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위해 전설이 된 학도병들
조국 위해 전설이 된 학도병들
  • 미래한국
  • 승인 2012.06.21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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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 강조, 서울高 출신 가장 많아

전시도 아닌 요즘, 갖가지 이유를 대며 병역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6·25 전쟁 때 서울에서만 매일 3,000~5,000명이 입대했다. 그 중에는 학도병들도 많았다. 6·25 전쟁은 18세 이상이어야 참전이 가능하다는 규정이 있었다. 하지만 전시에 어린 학생들은 나이를 속이면서 까지 참전하여 나라를 지켰다.

6·25 전쟁 때 서울시내 중고교 가운데 가장 전사자가 가장 많은 학교는 서울고로 32명이 한국 전쟁에서 산화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서울고 학생은 453명이었다. 이는 1회부터 6회 학생의 38%에 해당하는 수치다. 특히 3회의 경우 169명의 졸업생 중 117명이 전쟁에 나가 69% 참전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다.

이는 동서고금 어떤 전쟁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서울고등학교는 당시 6년제 서울중학교의 4, 5, 6학년에 해당한다. 참전한 453명 가운데 서울중학교 3학년생이 15명 포함돼 있다. 겨우 열대여섯 살에 전쟁에 나갔다는 뜻이다.

 

3회 169명 졸업생 중 117명 참전

이러한 생생한 상황은 서울고총동창회가 발간한 ‘서울고 동문 6·25전쟁 참전 60주년 기념문집’ <경희궁의 영웅들>에 잘 기록돼 있다.
서울고 학생들이 참전을 많이 한 이유는 김일성의 폭정을 피해 월남한 학생들이 서울고에 많이 편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례로 2회 졸업생 195명 가운데 100명이 이북에서 피난 온 학생이었다. 광복 이후 공산주의자들의 공작과 선동으로 동맹휴학하는 고등학교가 많았으나 서울고는 단 한 번도 그런 사태가 없었다. 공산주의의 실상을 이미 목도한 이북 출신 학생들의 반공사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또한 졸업생들은 초대 교장인 김원규 선생이 조회 때마다 영국의 지도자를 배출한 요람인 이튼 하이스쿨과 최현대식 교육시스템을 갖춘 육군사관학교를 소개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했기 때문으로 짐작한다. 그 결과 서울고는 초창기에 매년 육군사관학교에 10여명 이상씩 진학했고, 13회까지 32명의 장군을 배출했다.

당시 서울고 학생들은 나라의 부름을 받은 경우, 자원입대한 경우, 거리에서 바로 끌려간 경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그중에서도 서울에 숨어 있다가 9·28 수복 이후 자진 입대한 경우가 많았다. 전세가 완전히 바뀐 상황이라 힘을 보태면 전쟁이 빨리 끝날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인민군이 점령했을 때 학생이 선생을 구타하는 등 패륜이 이어지는 걸 보고 입대한 학생들도 있었다.

전쟁에 참여한 방식이 각기 달랐던 만큼 전쟁에서 귀환한 방식도 개개인마다 달랐다. 전사해서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학생이 32명이었고, 전쟁 중에 18세 이하는 귀가하라는 지시를 받고 집으로 돌아온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인민군이나 중공군에 끌려갔다가 포로교환 때 풀려난 학생들도 부지기수였다.

당시 물자가 부족한 데다 식량보급까지 잘 안 돼 한창 나이에 주먹밥 하나로 하루를 견뎌야 할 때가 많았다. 미군들을 만나 보급품을 지원받는 날이 다름 아닌 잔칫날이었다. 인민군이나 중공군도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가까스로 살아서 돌아온 학도병들의 증언에 의하면 인민군이라지만 북에서 온 군인은 한두 명 뿐이고 대부분 남쪽에서 끌려온 의용군이었다고 한다. 총 없는 군인이 태반이고 식사공급도 잘 안 됐다. 한 겨울에 인민군과 중공군들은 속옷 없이 겉옷만 걸치고 덜덜 떨기 일쑤였다.

인민군이나 중공군 중에도 소년병이 많아 때로 이들이 우리 학도병들이 탈출하는 걸 눈감아 주거나 길을 알려주기도 했다.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이유도 모르고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로 인한 인명피해는 실로 엄청났다.

영양실조로 병에 걸려 죽기도

중공군에게 포위돼 포로가 됐다가 2주 만에 탈출해 천신만고 끝에 대구 포병사령부로 돌아온 서울고 5회 최대기 씨는 자신이 이름 밑에 ‘사망, 행방불명’이라 적혀 있는 걸 발견했다. 눈물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가족들과 재회한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쓰러져 마산 제2육군병원에 입원했다. 병명은 영양실조였다. 최대기 씨는 “당시 팔다리 절단자, 총상자 등 외과환자가 너무 많이 이송돼 내과 환자들을 의병제대 시키기도 했는데 만 17세 미만의 학도자원병은 복교시키라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제대했다”고 증언했다.

3회 김봉태 씨는 중공군에게 잡혀 포로가 돼 평안북도 철산의 광산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중노동과 영양실조에 시달렸는데 대부분의 국군포로들이 비타민A 결핍으로 야맹증에 걸려 밤이면 눈뜬 장님처럼 지냈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포로들끼리 다툼이 일어나고, 인플루엔자로 수많은 전우가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봉태 씨도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포로교환 때 구사일생으로 자유의 품으로 돌아왔다. 김봉태 씨는 “많은 전우들이 포로교환에서 고의적으로 누락됐다”고 증언했다.

서울고 참전자 중에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부상당해 아직도 후유증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4회 김철수 씨는 중공군 82㎜ 박격포탄에 맞아 양손을 크게 다쳐 수십 년간 병원에서 보냈다. 몸 안에 12개의 파편을 지니고 사는 그는 2008년에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가장 큰 피해자인 4회 목진홍 씨는 관측장교로 수많은 공적을 쌓았으나 망원경으로 조준해서 쏜 중공군의 포탄에 맞아 60년을 병상에서 보내고 있다. 극심한 언어장애, 기억력 쇠퇴, 뇌퇴행성 파킨슨씨병,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 겹쳐 고통받고 있다.

12개 파편 맞고 수십년 병원 생활

6·25 당시 군인들의 학력이 매우 낮았다. 자기 이름을 쓸 줄 모르는 군인이 즐비했을 정도이다. 3회 채규동 씨는 “전우 200명 가운데 초등학교 졸업자가 20명도 채 안 되는 실정이어서 암호교육에도 애를 먹을 정도로 문맹자 부하가 많았다”고 증언했다. 실력 좋은 서울고 학생들은 어리지만 전장에서 톡톡히 한몫을 해냈다.

맨몸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던 소년병들은 어느덧 70대 후반과 80대 중반의 나이가 됐다. 6·25에 참전한 서울고 학도병 가운데 제대 이후 별세한 사람이 110명이 넘는다. 소년병들은 여전히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과 종북론자가 버젓이 국회에 입성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이 6·25 전쟁을 잘 모르는 현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경희궁의 영웅들>의 소년병들은 하루아침에 가족들과 이별하고, 바로 옆에서 동료가 사망하고, 포로가 돼 미래를 점칠 수 없는 깜깜한 현실에 처하는 등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과정을 거쳤다. 청춘과 친구를 잃고 감내하기 힘든 삶의 굴곡을 거쳤지만 용맹했던 학도병들은 조국을 지켰다는 자긍심으로 오늘을 산다.

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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