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탄에 직면한 유럽사회모델
파탄에 직면한 유럽사회모델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2.05.21 14: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공(天空)의 신(神) 제우스에게는 마음에 드는 한 소녀가 있었다. 제우스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한 마리의 흰 소로 변신해 그녀를 태우고 여기 저기를 돌아다녔다. 그 소녀의 이름은 ‘유로파’(Europe)였고 그녀가 제우스와 함께 돌아다닌 지역은‘유럽’이 됐다. 하지만 최고의 신 제우스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들의 운명은 평탄치 않았다. 유로파의 DNA가 남긴 질투와 교만 때문은 아니었을까.

“프랑스 사람과 이탈리아 사람, 독일 사람, 스페인 사람, 영국 사람은 서로를 죽이는 데 수 세기를 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유럽 평화가 60년 이상 이어져온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올해 초 영국의 <가디언>지는 이탈리아 소설가이자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80)와의 인터뷰를 실었다. 최근 EU국가들의 재정위기와 유로존 해체를 둘러싸고 터져 나오는 유럽통합위기에 대한 그의 의견은 명확했다. “현재 유럽 각국의 재정위기로 유로존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되고 있지만, 유럽통합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라는 것.

에코는 유럽통합의 정당성을 ‘문화’에서 찾았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럽인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EU 시민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만 인식의 깊이는 얕다”며 “프랑스인, 영국인, 독일인들이 자기 정체성을 버리고 초국가적인 ‘유럽’의 시민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밝혔다. 에코는 그 사례로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 국민투표에서 유럽헌법 비준안이 부결된 경우를 들었다.

 

10년 전 개혁의 기회를 놓친 유럽연합

에코의 이러한 발언을 철학적, 문화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의 주장에 남유럽 이탈리아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공짜 점심’에 대한 기대를 읽는다면 지나치게 정치적인 것일까. 2005년 프랑스에서 유럽헌법이 부결됐던 배경에는 에코의 주장처럼 프랑스인들이 ‘정체성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보다는 유럽 사회 경제를 ‘평등’이라는 키워드에서 ‘자유’로 옮기려던 유럽 각국들의 ‘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거부와 ‘사회주의에 대한 집착’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즉, 2003년부터 유럽국가에 불어닥친 사회보장의 축소, 연금개혁,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 이른바 ‘영미 앵글로 섹슨’식 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이었고 ‘유럽 사회모델의 파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존심이 있었다. 2005년 5월 프랑스에서 유럽헌법이 부결된 직후 6월 3일자 월스트리트지는 이렇게 논평했다.

“실업률 10% 전후의 상태가 1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프랑스의 경제적 허약성은 정도의 차는 있지만 ‘늙은 유럽’ 전체에 공통적이다. 그 옛날 유럽과 미국의 지적 엘리트는 유럽의 복지국가의 경제적 효과를 칭찬했지만, 이 모델은 현재 고용, 부, 활성을 낳는 것으로 기능하지 않고 있다. EU의 관료주의는 유럽 대륙의 높은 세율, 팽창한 복지급여, 약자보호의 산업정책 등에 눈을 감아왔다. 가맹국 간에 실질적인 다국적 간 카르텔을 만들어냈다. 유럽은 바야흐로 이 복지국가사회주의 실험 실패의 높은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오늘 유럽의 재정 위기는 이미 10년 전에 예견돼 있었다. 2005년 EU의 유럽헌법 제정은 그러한 위기를 타개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유럽에 고착된 ‘사회주의’는 그러한 개혁을 거부해왔다. 그 결과 오늘 ‘유럽사회모델’은 파탄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제기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유럽이 이 지경에 놓이게 된 상황은 어떻게 전개됐던 것일까. 잠시 시간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2004년 3월 EU는 2010년의 경제. 사회에 관해 포괄적인 방향성을 보여준 '장기경제전략'(리스본 전략)을 내세웠다. 그것은 ▲고용전략, ▲IT유럽 행동계획, ▲유럽사회 모델이라는 3개의 기둥으로 이뤄져 있었다. 당시 EU의 새로운 경제전략은 '성장과 고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2005년 2월에 발표된 신전략은 유럽의 경쟁력 강화, 2010년까지 600만 명의 고용증대를 내걸었다. 신전략은 “지나치게 두터운 사회보장이 재정적자를 초래함과 동시에 근로 의욕을 방해하고 있다”며 “연금의 지급개시 연령을 늦춰 근로 기간을 연장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동시에 '규제완화'의 확대나, 고용제도나 사회보장제도의 '개혁'을 통해 고용증대와 높은 복지를 함께 실현할 수 있음을 천명했다.

사회주의 세력에 발목 잡힌 프랑스

이러한 EU의 ‘신전략’은 2005년 유럽헌법에 투영됐다. 역내 서비스, 노동력의 이동 자유화와 경쟁을 보호하는 ‘사회적 시장경제’원칙이 유럽헌법에 명시됐다. 여기에 강력한 반기를 든 것은 바로 유럽노련(ETUC, European Trade Union Confederation)을 필두로 하는 좌파 노조단체들이었다.

그 규모는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다. 프랑스의 경우 2003년 좌파였던 시라크 정부마저 경제개혁의 필요성을 느껴 연금과 사회보장을 축소하는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했지만 이는 프랑스 사회주의 좌파와 노동단체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프랑스의 노동조합은 같은 해 5월 구매력을 보장하는 연금수준의 확보, 60세에 전액을 받을 권리, 고용확대를 기초로 하는 연금제도의 유지 등을 공동요구로 해서 노동총동맹(CGT), 민주노동연맹(CFDT), 노동자의 힘(FO) 등 6개의 전국조직이 총파업(제네스트)에 나섰다.

전국 100개 이상의 도시에서 200만명이 참가하는 대시위가 전개됐다. 25일의 집회와 시위는 100만 명이 모여 파리를 노동자들의 시위 대열로 메웠다. 당시 프랑스의 레귤라시옹('조정'이라는 의미)파의 주요 인물의 한 사람인 로베르 부아예(Robert Boyer)가 “자본주의나 민주주의는 지역에 고유한 토양 위에서 개화한다”며, 미국을 “청교도 등 본국에서 쫓겨 온 사람들이 원주민을 몰살시킨 터에 수립한 특이한 자본주의”라고 비난했던 사실은 유명하다.

 

독일이 튼튼한 이유, 자유주의 개혁

당시 독일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03년 3월 독일 사민당(SPD) 슈뢰더 정부가 세운 ‘아젠다 2010’은 독일 경제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중장기적 개혁프로그램이었다. 아젠다 2010은 2003년 4월 독일 정부의 자문위원회가 ‘국가가 해야 할 것을 줄이고 개인의 자기책임과 자조 노력을 촉진’하는 ‘사회복지국가의 재건’안이었다.

핵심 내용은 사회보장제도나 고용관행, 산업별 노동조합의 사회적 규제력의 일부 제한 등이 포함돼 있었다. 즉, 연금수령 개시연령의 현행 65세로부터 67세로의 인상, 19.5%의 보험료율의 2030년 22%로의 단계적 인상, 의료보험에 대한 진료 받을 때의 정액 부담제 도입, 실업 급여 기간인 2년8개월을 55세 미만은 12개월, 55세 이상 18개월로의 단축, 종업원 5인 이하(법안 성립 시 10인 이하)의 소기업의 해고 규제의 완화, 산업별 임금협정의 약소기업에 대한 적용 배제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러한 ‘아젠다 2010’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흔히 ‘독일병’이라는 독일 경제의 사회주의적 문제점이 있었다. 당시 독일의 경제성장률은 유럽 연평균 경제성장률에 미치지 못했다. 2004년 EU집행위원회에 의하면 독일 경제 침체의 2/3가량은 통일 후유증에서 비롯됐다. 높은 조세부담으로 인해 국민들의 실질 가처분소득은 떨어졌고 통일 이후 구 동독 지역의 재정지원과 경제회복을 위한 막대한 통일비용으로 재정은 끝없이 악화됐다.

여기에 독일 연방은행의 화폐가치 안정을 위한 디플레이션 정책으로 인한 고이자율 정책은 결국 투자와 고용부분에 심각한 악영향을 줬다. 그 결과 실업률 이전의 완전고용 수준에서 2003년 말 약 10%로 치솟았지만 경직된 노동시장으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시 ‘아젠다 2010’을 통해 독일 경제 개혁을 추진하려던 슈뢰더 정부 역시 노조와 좌파 사회주의 단체들의 공세에 시달렸다.

그러나 독일 노조는 프랑스 노조의 투쟁과는 달리 사회적 타협을 도모했다. 독일노동총동맹(DGB)은 정부가 빚을 늘려서라도 경기회복을 우선할 것, 자산세의 도입이나 상속세의 과세 강화 등의 정책을 놓고 슈뢰더나 사민당과의 대화에 의한 온건적 해결을 꾀했다. 그 결과 12월 초 정부는 현안인 '구조개혁법'을 각의에서 의결하게 된다.

지난 10년간 독일 국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그러한 노사정 타협에 의한 긴축과 자유주의 개혁을 감내해 왔다. 그 결과 독일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비해 건전한 재정과 강한 경제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한 독일이 유로존 문제로 그리스나 이탈리아와 같은 모럴 해저드 경제를 부양해야 한다는 사실은 독일 국민들로서는 참을 수 없는 불만임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국민들은 독일에 대한 불평을 감추지 않고 있다. 한 사례로 연일 독일에 대한 날선 비판을 담은 만화로 최근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그리스의 유명 풍자 만화가 스타티스 스타브로폴로스는 최근 BBC에 "독일은 전 유럽을 독일로 만들기 위한 시도를 두 차례 했다. 이번에는 경제적 수단을 이용하고 있다.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독일인들에게 악감정은 없으며 독일 정부와 유럽 은행들에 대한 반감이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달 "남유럽 전역에서 '추한 독일인' 이미지가 되살아나고 있다"며 "다른 국가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정부를 무너뜨렸으며 온갖 일에 개입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난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같은 기회를 가지고도 개혁을 선택한 독일과 그렇지 못했던 그리스와 이탈리아가 자기 선택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책임을 회피하는 현상은 아이러니하다. 그렇다면 영국은 어떨까.

영국은 문제아가 아니라 현명했다

EU에서 영국은 흔히 ‘문제아’라고 불린다. 유로존 가입도 거부했지만 유럽의 탄소거래제도에도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영국은 대륙의 유럽과는 달리 자신의 독자적 길을 추구해 왔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유로존과 탄소거래제 등이 모두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영국은 일찍이 자유주의 개혁을 추구했던 경험이 있다. 영국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정부처럼 사회주의 노조와 타협 대신 강경한 투쟁을 선택했다. 철의 여인 대처 정권이 시작한 노동조합 투쟁은 유럽 어느 국가보다 철저했다.

1970년대 말 노동조합의 임금투쟁은 기업 이윤을 크게 침식해 영국 자본주의의 쇠퇴에 한층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른바 ‘영국병’이었다. 대처는 이러한 노동조합의 힘을 꺾지 않고서는 영국 경제를 부흥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위해 노사관계법을 개정했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은 당시 집행부의 지령 하나로 파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의 관리 하에서 파업권 투표가 의무화됐다. 석탄과 석유, 통신, 항공 등의 국영기업은 차례로 민영화 됐다. 이로 인해 산업판도가 크게 바뀌었다.

가장 중요한 개혁이 쇠퇴한 금융에서 이뤄졌다. 대처 정권 시대의 영국은 금융거래의 대담한 '규제완화'에 나섰고, 그 결과 런던 주식거래소는 뉴욕에 이어 제2의 금융 중심지가 됐다. 노동조합 개혁과 산업구조의 전환이라고 하는 이중의 타격을 받고, 영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급감했다. 1980년대 중반의 탄광노조에 의한 1년에 걸친 폐광반대 파업의 패배가 노조의 명암을 갈랐다. 1970년대에는 70%를 넘는 조직률을 자랑하던 영국노동조합회의(TUC)는 2005년에는 40%대를 하회하는 데까지 쇠약해졌다.

평등의 유럽사회 모델은 끝났다

유럽국가들의 사회모델에는 근본적으로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개의 가치가 개입하고 있다. 그것은 유럽이 과거 절대왕정과 투쟁하면서 습득한 근대적 가치의 전통이다. 하지만 유럽의 평등적 가치는 법 앞에 평등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가치로서의 평등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20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과 이에 영향을 받은 복지국가의 이념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유럽국가들의 평등은 그 본질에서 포퓰리즘을 띠고 있게 마련이다. 지난 2003년에서 2005년까지 있었던 유럽국가들의 자유주의 개혁은 이 포퓰리즘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으나 실패했다. 그 결과는 EU의 미래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다. 그리스 공산당은 유로존을 탈퇴해서 그리스를 사회주의국가로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는 독일에 대해 과거 나치제국의 악몽을 떠 올리고 있다. 희한하게도 이 모든 원인이 다름 아닌 유럽의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세력에 의해 초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 통합을 지지하는 움베르토 에코는 그러한 사실을 에둘러 ‘문화’로 이야기한다. 정말로 공포에 질린 자는 유럽통합으로 정체성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독일, 프랑스 인들이 아니라 바로 ‘공짜 점심’이 날아가고 내전으로 또 다시 살육이 전개될 것을 두려워하는 이 천재적인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가 아닐까.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