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총선에서 우익진영이 완패한 이유
1950년 총선에서 우익진영이 완패한 이유
  • 미래한국
  • 승인 2012.03.15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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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진 전 대한민국건국회 명예회장 

2012년 올해는 4월에 총선, 연말인 12월에는 대선을 치러야 할 선거의 해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다.

30여 년 전, 친구인 모 대학 교수로부터 “우리의 통일은 두 가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 첫째가 북한이 붕괴됐을 때, 둘째는 남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세워졌을 때”라는 말을 들었다. 이때 나는 “전자인 북한이 붕괴됐을 때 통일이 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후자인 남한에 공산주의자가 정권을 잡는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요”하며 일축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요즘 상황을 보면 당시 내 생각이 반드시 맞았던 것 같지 않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고 하지만 어쩌다가 오늘과 같이 대한민국이 위기에 처했는지 고민하면서 62년 전인 1950년 제2대 5·30총선을 되돌아볼까 한다.

건국운동 참여, 제헌의회에서 2대 총선 치러

62년 전의 상황을 현재의 시각, 현재의 잣대로 재어서는 이해하기 곤란하다. 당시 문맹률은 70%였고, 국민소득(GNP)은 35달러에 불과했다. 다시 말하면 10명 중 7명은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르는 까막눈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하는 국민소득 35달러였다.

나는 1920년생으로 해방 당시 25세였다. 고향은 강원도 철원으로 중학교는 서울에서 다녔고 대학은 일본 동경에서 다녔다. 8·15 해방은 강원도 철원에서 맞이해 짧은 시일이지만, 철원자치위원회 치안대장으로 난생 처음으로 소련군 환영 준비를 하는 등 직접 소련군을 상대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월남 후는 서북청년회를 거쳐 대한민국 건국운동에 참여했고, 정부수립 후는 윤치영 초대 내무부 장관의 비서, 제헌의회 부의장의 비서, 대한국민당의 계획부 차장을 역임하면서 우덕순 선생을 모신 바 있다.

그리고 6·25전쟁 때 유격대 대장 자격으로 비밀리에 박순천 여사(2대 국회의원)를 서울에서 만나 UN군 서울 입성 환영주비위원장의 임무를 부여받은 바도 있다. 또한 미 극동군사령부(GHQ)의 첩보부대의 한 책임자로 북한, 중공(중국)을 상대로 정보수집 활동을 4년간 한 바 있다.

이런 입장에서 내가 직접 듣고 보고 느낀 것을 가식 없이 말하면, 먼저 제2대 5·30총선 결과는 지금까지 역대 선거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참으로 엄청난 유권자의 심판을 받는 결과가 나타났다. 서울만 하더라도 국회의원 16명 중 성동갑구의 지청천(池靑天) 이외는 모조리 떨어졌다.

지금까지도 유례없는 철저한 물갈이

김도연, 홍성하, 백남훈, 윤치영, 김상돈 등이 떨어졌고 서울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능한 인재라 할 수 있는 정치인들이 모조리 떨어졌다. 서상일(徐相日), 백관수(白寬洙), 김동원(金東元), 김준연(金俊淵), 나용균(羅容均), 허정(許政), 조병옥(趙炳玉) 등이 낙선돼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이와 같이 철저하게 물갈이된 선거 결과는 제2대 5·30총선을 제외하고는 오늘날까지 수많은 선거를 치렀지만 찾아볼 수 없다.

2대 총선 결과는 대한민국이 새로 탄생한 후 제헌국회(制憲國會)를 통한 2년 간의 국정운영의 평가라고 볼 수 있는데, 초대 내각에 한민당 출신으로는 재무 장관에 김도연(金度演) 한 사람만 등용됐다. 한민당(韓國民主黨) 입장에서는 이때부터 이승만 대통령에게 배신당하고 지금까지 짝사랑했다는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범석을 국무총리 겸 국방 장관으로 겸직시킨 데 대한 반응은 한민당 뿐만 아니라 일반 여론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제헌국회에서 여러 가지 사건이 야기되고 새로 탄생한 대한민국 행정부의 2년간의 업적이 평가된 것이 5·30 선거의 결과라면 낙제점을 받았고, 여야 할 것 없이 출출맹장들이 낙방되는 것을 볼 때 진정한 민주국가에서의 민의가 얼마나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제헌의원의 중추세력이 낙방하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이들은 어떠한 세력이었는가. 5·10 총선을 단선(單選)으로 규정하고 거부하면서 평양에 갔다 온 남북협상파(조소앙), 좌로 편향된 중도파 거물들(원세훈, 윤기섭, 장건상) 등이 서울에서 당선되고 대한국민당은 대표인 윤치영이 낙선됨으로 자연 위축되어 갔다. 민국당은 영호남 지방에서 서민호, 김의준, 장홍염, 엄상섭 등 소장파 맹장들이 당선되기도 했다.

5·30 총선이 끝나고 한 달도 못 돼 김일성의 무력남침으로 6·25전쟁이 터졌다. 폭풍전야에 고요함이라고 할까 5·30 2대 총선도 끝나고 국회는 아직 개원도 안 된 상태였다. 김일성 집단은 6·25 무력남침을 은폐하기 위한 평화공세의 일환으로 평양의 고려호텔에 연금돼 있는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과 남한에 구속돼 있는 남로당의 핵심 분자인 이주하, 김삼룡과 교환하자는 김일성의 제안을 이승만 대통령은 인도적인 입장에서 이를 수락한 바 있다. 교환 날짜가 6월 26일 정오 황해도 38도상에 위치한 ‘여현’에서 교환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이것마저 거짓말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26일이면 조만식 선생을 뵙게 되겠구나 하며 기대했는데, 전날인 25일 새벽에 인민군은 대한민국을 공격해 왔다. 또 속았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5·30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 중 조소앙을 위시해 좌경 중간파인 원세훈, 윤기섭, 장건상, 안재홍 등은 피난을 안 갔는지, 못 갔는지 모르겠지만 인민군에게 납치돼 북한으로 끌려갔다. 본인이 전쟁 중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1개월간 경험한 바에 의하면 좌익은 물론이고, 친북적인 사상의 소유자인 일반 시민도 ‘내가 무슨 죄가 있어 피난가?’ 하는 생각으로 피난 갈 생각조차 하지 않은 부류가 많았다. 5·30선거에서 당선된 중간파 국회의원들도 이와 같은 생각으로 있다가 납치돼 갔을 것이다.

제헌국회의원 납북자 51명 중에는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됐던 김약수 부의장을 위시해 노일환, 김병회, 강욱중, 이문원 등 소장파가 다수 있다. 이들도 인민군이 들어오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으로 믿다가 납치돼 갔는지 모르겠다.

영웅 대접 대신 북에 끌려간 좌파 정치인들

결론적으로,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우익진영의 유능한 제헌의원이 낙선되고 대신 남북협상파를 위시해 좌경향 중간파가 대거 당선됐다. 당시는 지금과 같이 정당공천이 당락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대세론이란 용어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선거 결과가 나왔을까. 그 이유는 선거전에서 좌익에게 완패(完敗)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때의 국민(유권자)은 선거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투표율이 지금과 같이 50% 이하가 아니라 90%의 투표율을 나타냈다. 여기에 일후보자의 정보를 구전(口傳)으로 얻었다. 지난날의 좌익세력이 국민 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 이들이 전부 선거운동원 역할을 했기 때문에 결과가 그렇게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 전부터 민족진영 모임에는 20대, 30대의 젊은 층은 모이지 않았다.

대한민국에는 기적도 있었고 운도 있었다. 믿을 곳도 있었고, 믿을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둘 다 없어졌다. 다만 한 가지 믿음이 남아 있다. 대한민국 국민은 자기 손으로 자기 무덤을 파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조이다.
뉴데일리이승만연구소 이승만포럼 (3/8) 
요약/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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