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생존은 올바른 리더에 달렸다
공동체의 생존은 올바른 리더에 달렸다
  • 미래한국
  • 승인 2012.09.14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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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노폰 著 <아나바시스>, 그리스 군대 생존기
 

어느 집단이든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에서 생존해 나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도움은 커녕 항복하거나 생명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난폭한 적에 에워싸인 상황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아나바시스(Anabasis)>는 이런 극한 상황에서 작은 군사집단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생환하는가를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잘 보여준다.

이 책은 헬라스(Hellas, 그리스 사람들이 당시 자기 나라를 부르던 이름이다) 사람들이 페르시아 내전에 용병으로 참가해 내륙까지 진군했다가 실패한 후, 적진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귀환하는 과정을 그린 전쟁기이다.

저자 크세노폰(Xenophon, BC 430년경~BC 355년경)은 군인이자 역사가였다. 그는 플라톤과 동년배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하지만 철학자이자 사상가였던 플라톤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더구나 그의 저서 <소크라테스 회상>에서 소크라테스를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버트란트 러셀로부터 “현명한 사람이 한 말에 대한 어리석은 사람의 기록은 정확하지 못하다”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합리적인 군인이자 역사가

하지만 <아나바시스>와 그의 다른 저작 <헬레니카>, <키로파에디아> 등에서 엿보이는 크세노폰은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크세노폰은 페르시아에서 기사회생했지만, 아테네인임에도 한때 스파르타인의 편을 들어 추방되기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헬라스 군이 페르시아 내전에 개입된 과정은 이렇다. 퀴로스 2세가 그의 형인 페르시아 대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피시다이족을 친다는 명분으로 자신이 태수로 있던 소아시아 지역의 군대와 헬라스 용병을 모으자, 평소 퀴로스와 교유하고 있던 헬라스 장군들에 의해 중무장 보병 1만1000명, 경방패병 약 2000명 등 1만3000여명이 모병돼 참전하게 된다.

이들은 처음에는 퀴로스가 페르시아 대왕을 축출하기 위해 시작한 전쟁인 줄은 모르고 참가했다가, 내륙 깊숙이 진입한 상태에서 뒤늦게 원정 목적을 알게 되자 퇴각하고자 했으나, 급료 인상을 내거는 퀴로스의 제안과 독자 퇴각의 어려운 현실 등을 고려해 할 수 없이 페르시아 대군과의 전투에 임한다.

하지만 퀴로스의 전사와 함께 반란군이 궤멸되고, 패잔병은 대왕에게 투항한다. 오롯이 남게 된 헬라스 군은 대왕의 항복 요구를 거절하고, 소아시아 지역의 페르시아 태수 팃사페르네스와의 협상을 통해 퇴각 안내를 받으며 퇴각한다. 하지만 그의 계략에 말려 주연에 초대된 헬라스 군 장군들이 사로잡히고, 대왕에게 압송된 후 처형을 당한다.

졸지에 장군들을 잃게 된 헬라스 군은 큰 충격을 받고 혼란에 빠지나, 전 병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장군과 대장들을 새로이 선출하고 전열을 가다듬어 퇴각하게 된다. 장군들의 몰살 이후 군대가 자멸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헬라스인들이 두려움에 떨며 투항하거나 분열하지 않고, 스스로의 독자생존 방식을 찾아가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이 책은 크세노폰이 직접 장군으로 선출돼 군대를 통솔해 가면서 체험한 전쟁기 또는 전기(傳記) 형식을 띤다. 그의 문체는 화려하진 않지만 군인답게 군대의 이동과 주둔, 병참 조달, 전투 전개 상황, 통과지역 지형이나 부족들의 생활상 등에 대해 소상히 기술해준다. 하지만 정작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이들 헬라스 용병이 다양한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과 방식이다. 여기에 헬라스인들의 저력과 이상적 지휘관의 모습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굴종보다는 전투를 선택

이들이 페르시아 제국의 중심부로부터 흑해 연안의 헬라스 식민지까지 진출과 퇴각을 한 행군의 거리는 무려 1,150파라상게스(약 6,325km), 행군 날수는 1년 3개월이나 된다. 그 과정에 수많은 부족들과 전투와 협상을 벌이며, 생존을 위한 투쟁을 전개한다. 결국 흑해 연안의 헬라스 식민지에 도착해 때마침 페르시아 팃사페르네스를 치러 출전한 스파르타군을 만나 이에 편입되면서 이들의 험난한 여정이 끝을 맺는다. 수많은 전투 과정에서의 전사, 이탈 등으로 천신만고 끝에 남은 병력은 6000여 명이었다.

기나긴 퇴각 과정에서 이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페르시아 부족들에 대한 대응방식의 선택의 폭은 좁았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느냐, 싸워서 정복하느냐 양자택일의 상황에 늘 맞닥뜨려야 했다. 이 때 이들이 택하는 기준은 분명했다.

“무기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을 때보다는 그것들을 가지고 있을 때 더 값진 친구들이 될 것이며, 그리고 우리가 싸워야 한다면 무기들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을 때보다는 그것들을 가지고 있을 때 더 잘 싸우게 될 것”이란 점이다. 이들은 무기를 버리고 굴종을 택하기보다 맞서 싸울 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헬라스 군의 생환에 가장 중요한 동력은 군사력과 지휘관의 리더십이었다. 헬라스 군의 전투력은 페르시아 군을 압도했다. 개개인의 전투능력 뿐만 아니라, 중무장보병과 경무장 방패병, 투석병, 기병 등을 적절하게 혼합해 활용하는 전술 운용도 뛰어났다.

또 생면부지의 적국의 자연지형과 습속, 성곽, 도시 및 촌락들의 환경에 대한 정보가 부재한 상태에서 현지인을 포획, 활용하며 늘 창조적 전술을 고안하고 실행했다. 산악과 평야지역, 성채 등에서 각기 다른 진법이나 공격술을 선보였고, 이는 헬라스 군의 현지 적응력과 총체적인 역량을 높여주었다.

올바른 리더십의 고전

적국의 한복판에서 ‘일만 인’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페르시아 제국이 여러 부족에 의해 분권적으로 느슨하게 통치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야만인’ 에 대한 헬라스인의 우월감과, 굴종보다 자유를 존중하는 특유의 자부심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군인에게는 군대의 전투와 전술운용 대목이 주목을 끌게 하지만, 각 분야의 리더들에게 조직관리 과정에서의 설득과 협상의 전략에 대한 교훈을 더 많이 얻게 해 준다.

다양한 분쟁이나, 의사선택, 적군과의 협상의 시기에 장군과 병사들이 행한 수많은 연설과 주장들을 보노라면, 무조건 상명하복의 요구가 아니라,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위한 공명정대한 자세와 정확하고 합리적인 상황 판단에 의한 설득과 협상으로 이해관계자가 수용하게 만드는 리더십의 전형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래한국)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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