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기대보다는 힘의 우위가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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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2.08.02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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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 1994'!

북한문제와 관련해 광범한 동의를 얻고 있는 믿음이 하나 있다. 북한의 개혁개방에 대한 것인데, 그것은 좋은 것이며 또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이 같은 발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당파를 초월해 지지를 얻고 있는 양상이었다.

역대 정권은 어떻든 늘 북한에 대해 대화를 촉구했으며 김영삼 정권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권고하는 게 공식입장이었다. 때문에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도 일종의 알리바이를 제공받고 있었다. 햇볕정책의 대북포용론은 그간의 대화를 통한 긴장완화정책을 더욱 구체화시킨 것이라고 내세웠던 것이다.

햇볕정책의 알리바이

물론 햇볕론자들은 그렇게 알리바이에만 기댄 것이 아니라 차별화도 분명히 했다. 이전 정권들의 대북강경책이 북한을 변화시키는 데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모함이었다. 냉정하게 평가해 역대 어느 정권도 북한에 대해 본질적인 의미에서 대북강경책을 기본으로 하지 못한 게 현실이었다.

오히려 강경책을 쓰며 긴장을 고조시킨 쪽은 언제나 북한이었다. 북한은 그러면서 그 특유의 덮어씌우기 논리로 항상 미국과 남한이 자신을 적대시하고 도발해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전 정권의 대북강경책의 한계를 운운한 햇볕정책의 논리는 결국 북한의 주장을 대변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의도했든 아니든 결과적으로 이적(利敵)의 논리였다.

햇볕론자들은 당연히 그런 혐의를 부인했다. 햇볕정책은 북한이 더 이상 대남 적대정책을 계속할 수 없도록 변화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북한의 이빨과 발톱을 제거하려는 것이라는 얘긴데, 그렇다면 이것은 북한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 아닌가? 하지만 북한에 대해선 또 다른 논리가 있었다. 북한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가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교묘한 줄타기였지만 결과적으로 햇볕정책에 당하게 된 쪽은 남한이었다. 북한은 퍼주기의 과실을 기꺼이 따먹어 챙길 수 있는 실리는 다 챙겼다. 숨넘어가는 위기를 넘겼고 돈을 챙겼고 무엇보다도 시간을 벌었다. 그러면서 북한은 대남 적대정책에는 어떤 변화도 없이, 더 큰 위협 수단만 확실하게 손에 넣었다. 핵이었다. 이건 북한의 입장에선 속된 말로 대박이었고 남한의 입장에선 반대로 재앙이었다.

만약 애초부터 적을 위해 봉사할 의도가 아니라면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었다. 그 어느 쪽도 아니라면 다른 한 가지로는 쓸 만했다. ‘햇볕’이라는 조어는 경박하게 남발되기 일쑤인 노벨평화상을 겨냥한 정치적 수사로는 꽤 그럴 듯했고, 이 용어의 저작자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그가 즐거워한 대가로 이 나라가 얻게 된 것은 더 큰 위험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속임수가 통하게 된 게 ‘햇볕론’ 주창 당사자나 그 주변 친북 세력의 농간 탓만은 아니었다. 개혁개방으로 바람직한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기대 자체가 근본적인 문제였다. 이런 분위기는 김영삼 정권 시절부터 특히 팽배해졌는데, 평화적 방법에 의한 변화 즉 화평연변(和平演變)에 대한 일종의 기대심리였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매우 천진한 생각이었다. 우선 북한이 소련 동구처럼 몰락의 길을 얌전히 걸어가 줄 것으로 믿는 것부터가 상대를 너무 얕보는 것이었다. 경험적 교훈이 존재하는데 그대로 반복할 바보가 어디 있는가? 더 큰 문제는 중국식 개혁개방이라도 좋다는 발상인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었다.

개혁개방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금물

1989년 6월 4일 천안문 사태 당시 등소평은 시위 군중을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해 무력으로 강제 진압했다. 당시 미국과 서방은 강한 유감을 표하고 정치개혁을 촉구했다.

그러나 등소평은 서방의 그런 요구는 화평연변으로 중국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라고 일축했다. 그리고 공산당 일당지배체제를 정책을 계속 고수했다. 그럼에도 미국과 서방은 어떻든 중국이 시장경제질서에 편입돼 들어온 것 자체를 큰 성과로 받아들였다. 중국이 그에 익숙해지는 그만큼 순치될 것으로 낙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현재, 중국은 그런 기대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훌쩍 커진 경제적 힘을 바탕으로 패권주의적 야심을 노골화하고 미국에 대해서도 대립각을 주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중국식 개혁개방정책을 안정적으로 추진해나갈 수 있도록 보장했을 때의 결과는 과연 어떨 것인가? 현재의 중국이 보여주는 모습과 다를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을 것인가? 등소평 이래 중국은 기회만 있으면 서방의 화평연변의 음모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북한도 처음에는 김대중의 햇볕정책에 대해 똑같이 화평연변의 술수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중국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적 개혁개방이 그 자체로 곧바로 화평연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외부에서 집적대는 수준인 햇볕정책의 한계는 말할 것도 없다.

정치적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중국식 개혁개방은 북한에는 좋을 수 있어도 우리에게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그런 식의 경제적 힘의 축적은 오히려 더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주변국들과 갈등을 빚고 미국에 대드는 중국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미국의 냉전의 승리는 결국 봉쇄정책 덕분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가던 무렵만 해도 미국의 루즈벨트는 소련과의 직접적 대립구도를 생각지는 않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미국은 유럽으로부터 물러나 소련과 서유럽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취하면서 ‘Divide and Rule’(분할통치)을 구사하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었다. 루즈벨트를 승계한 트루먼도 잠깐 동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런던과 모스크바가 영향력 확대를 경쟁적으로 추구하는 가운데 미국은 한옆에서 ‘공정한 심판’ 역할을 담당하는 식의 세계경영”(로버트 케이건)이 기본 발상이었다. 사실 이것은 미국의 전통적인 고립주의적인 대유럽 외교 전략에 비추어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기왕에 주어진 영향력 유지를 마다하지는 않겠지만 굳이 유럽에 깊숙이 발을 담가 전면적으로 총대를 멜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1946년 2월 미 국무부로 타전된 한 통의 전문를 계기로 미국은 완전히 다른 전략을 수립하게 된다. 8천 단어에 이르는 장문의 전보였는데 소련에 대한 봉쇄를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 제안을 수용, 이듬해인 1947년 3월 공산주의 확산의 저지를 위한 군사경제원조 원칙을 천명하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대소봉쇄정책의 시작이었다.

곧이어 그해 6월 마셜플랜이 발표됐다. 한 달 뒤인 1947년 7월 이 정책들의 원칙과 배경을 설명하는 한편의 논문이 <포린 어페어(Foreign Affairs)>에 실렸다. 논문 제목은 ‘소련의 행위의 근원(The Sources of Soviet Conduct)’이었는데 ‘Mr. X’라는 익명의 필자 명의였다.

Mr. X는 이 논문에서 “소련은 팽창의 욕구와 대외적인 적개심을 가졌기 때문에 미국은 그것을 봉쇄하고 그 내부 변화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논문은 사실 1946년 2월 미 국무부로 타전된 전통문을 보충 부연한 것이었다. 그 익명의 주인공은 당시 소련 주재 참사관으로 근무하던 조지 케넌이었다.

조지 케넌이 제안하고 수립한 대소봉쇄정책은 베트남 전쟁을 전후해 데탕트 정책이 대두되기 전까지 미국의 세계전략을 규정짓는 기본 축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냉전에서 소련을 무너뜨려 승리한 것은 본질적으로는 봉쇄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데탕트 시대는 긴장완화라는 그럴듯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꺾는다는 차원에선 크게 얻은 게 없었다. 소련을 붕괴시킨 것은 대소봉쇄의 기본원칙을 되살려 대소압박을 가속화한 레이건의 정책이었다.

1994년, 기회를 놓치다

다른 한편 비록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해도 반공봉쇄의 원칙에서 벗어나 미중수교를 한 것은 결과적으로는 아쉬운 일이 됐다. 중국은 어차피 소련과 갈등을 겪고 있어 굳이 소련진영의 일각을 무너뜨린다는 의미가 약했다.

중국이 고립에서 벗어나 도약의 기회를 잡은 건 따지고 보면 미국 덕분이었다. 그런데 중국은 지금 미국의 헤게모니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뒤통수를 맞은 셈 아닌가?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미중수교가 없었다 해도 소련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미중수교가 없었으면 중국이 지금 같은 정도로 성장하는 게 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중국이 없었다면 사회주의권의 몰락 와중에 북한이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더욱 불투명했을 것이다. 설혹 겨우 살아남았다 해도 현재처럼 중국을 후견인으로 해서 버티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영삼 정권 출범 첫해인 1993년 북한이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하면서 핵 위기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시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1994년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폭격 계획 검토에 들어갔다. 김영삼 정권은 미국의 이 같은 계획에 강력한 반대 입장을 폈다.

미국이 당시 폭격을 포기한 것이 그 반대 때문이었는지는 분명하지는 않다. 어떻든 미국은 북한 핵시설을 폭격하지는 않았고, 대신 카터가 대북 특사로 등장했다. 카터는 김일성과 담판, ‘북한은 핵을 동결하고 미국은 대북제재를 중단한다’는 협상 결과를 이끌어냈다.

그런데 만약 김영삼 정권이 북한 핵시설 폭격에 반대하지 않고 미국이 실제로 폭격을 단행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것은 매우 위험한 가정임에는 틀림없다. 자칫 전면전 발발의 소지도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당시 상황에서 중국이 과연 북한을 위해 기꺼이 개입했을까 하는 점이다. 중국은 당시 막 경제적 도약의 물이 오르기 시작한 터였다. 이를 더 가속화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미국과의 원만한 관계가 중요했다. 더욱이 당시 중국의 힘은 지금과는 비할 처지가 아닐 정도로 매우 취약했다. 중국이 북한과 함께 미국에 맞설 결심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당시 북한은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였다. 소련의 몰락으로 사회주의 형제무역 시스템이 무너지자 북한경제는 궤멸적 타격을 받았다. 여기에 기근까지 겹쳐 아사자가 속출했다. 애초에 핵 소동을 벌인 자체가 그러한 사면초가를 타개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중국이 지원을 하지도 못하고 내부적으로는 아사자까지 쏟아지는 상황에서 북한 단독으로 전쟁을 감행한다? 위험한 가정이지만 설사 폭격을 받았다 해도 북한의 객관적 처지 자체는 전면전으로 응수할 여건이 아니었다.

당시 카터는 김영삼 정권에도 정치적 선물을 하나 들고 왔다. 김영삼-김일성의 남북정상회담 약속이었다. 만약 이것이 성사되면 한국 최초의 노벨평화상은 김영삼의 차지가 됐을 가능성이 거의 확실했다. 매력적 선물이었다.

하지만 이후의 경과는 그 중재가 결국은 한국과 미국 그리고 정치인 김영삼 그 어느 입장에서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김일성은 덜커덕 죽었고, 결과적으로 북한만 핵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대북정책, 어떻게 할 것인가?

위기는 위험한 기회이기도 하다고 했다. 당시 상황은 한국에게 어떤 점에선 큰 기회일 수 있었다. 당시 한반도 일대의 객관적 정세는 한국과 미국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사태의 전개에 따라선 한국 주도의 남북통일도 결코 불가능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정신적 준비가 없었다. 그게 어떤 평화든 일단 평화를 지키는 게 무조건 우선이라는 식이 압도적 정서였다. 어떻든 전쟁은 안 된다는 막연한 평화주의와 통일은 먼 장래의 일로만 미루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좌파 운동권 인사들은 통일비용이 어쩌고 하면서 그런 여론을 교묘하게 더욱 부채질했다.

반면 북한은 기회를 낚아챘고, 과실은 매우 컸다. 미국의 봉쇄와 압박이 완화됐고 무엇보다도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그렇게 위기를 넘기자 기회가 또 이어졌다. 햇볕론자들의 10년이었다. 북한은 햇볕 운운은 모독이요 화평연변의 음모라고 목청을 돋우었지만 돈은 기꺼이 받아 챙겼다.

북한에 대규모로 돈이 흘러들어가기 시작했고 각양각색의 대북지원사업이 이어졌다. 고난의 행군은 당연히 끝났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 시절이던 2005년 북한은 드디어 핵보유를 선언하고 2006년에는 핵실험을 단행했다. 햇볕 아래서 매우 편하게 핵을 개발한 것이다. 북한에게 그 시절의 햇볕은 매우 따뜻했다.

2009년 북한은 두 번째로 핵실험을 단행했다. 그리고 2012년 헌법에 핵보유를 명시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대선이 불과 몇 개월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이 엄중한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이슈랍시고 부각돼 있는 게 경제민주화니 복지니 하는 등이다. 대북정책 안보정책 문제는 너무나 존재감이 없다.

구색 갖추기 수준의 언급은 있다. 우선 여당, 남북도 신뢰회복 운운, 김정은을 만나겠다 운운이다. 북한은 신뢰를 나눌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신뢰라는 단어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김정은을 왜 만나나? 정상회담 병의 재발이다. 역대 정권들이 그런 이벤트에 몰두하다 너무나 많은 해악을 끼쳤다.

다음, 야당에선 하나같이 이명박 정권의 대북강경책이 문제라고 떠든다. 논박의 가치가 없다. 무슨 강경책을 썼다는 것인가? 만약 이 정권이 북한에 돈을 건네지 않을 걸 지칭하는 것이라면 그나마 잘한 일의 하나다. 평화는 돈으로 살 수 없다. 돈다발을 흔들다간 돈도 뺐기고 몸도 다치는 수가 있는 게 세상이치다.

우리는 김영삼 정권 시절에는 기회를 놓쳤고 이후에는 바보짓으로 10년을 허송했다. 곤란하다. 조지 케넌의 경우를 보라!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전후 반세기를 지탱할 기본전략을 수립했다. 그리고 그 기본 철학의 힘으로 마침내 미소 대결에서 승리했다. 그 정도에 못 미쳐도 우리도 비슷한 흉내는 내야 할 것 아닌가?

몇 가지 원칙만 정리한다. 첫째 햇볕정책을 다시 허용해선 안 된다. 둘째 개혁개방에 대한 지나친 기대도 금물이다. 셋째 대화를 하되 기대를 걸어선 안 된다. 넷째 힘의 우위를 통한 봉쇄와 압박을 항상 유지해야 한다. 다섯째 ‘기회’가 왔을 때는 다시는 놓쳐서는 안 된다.

북한정권은 ‘우리민족’끼리‘를 외치지만 그들은 김일성 민족이고 우리는 한민족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논리대로면 같은 민족이 아니다. 다만 적일 뿐이다. 그리고 그냥 적이 아니라 현존하는 惡이다. 우리는 惡과는 공존할 수 없다. 무너뜨려야 한다.(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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