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평화의 허상
유럽 평화의 허상
  • 이춘근 박사
  • 승인 2012.05.21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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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대륙은 전쟁의 대륙이었다. 그 이유는 근세 이후 강대국들이 유럽이라는 별로 넓지 않는 지역에 몰려 있었다는 지정학적 특징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강대국들이 다닥다닥 몰려 있는 지역은 전쟁의 지대가 되기 십상이다. 20세기가 시작되기 이전 유럽은 길고도 처참한 전쟁의 주무대였다. 100년 전쟁, 30년 전쟁 등 이름만 들어도 가히 그 장구함을 짐작할 수 있는 전쟁들이 즐비했다. 비스마르크의 독일통일전쟁, 나폴레옹의 유럽패권 장악을 위한 대 전쟁 등은 현대가 시작되기 이전의 전쟁들이다.

유럽 국가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다 지치자 이제는 세계를 향해 진출했다. 19세기가 시작된 이후 유럽 강대국들은 아시아, 아프리카로 식민지를 확대, 지구 역사상 제국주의의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를 개막했다. 20세기 이후에도 유럽은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전쟁의 규모가 너무 커서 ‘세계대전’이라고 부르는 전쟁을 두 번이나 일으켰다.

극심한 전쟁과 갈등으로 점철된 유럽이 21세기인 지금 평화의 대륙으로 탈바꿈했다. 유럽의 평화에 감동 받은 사람들은 이제 유럽에서 전쟁은 영원히 소멸했다고 말한다. 오랜 세월 전쟁으로 날을 지새우던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그리고 오토만 제국의 후예들은 현재 어느 측면에서 보더라도 도무지 전쟁을 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바다의 패자였던 영국이 영국 해군을 상징하던 각종 군함들을 인도에 매각하고 있으며 프랑스는 러시아에 항공모함까지 팔고 있는 상황이다. 유럽 국가들의 국내정치에서 국방문제가 이슈가 된다는 소리도 들어본 지 오래다. 가히 유럽은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로버트 케이건(Robert Kagan)은 이 같은 현상을 보고 유럽을 낙원(Paradise), 자신의 조국 미국은 아직도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에 비유했다. [Robert Kagan, Of Paradise and Power: America and Europe in the New World Order, 2004.] 유럽도 한때는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권력의 세계였지만 이제 유럽 사람들은 낙원과 같은 곳에서 살게 됐다는 말이다.

유럽은 좁은 지역에 강대국이 몰려 전쟁이 자주 일어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옥과 같았던 전쟁의 대륙 유럽이 낙원과 같은 평화의 대륙으로 변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유럽 사람들과 나라들이 과거 잔인했던 역사의 교훈을 절감하고, 국가 간의 갈등은 결코 전쟁이라는 수단에 호소할 수 없다고 각성한 결과일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는다. 이제 유럽 사람들과 그들의 국가는 다시 전쟁을 일으킬 나라와 국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국가의 본질이 변했기 때문에 유럽에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라는 설명은 상식적이기는 하지만 지적(知的)이지 못하고 분석적이지도 못하다. 유럽 국가들과 유럽 사람들의 마음이 변해서 전쟁을 하지 않는 유럽이 됐다면 왜 아직도 독일에 5만 명이 넘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는 지금도 각각 세계 3-7 위의 막강한 군사비를 쓰는 나라로 남아 있는 것인가? 전쟁을 할 수 있는 DNA가 소멸된 유럽이라면 군사비를 그 정도로 쓸 필요도 없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

유럽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본질적인 이유가 바로 ‘전통적인 힘의 논리’ 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하나의 패권국에 의해 전체 유럽이 지배당한 적은 없었다. 힘이 비슷한 강대국들이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위해 수시로 전쟁을 벌였고, 때때로 갑자기 힘이 증강된 강대국 하나가 출현해 전 유럽을 장악하겠다는 패권 야욕을 드러내 보일 경우, 다른 강대국들이 힘을 합쳐 이를 제압하곤 했던 것이 유럽 전쟁사의 뚜렷한 패턴이다.

1945년 2차 대전 종식 이후 유럽 대륙이 평화를 지속하고 있는 이유는 유럽이 패권국인 미국에 의해 평화의 질서를 보장 받고 있기 때문이다. 냉전이 종식된 후에도 미국은 유럽에 남아서 사실상 유럽의 패권국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만약 미국이 유럽 주둔 미군을 철수 시키고 유럽의 안보에서 손을 뗄 경우에도 유럽은 지금과 같은 평화 상태를 유지 할 수 있을 것인가?

제3세대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최고 권위인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는 미국이 유럽의 안보 문제에서 손을 떼는 그 순간 유럽은 곧바로 2차 대전 이전의 유럽으로 되돌아 갈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미어샤이머 교수의 논리는 독일이 통일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영국, 프랑스 등이 보였던 행태에서 노골적으로 증명됐다.

독일을 통일시키려는 미국의 의도를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한 영국의 대처 총리는 구 소련으로 날아가 “군사력을 사용하는 일이 있더라도 독일의 통일은 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불행히도 몰락한 소련은 그럴 힘이 없었다. 프랑스 역시 독일의 통일을 극렬히 반대했고 프랑스의 지성 자크 아탈리는 독일이 통일을 이룩한다면 자기는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가서 살겠다”고 극언했다.

지금의 유럽 평화는 미국이 패권국가 역할을 하기 때문

독일의 분단은 언제라도 힘이 막강해질 수 있으며 그럴 때마다 전쟁을 일으키는 독일이라는 강대국을 영원히 소멸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니 영국, 프랑스가 독일의 통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미국에 통일시켜달라고 간곡히 요청했고 미국은 조건부로 통일을 승인했다. 미국이 제시한 통일독일의 조건은 통일독일은 군사 강대국이 되지 않으며, 북대서양 조약에서 탈퇴하지 않으며, 미국의 지배(통일독일에 미군이 주둔함)를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독일인들이 ‘무서운 독일’을 추구하지 않으며, 미국이 그렇게 될 수 없는 안전장치를 제공함으로써, 백년 이상 우환이었던 소위 ‘중부 유럽’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만약 미국이 의도적으로 유럽에서 손을 뗀다면 혹은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미국의 힘이 쇠락해 유럽의 안정을 지킬 능력이 없게 된다면 그때도 유럽은 지금처럼 평화로울까? 그런 날이 왔을 때 경제력으로는 영국, 프랑스와 상대도 안 될 정도로 막강한 독일이 군사적으로는 ‘피그미’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아닐 것’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지금 유럽인들이 향유하는 평화는 사상누각이요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허구요 허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춘근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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