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을 연구하면 정치가 보인다
'제왕’을 연구하면 정치가 보인다
  • 미래한국
  • 승인 2012.06.12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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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제왕학> 출판한 김유혁 단국대 명예교수

와세다대 도시학박사로 지역개발, 도시학을 전공하며 새마을운동에 초기부터 관여, 성공시키는 데 기여해 새마을운동중앙회장을 역임한 김유혁 단국대 명예교수. 1997년 정년퇴임 후 전공과 무관한 ‘제왕학’ 분야를 개척했다.

현역 교수 시절 대학 강단에서의 후학 양성을 무색케 할 정도로 국제외교안보포럼에서 매주 목요일 12년 동안 꾸준히 열의를 다해 조찬 강좌를 해왔다. 최근 4년 동안 강연록을 묶어 모두 3권으로 된 <제왕학>을 출판했다. 실버세대 제2인생 개척의 모범이기도 한 김유혁 교수를 만났다.

 

- <제왕학>을 연구하신 동기는 어떤 것입니까.

함께 정년 퇴임한 동료들이 자기 전공에 집착해 이를 활용하지 못하고 소외감을 갖는 것을 봤습니다. 오히려 정년 퇴임은 자기 전공을 토대로 폭넓고 자유스럽게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죠. 저는 어려서 한학을 한 기반도 있었고 평소 퇴계, 율곡과 실학파 등 역사 인물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 사회적으로 리더십에 대한 관심이 많았죠. 여기에 착안해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양의 인물상을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박혁거세 이후 순종까지 216명의 제왕이 있습니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을 보니 시대상이 정치를 중심으로 이뤄졌고 그 중심에 제왕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죠. 제왕의 퍼스낼리티를 찾으면 당시 사회상을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5천년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역사적으로는 대등합니다. 불행히 고조선에 관한 것은 기록이 없어 설화로 이해하는 수준이죠. 부족하지만 삼국시대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는 충분합니다. 조선왕조실록 45권이라는 것은 엄청난 양입니다. 기록이 없어서 공부 못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기록만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韓中日 역사자료 찾아 인물 중심으로 연구

- 구체적으로 제왕학을 어떤 방법으로 연구하시는지요.

사료를 찾아 인물을 중심으로 시대를 보는 거죠. 우리나라는 216명의 왕이 6개 왕조를 이뤄 왔습니다. 중국의 경우 진시황부터 청나라 부의 황제까지 350명이지만 왕조는 많았어요. 춘추시대에는 5명의 패왕이 순차적으로 통치했고 그후 전국시대에는 7명의 영웅이 각축을 벌였죠.

이후 진나라에 의해 통일되고 다시 유방의 한나라로 나라의 기초를 잡게 됩니다. 이어 당나라 때 문화적 기초를 닦고 그후 5대에 걸쳐 10개 나라가 싸운 5대10국시대, 이 틈에서 일어난 송나라가 헤게모니를 잡습니다.

이와 같이 중국은 국토가 넓어 우리의 삼국시대와 비교 안 될 만큼 싸움이 많고 왕조의 변화가 많았어요. 사마광의 <자치통감> 294권은 중국 역사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록입니다. 일본은 신무천황부터 125명의 왕이 있습니다. 한.중.일은 역사적 무게가 있는 나라입니다. 이 3개국 사료를 입수 가능한 범위에서 연구하니 재미 있고 시작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 국제외교안보포럼 강좌는 언제 어떤 취지로 하게 되셨는지요.

제왕학 연구를 하던 중 2000년 9월 정계, 학계, 법조계 등의 인사들이 당시의 정치, 남북관계, 월드컵 개최 등 국가적 중대사가 많던 상황에서 바른 정책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데 공감해 국제외교안보포럼을 출범시켰습니다.

두 가지를 목표로 정했어요. 첫째, 역사적인 시각에서 제왕이라는 중심 인물의 흥망과 둘째, 남북한, 한미, 한일 등 국제관계에 관한 시사토론을 하는 것이죠. 핵문제, 한일관계, 동북공정 등의 시사문제는 한 사람이 다 알 수 없어 매주 전문가를 물색해 강좌를 듣고 있습니다. 제왕학은 제가 맡아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소재가 많았지만 100회쯤 지나가니 소재가 궁해져 다시 열심히 자료를 찾아 공부하고 있어요.

- 역사를 공부하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고위금용(古爲今用) 즉, 옛 것은 현재를 위해 쓰이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를 단순히 역사로 보는 것은 가치가 없어요. 역사를 현실 이해와 문제 해결에 활용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최근 어느 종단의 스님들이 술, 도박을 해서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중생을 계도한다고 합니다.

일반 신도나 시민들이 그들의 얘기를 어떻게 믿을까요. 저는 과거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아 과거의 판단 기록을 오늘에 적용합니다. 스님이 하는 말씀을 법어(法語)라고 합니다. 또 아주 차원 높은 선문답(禪問答)이 있습니다. 옛날에 비도덕적인 일부 승려들이 과연 선문답으로 대중을 깨우칠 수 있는가, 과거의 사례에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찾아내 보이면 그들이 잘못됐고 스님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제왕에게는 고도의 도덕성이 요구돼

- 이번에 3권의 책으로 출판하셨는데

12년 동안 매주 목요일 495회의 강연을 준비하기 위해 대학 강단에 서는 것 이상의 신경을 썼습니다. 강연 후 원고를 다듬어 목요일 밤이나 금요일에 300여곳에 이메일을 보냅니다. 받은 사람 중에는 자기 지인들에게 보내는데 제 강연록을 보는 사람이 파악된 것만 2천명이 넘습니다. 어떤 경우는 사전 승인도 안받고 직원교육용으로 100~ 200부씩 책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또 문화저널21이라는 인터넷신문에서 매주 띄워 포털로 나가 검색이 많이 됩니다.

건국 60주년 되던 해 ‘한국의 회갑과 진갑’이라는 내용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에게 건국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내용을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하루 평균 8만~9만건이 조회되고 28만건을 넘어 한 달간 톱기사가 됐어요. 재미 없고 어렵고 한문 얘기도 많아 잘 안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의외였습니다.

어느 전직 대법관은 메일이 제때 안오면 재촉하는 전화를 하기도 합니다. 몇 군데서 이 글들을 모아 책으로 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어요. 특히 장충식 단국대 명예총장이 열심히 보고 정치권, 행정부 관료들이 읽어야 할 내용이라며 자비를 들여 출판을 해줬습니다.

- 제왕론을 간단히 설명해주신다면

일반적으로 제왕을 절대 권력자라고 합니다. 흔히 제왕적 통치라고 말하면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제왕의 도덕적인 모습을 보지 못해서 그렇죠. 황제, 제왕, 왕이라는 용어는 엄격한 개념의 구분이 있습니다.

황(皇)은 명일자(明一者), 제(帝)는 찰도자(察道者), 왕(王)은 통덕자(通德者)입니다. 명일(明一)은 우주의 형성 발전 원리와 자연의 운행법칙을 깨닫는 것이고, 찰도(察道)는 천도와 인륜의 본질을 깨닫는 것, 통덕(通德)은 덕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최고지도자에게는 고도의 도덕성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지마을 1년만에 우수마을로 개발, 새마을운동 성공 촉진 계기

- 제왕학적인 면에서 이승만 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을 평하신다면


이승만 대통령이 이룬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동맹 등의 업적은 정치라는 수단으로 거둬들인 결과적인 것입니다. 그의 내면을 보기 위해 옥중 생활하면서 쓴 팔조시(八條詩)를 보면 그의 정치철학이 다 들어 있습니다.

내치를 위한 외교의 필요성, 정치적 사안은 경륜이 있는 이들과 미리 의논해야 한다, 개혁을 한답시고 옛것을 부수지 않으면서도 혁신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인재 양성의 시급함과 국방경비에 알맞은 국군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 등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바탕에서 훌륭한 정책이 나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파라고 얘기하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만주 벌판에서 독립군과 싸웠다고 하지만 고증을 해보면 이것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일제 때 수학여행 가서 나라를 잃은 애통한 마음을 쓴 글도 있어요.

한때 좌익이었다는 문제도 당시 머리 좋고 책을 많이 읽은 사람 대다수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경제 건설의 공로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국가 발전을 위한 집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평가해야 합니다.

- 새마을운동에도 일찍이 관여하셨는데

대학에 있을 때 농촌봉사활동을 많이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내무부에서 새마을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총리를 역임한 고건 당시 새마을담당관에게 자료를 받아보니 새마을운동이 제가 하고 있던 지역사회개발과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이에 대학새마을운동이라는 안을 만들게 됐습니다. 당시 단국대 재학생의 62%가 농촌 출신이었죠. 어느 대학이나 농촌 출신이 비슷한 분포였습니다. 농촌의 등록금으로 대학이 발전했으니 이제는 대학이 농촌을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취지로 대학 새마을운동을 했습니다. 지역사회운동은 주민의 뜻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거기에 합당해야 하고 정신 개혁, 환경 개선, 소득 증대가 고려돼야 합니다.

당시 137개군의 60% 이상이 새마을운동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지도자 선출의 어려움, 자체 소득자원의 부족, 협동이 안 되는 풍토 등이 원인이었죠. 이를 타개하는 차원에서 1973년 당시 가장 낙후된 지역인 충남 청양군 대치면 장곡마을을 선정해 1년 동안 개발했습니다. 하천부지 6만평을 평당 19원에 불하받고 인근 야산 20만평을 평당 400원에 매입했어요. 산을 깎아 하천부지를 메우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기름진 토지로 만들었습니다.

주민들에게는 저녁마다 교양교육을 하며 잘 살 수 있다는 의지를 고취했습니다. 1년만에 17개 우수마을 중의 하나로 선정됐죠. 청와대, 내무부와 다른 지역에서 견학 가는 코스가 됐어요. 이를 계기로 다른 곳에서도 새마을운동이 활성화됐습니다.

강시영 기자 ksiyeong@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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