는, 그러나 매우 사악한 명제에 숨겨진 뜻이 무엇일까요? 다름 아닙니다. 이런 소리입니다. “학교 공교육이 망가지든 말든 학교라는 제도 자체가 중요하다. 학교는 신성한 철밥통이 돼야 한다.” 이해찬은 이 사악한 사고방식에 바탕해서 전교조를 합법화시키고 학교 선생님을 ‘최상급 귀족 조직노동자’로 만들었지요. 학교 공교육이 까마득한 심연 속으로 추락할 수 있는 막강한 추락 엔진을 달아준 교육부 장관이 바로 이해찬입니다. 그가 교육부 장관을 지낸 시절에 배출된 고교 졸업생들은 특별히 학력이 낮았습니다. 그래서 ‘이해찬 세대’라고 불리지요. 생년으로 치면 대략 84년 생 이쪽 저쪽입니다.

공교육을 되살려보려는 시도가 고교 선택제, 수준별 수업, 학점제, 자율고 확대 같은 노력입니다. 전교조 선생님들 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이 같은 조치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분들 역시 ‘최상층 귀족 조직노동자’이기 이전에 ‘선생님’이기 때문입니다.

교장선생님, 일진짱 앞에 무릎 꿇다

곽노현이 석방되자 마자 고교선택제를 전면 백지화한 것은 “학교는 목적이다”라는 사악한 사고방식을 옹호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명은 서울 130만 아이들의 교육과 미래를 망치는 것에 다름아닙니다.

그의 사악한 업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학생타락조례’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학생타락조례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그 중 ‘교내에서 휴대폰을 사용할 권리’ 같은 것들은 사소합니다. 치명적인 두 개의 독소를 품고 있습니다. 하나는 교내 집회 방조, 다른 하나는 동성애 방조입니다. 둘 다 ‘인권’과 ‘자유’란 이름으로 행해집니다.

지금 학생들은 얼마든지 집회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교내집회입니다. 중고등학생들이 시도 때도 없이 교내집회를 가질 때 교사가 이를 말리거나 지도할 자격이 박탈됩니다. 이 경우 일진짱이 학교를 지배하게 되겠죠. “쫄지마 씨바. 모여! 꼰대랑 한판 뜨자!” 이렇게 의기양양하게 부르짖으면 수백명의 학생이 모이겠죠. 일진짱이 소집한 집회에 참석하지 않았다가는 왕따당하고 셔틀빵을 하게 되겠죠. 일진짱이 소집한 집회 앞에 선생님과 교장이 부들부들 떨겠지요.

지금 학부모들은 얼마든지 학교에 가서 선생님을 닦달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 문제가 있을 경우 이에 항의하고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중고등학생들의 교내집회에 관한 교사의 지도 권한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은 학교를 박살내자는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성애를 찬양하는 소년, 소녀들

학생인권조례에는 또한 “동성애 소년, 소녀를 보호하고 그 비밀을 지켜줘야 한다”는 독소 조항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동성애자들을 잡아 죽이거나 혹은 감옥에 보낸 적이 없는, 관용적 문화를 유지해 왔습니다. 서양에서는 불과 50여년 전까지만 해도 동성애자들을 잡아 죽이거나 감옥에 보냈습니다. 나치는 수 만 명의 동성애자들을 죽였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은 동성애자들을 감옥에 보내거나 혹은 린치했습니다. 컴퓨터의 아버지라 불리는 앨런 투린(영국)은 동성애로 처벌받게 되자 청산가리를 묻힌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죽었습니다. 한입 베어낸 사과?애플의 로고는 투린의 ‘동성애 사과’를 은유한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미국에서는,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경찰이나 깡패들이 동성애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난입해서 사람을 때려죽이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야말로 수천년 동안, 전세계에서 동성애에 대해 가장 관대한 문화를 유지해 온 셈입니다.

지금 동성애자 운동의 핵심은 ‘동성애자에 대한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성애자 사이의 법률적 결혼, 동성애자 ‘부부’의 자녀 입양권, 군대 안에서의 ‘사랑행위’에 대한 허락 등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동성애를 전면적으로 제도화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역설적으로, 수천년 동안 동성애를 하나의 ‘서브 컬쳐’로서 용인해 왔기 때문에 새삼 동성애를 전면적으로 제도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만큼 더 반발이 클 수 밖에 없습니다. 동성애자를 잔인하게 탄압한 적 없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에 대한 원초적 죄의식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성애자들이 전면적 제도화를 요구하면, 이에 대해 정말 무지막지한 반발이 생겨날 확률이 99.9999%입니다.

호모 부부? 레즈 부부? 호모 부부 밑에 입양된 소녀? 레즈 부부 밑에 입양된 소년? 군대의 고참 병장과 쫄다구 사이의 동성애 성교?? 이런 것에 대한 전면적 ‘인권과 자유’를 요구하면 사회가 빠개져서 원초적 폭력이 튀어나오게 될 것입니다.

각설하고, 학생타락조례의 동성애 ‘비밀유지 및 보호’조항은 무슨 결과를 가져 올까요? 10대 중반의 소년, 소녀들이 동성애를 ‘쿠울(cool)하고 세련된 것’으로 숭상하는 풍조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미 이런 풍조가 상당히 존재합니다.

도대체 곽노현 씨는 세상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 같이 살벌한 교육파괴자가 된 것일까요? 여기에는 자못 철학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현대 철학 중에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은 세상을 ‘감옥 혹은 억압시스템’으로 봅니다. 모범수로 살래? 반항인으로 살래? ?이런 질문을 던지지요. 세상의 모든 기존 가치와 도덕을 부정하고, 세상의 의미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의미라고 주장합니다.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과 ‘쫄지마 씨바’!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은 세상을 감옥, 억압으로 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항을 해방이라고 주장합니다. 세상의 근본 가치, 근본 질서를 뒤흔드는 것을 황홀이라고 봅니다. 푸코는 이를 ‘한계 체험’이라고 불렀지요. 그래서 프랑스 ‘예술 영화’ 중에는 근친상간을 다룬 게 상당히 많습니다. 근친상간이야말로 정말 화끈한 한계 체험이지요.

이들은 사회 기본 질서를 조롱하고 해체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1977년에 푸코, 라깡, 데리다, 들뢰즈 등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13세 이상 청소년이 어른과 자유롭게 섹스할 권리”를 주장하는 사회운동을 펼쳤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짜 진보 진영의 사고방식에는 바로 프랑스제 포스트모더니즘이 깔려 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입니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존재한다고 해도 알 도리가 없어. 떼를 이루어 촛불을 들고, 사회 시스템 전체를 뒤흔드는 것! 이것이 바로 황홀이야. 이것이 바로 인생의 의미야!”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요? 곽노현의 뇌물을 ‘선의로 준 돈’이라고 태연히 말할 수 있고, 천안함을 ‘미국과 MB의 조작’이라고 주장할 수 있고, 광우병 패닉을 불러 일으켜 촛불 파티를 벌인 일에 대해 ‘시민주권의식의 발현이며 정의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쾌거’라고 정강서문(민주통합당)에 써 갈길 수 있는 배짱?이것이 바로 프랑스제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이곳은 ‘짝퉁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철학적 실천 없는 포스트모더니즘 정치 테크닉만 기승을 부릴 뿐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풍을 흉내 낸 정치 투기꾼들만 설칠 뿐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냄새 나는 입을 벌리고 세상에 대해 이렇게 부르짖는 것입니다. “쫄지마 씨바!” 그래서 곽노현은 석방되자마자 나꼼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맹세했습니다. “쫄지 않고 잘 싸우겠습니다.” (미래한국)
 

<저격수다>(www.killch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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