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담론, 이젠 균형을 잡자
이승만 담론, 이젠 균형을 잡자
  • 미래한국
  • 승인 2012.02.21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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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2/9

유영익(柳永益)  본지 편집고문·한동대 석좌교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우리에게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로 비춰지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한반도의 통일국가 건설을 저해하고 민주주의의 발달을 억압한 시대착오적 독재자로 매도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그는 대한민국 건국의 원훈(元勳)이자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국부(國父)로 숭앙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이 대통령과 그의 업적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수를 웃도는 형국이다.

두 개의 얼굴 야누스로 비춰진 이승만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유아독존적이고 독선적이며 이기적인 독재자라고 비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이승만을 “권력욕에 눈먼 미국의 앞잡이”(공산권 정부 및 언론), “독재적이고 야심에 차고 반동적이며 무책임하고 잔인한 인물”(영·미의 진보적 언론), “희대의 협잡꾼, 정치적 악한”(장준하), “교활하기 짝이 없는 철저한 에고이스트”(신상초), “독립운동도 제가 대통령을 해먹으려고 했고 또 건국도 제가 대통령 해먹으려고 했던 인물”(송건호), 그리고 “장제스의 아류(亞流)”(오언 래티모어) 등으로 묘사했다.

이 같은 주장과는 정반대로 이승만의 위인(偉人)과 업적에 대해 호의적 평가를 내리면서 그를 극구 옹호하는 인사들이 있다. 이들은 이승만을 가리켜 “희세(稀世)의 위재(偉才)”(김인서), “외교의 신(神)”(조정환), “대한민국의 국부, 아시아의 지도자, 20세기의 영웅”(허정),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그리고 에이브러햄 링컨을 모두 합친 만큼의 위인”(김활란), “한국의 조지워싱턴 :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학자, 정치가, 애국자 중 한 사람 : 자기 체중만큼의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인물”(제임스 밴플리트)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이승만 옹호론은 4·19 이후 한국 지성계에 만연한 반(反) 정서 때문에 최근에 이르기까지 학계나 언론계에서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 다만 예외적으로 기독교 목사 출신 언론인 김인서가 1963년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이라는 저서를 펴냈고, 1975년에는 한국일보사에서 이승만을 호의적으로 소개하는 <인간 이승만>이라는 연재물을 게재했으며, 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정치학자 몇 명이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논문을 발표하고, 이 대통령 집권기에 고위직을 맡았던 일부 군장성과 고위 관료둘이 자신들의 회고록을 통해 이 대통령을 직간접적으로 옹호해왔다.

4·19 이후 학계를 지배한 반(反)이승만적 분위기는 1989년 동서 냉전의 종식과 함께 바뀌기 시작했다. 냉전의 종식은 무엇보다도 이승만이 주창했던 자유민주주의와 반공(反共)주의의 종국적 승리를 위미했기 때문에 일부 현대사 연구자들 간에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유발시켰다. 특히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공산권의 현대사 관련 사료(史料)가 속속 공개됨으로써 이승만 재평가에 힘을 실어줬다.

이밖에 1961년 이후 1993년까지 남한을 다스린 군인 출신 대통령들의 강도 높은 ‘군사독재’는 이승만의 ‘문민독재’를 상대화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 변화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탈(脫)수정주의를 표방하는 사회과학자, 역사학자 및 언론인들 간에 이승만을 새롭게, 긍정적으로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을 태동시킨 것이다.

필자는 이 대통령이 12년간의 장기 집권을 통해 허다한 과오와 실정(失政)을 저질렀음을 인정한다. 이 대통령은 건국 초에 친일파 문제를 시의적절하게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커다란 후환을 남겼다. 또한 이 대통령은 6·25 전쟁 발발 직후 영부인과 함께 수도를 남몰래 탈출하면서 정부의 그릇된 전황(戰況) 방송을 통해 서울 시민을 안심시켜 그들의 피난 기회를 박탈했고, 국군이 예고 없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함으로써 다수의 무고한 인명 피해를 발생시킨 것에 대해 국가 최고 통치자로서 책임이 있다.

그는 전쟁 중에 발생한 거창 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사건 등 일련의 대규모 참사와 군의 비리, 부패에 대해서도 책임이 막중하다고 할 것이다. 1954년에 ‘사사오입’이라는 억지 논리로써 개헌을 강행해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1960년에 자유당(自由黨)과 경찰을 동원해 부정선거를 자행 혹은 묵과한 사실 역시 용서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의 집권기간에 자유당 정권과 신흥재벌 간에 정경유착 현상이 심화됨으로써 부정부패가 나타난 사실 또한 묵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집권 말기에 그의 자유당 정권이 반공(反共)의 명분하에 조봉암과 진보당에게 가한 가혹한 탄압이 역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승만이 남북분단이나 6·25 전쟁 발발 등 중대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한민족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외세의 국가 이권 추구에 편승했다”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걸음 더 나아가 4·18 이후 이승만을 다룬 국내외 학자들과 언론인들이 그의 치적(治績)을 논함에 있어서 그가 범한 과오를 파헤치는 데 열중한 나머지 그의 공적을 살피고 인정하는 작업을 등한시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지금까지의 이승만 연구는 비판 일변도로 흘렀으며 따라서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의 정치·외교적 업적

이에 그동안 이승만 연구자들이 등한시했던 이 대통령의 업적들을 간추려 살핌으로써 이승만 담론에 균형을 잡고 나아가 그의 통치에 대한 공정한 역사적 평가에 기여하고자 한다.

이 대통령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남한을 통치하면서 해방 전후에 그가 미리 준비했던 건국 구상에 따라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교육, 사회, 문화·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획기적 업적을 달성했다. 그 중에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골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치 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 통치체제를 확립했다. 그는 1948년 제헌국회의 의장으로서 헌법기초위원회에서 기초(起草)한 내각책임제 헌법 초안을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도록 압력을 가해 자기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그 후 그는 제1차 개헌(1952)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고, 제2차 개헌(1954)을 통해 국무총리제를 폐지함으로써 대한민국을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미국의 대통령제를 도입한 나라로 만들었다. 이승만의 ‘고집’으로 인해 남한에 고스란히 도입된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는 4·19 이후 10개월간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유지되면서 한국이 1945년 이후 독립한 전 세계 140여 개 신생국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성취할 수 있는 정치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대통령은 권위주의적 통치 내지 ‘문민독재’를 한 것이 사실이나 언론의 자유를 비교적 폭넓게 허용하고, 국회의원 선거를 중단 없이 실시하면서 의회제도를 존속시켰다. 또한, 양당제도의 발달을 조장하고, 지방자치제를 실시하는 등 적어도 형식상 민주주의의 외피(外皮)를 유지하고 한국 국민의 민주주의적 자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외교 분야에서 그는 대한민국 수립 후 유엔과 미국을 위시한 30여 개 국가로부터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립했다. 그리고 그는 1952년에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일명 ‘평화선’ 혹은 ‘이승만 라인’)을 일방적으로 선포함으로써 독도(獨島)를 포함한 한반도 해역의 어족 및 해저자원을 보호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특히 6·25 전쟁 막바지에 미국이 북진통일을 원하는 대다수 한국민의 소원을 무시하고 공산군과 휴전을 모색하자 아이젠하워 대통령 행정부에 협박과 회유를 동반한 ‘벼랑 끝 외교전술’을 동원해 미국으로 하여금 1953년 10월 한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도록 만들었다.

이 조약이 성립됨으로써 19세기 후반 이래 14년에 한 번 꼴로 전화(戰禍)에 휩쓸렸던 한반도에는 장기간의 ‘긴장된’ 평화가 깃들었으며, 남한은 미국의 군사 보호 우산 아래 정치, 안보, 경제, 교육,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공전(空前)의 비약적 발전을 성취할 수 있었다.

군사·경제 분야의 업적

 군사 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6·25 전쟁이 발발한 직후 대미 외교를 통해 미군의 참전을 유도하고, ‘대전협정’(1950. 7. 14)을 통해 국군과 유엔군 간의 긴밀한 공조체제를 형성, 유지하며 동시에 남한 국민 대다수의 충성을 확보함으로써 북한 침략군과 중공군을 휴전선 이북으로 격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쟁 기간 끈질기게 미국에 대해 국군의 증편과 장비 현대화를 요구한 결과 전쟁 발발 이전 10만 명에 불과했던 한국군의 규모를 1954년에 65만 명 이상으로 대폭 증원하면서 그 질 역시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대한민국을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질 높은 상비군을 보유한, 동아시아에서 무시 못할 군사강국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경제 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집권 기간에 일반 서민의 생활수준을 현격히 향상시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해방 후의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미국으로부터 20억 달러 이상의 무상 원조를 받아내 전후(前後) 경제 복구에 성공했으며, 수입대체산업을 육성함으로써 공업화의 단초를 열었다.

특히 그는 6·25 전쟁 발발 이전에 농지개혁을 개시해 총 소작지 면적의 40%에 달하는 58.5만 정보의 땅을 유상매입, 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소작농들에게 분배하는 혁명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 개혁을 통해 해방 당시 전체 경작 면적의 35%에 불과했던 자작지의 비율이 92.4%에 달하게 됐다.

요컨대, 이 대통령은 구래(舊來)의 지주 토지 소유제를 청산하고 자작농적 토지 소유제를 확립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농지개혁은 대다수의 농민을 지주제의 속박과 착취에서 해방시킴으로써 과거에 농노(農奴)에 불과했던 대다수 농민을 주권의식을 가진 자립적 국민으로 탈바꿈시키고, 남한의 농업 생산성을 높이며,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태동시키는 데 획기적으로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농지개혁은 지주제를 붕괴시켜 전통사회의 지배계급인 양반의 몰락을 초래하고 6·25 전쟁 중 남한 농민들이 북한군에 부화뇌동하는 현상을 예방하는 등 여러 가지 경제외적 부수효과를 수반했다.

교육 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6년제 의무교육제도를 도입, 실시하고 성인 위주의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한 결과 1959년까지 전국 학령아동의 취학률을 95.3%로 높이고 해방 당시 80%에 달했던 문맹률을 22%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나아가 그는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대폭 중성하고 해외 유학을 적극 장려함으로써 과학기술의 발달과 경제개발에 필요한 고급 인재를 양산했다.

해방 당시 우리나라의 대학과 전문학교는 통틀어 19교, 학생 수는 약 8,000명에 불과했는데 1960년에는 초급대학·대학·대학교가 68교, 학생 수는 약 10만 명으로 급격히 늘었다. 동시에 해외 유학생의 수가 비약적으로 늘었는데,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정규유학생’으로 출국한 학생은 4,884명(그 중 미국 유학생은 89.9%), ‘기술훈련 유학생’으로 출국한 학생은 2,309명이었다. 이들 이외에 1950년대에는 9,000여 명의 군장교들이 미국의 각종 군사학교에 파견돼 교육을 받았고 또 원자력 기술을 배우기 위해 약 100명의 연구생이 미국으로 파견됐다.

교육·사회·문화 분야의 업적

사회 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통해 지주제를 붕괴시킴으로써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양반제도에 종지부를 찍고, 남녀에게 동등한 교육 및 취업 기회를 보장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평등화에 획기적으로 기여했다. 이 대통령 집권기에 한국 여성은 초등학교에서 남자와 똑 같은 의무교육을 받고 중·고등학교 및 대학에 대거 진학하기 시작했다. 1958년 각급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의 수를 해방 직후와 비교해보면, 초등학교의 경우 약 3.1배, 중·고등학교의 경우 약 6.1배, 사범학교의 경우 약 2.5배, 그리고 대학(교)의 경우 약 8.5배로 늘었다.

또 교육기회의 확대와 함께 여성의 취업기회가 확대돼 그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졌다. 저학력 여성들을 타자수, 교환수, 섬유노동자, 직조공, 피복공 등 직종에 취업하는가 하면 고학력 여성들은 교원, 의사, 약제사, 경찰관, 공무원, 여군 장교, 판·검사 등 과거 남성들이 독점했던 직업 분야에 침투했다. 나아가 국회의원 및 장관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문화·종교 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한글전용 정책을 채택해 여행(勵行)함으로써 본격적인 ‘한글시대’를 열었다. 동시에 그는 전통문화의 계승 및 보존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했다. 특히 그는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의 원칙을 사실상 무시하면서 기독교(주로 개신교)의 보급을 배타적으로 장려한 결과 원래 유교국가였던 한국을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그는 ① 국가의 주요 의례를 기독교식으로 행하고, ② 국기에 대한 경례를 주목례(注目禮)로 대체하며, ③ 군대에 군목제(軍牧制), 그리고 형무소에 형목제(刑牧制)를 도입하며, ④ 정부의 주요 부서에 기독교인을 대거 등용하고, ⑤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언론매체의 발달을 지원하며, ⑥ 6·25 전쟁 중과 그 후에 외국(특히 미국)의 기독교 구호단체들이 보내오는 구호금과 구호물자를 친(親)정부적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통해 배분하도록 조처함으로써 기독교 교세의 신장에 기여했다.) 그의 집권기에 정부의 19개부 장·차관 242명 가운데 38%, 그리고 국회의원 200명 가운데 약 25%가 개신교 교인이었다. 이러한 이 대통령의 기독교 장려정책에 힘입어 남한의 기독교 교세는 1960년을 전기로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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