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속에 담긴 국가의 흥망
세금 속에 담긴 국가의 흥망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2.11.12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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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이 낮을 때 제국들은 융성했다

경제 민주화 논란이 대선 정국을 달구고 있다. 그럼에도 이 경제 민주화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세금’이라는 것이 이 경제 민주화와는 어떤 형태로든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러한 세금의 역사에서 강대국의 흥망을 조망해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영국 왕립학술원 연구원인 사빈(Sabine)교수가 1980년에 출판한 ‘세금의 略史’(A short history of taxation)에는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국가의 흥망에 세금이 어떻게 관련됐는지 흥미로운 서술이 있다.

이 내용은 경상대 전태영 교수가 '세금 이야기‘라는 책을 통해 설명한 바도 있다. 어느 국가든지 세금을 거둔 만큼 쓴 국가들은 전성기를 누렸지만 쓴 만큼 세금을 거두게 되면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재정 파탄으로 전쟁 경비를 만들 수 없었던 아테네

아테네는 초기에 작은 정부로 출발했다. 아테네에는 liturgy라는 부자의 기부의무가 있었는데 전체 시민의 약 4%에 달하는 3달란트 이상의 재산가들이 전함관리, 축제 경비, 체육행사 경비, 연극 비용등을 순서를 정해 자발적으로 부담했다고 한다.

이들 부자들은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대신 국가 운영의 경비를 부담하고 급여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테네 시민들의 조세부담은 매우 낮았다. 이러한 아테네의 BC 5~4세기는 황금시기였다.

아테네는 이후 큰 정부를 지향하며 몰락의 시대로 접어든다.

구제기금, 배심원 수당, 의원수당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의 예산이 소비적으로 지출됐다. 무엇보다 정치적 자리를 얻기 원하는 사람들이 표를 얻기 위해 분배주의를 부추켰다.

결과는 소비성 지출의 과다로 아테네는 전함을 수리할 비용을 조달할 수 없게 되자, 시민들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고 낮은 세금에 익숙해 있던 시민들은 조세를 회피했다.

결국 아테네는 전쟁비용을 조달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고 말았다. 아테네 황금시기의 몰락은 그렇게 찾아 왔다.

낮은 세금으로 ‘팍스 로마나’를 이룬 로마제국

로마는 제국의 전성시대에 전략적으로 낮은 세금 정책을 썼다.

로마는 세금 걷는 일을 총독이 못하게 하고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지방 수령들과 협상을 했다. 이 과정에서 지방들은 인두세와 재산세만 정하고 다른 일체의 세금을 총독들이 걷지 못하게 했던 것은 유명하다.

그 결과 속주들은 이방의 높은 세금보다 세율이 낮은 로마로 속속 결집했다. 그러한 낮은 세금 정책이 팍스 로마나의 기초가 됐다. 하지만 로마는 주변 세력의 도전에 직면해서 일대 시련을 겪게 된다.

동부의 사산제국, 북부의 게르만인의 공세가 심해지자 로마로서는 수비적인 전쟁에 소요되는 전비가 급증했다. 이 때 은화의 함량을 떨어트리는 방법으로 통화의 평가절하가 만연했다. 당시 정상적인 데나리온의 은 함유량은 50%였는데, 이것이 5%로 하락할 정도여서 통제불능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그러자 디오클레아티누스(284~305)황제가 시급히 개혁을 실시했다. 하지만 개혁의 방향은 잘못됐다. 시중에 내린 가격 동결명령은 지켜지지 않았고 토지세를 개혁하였으나 그 내용이 하도 복잡해서 토지를 평가하는 세리의 수가 급증했다. 그 결과 농민의 부담만 증가하게 되는 상황에 놓였다.

농민들이 세금부담으로 토지를 떠나기 시작하자 로마는 농민들의 직업과 이주의 자유를 박탈해 버렸다. 그 결과 경작지 감소와 세금수입이 감소했고 개별가구의 세금은 증가했다. 결국 더 잃을 것이 없는 농민들이 이방인의 지배를 환영하기 시작하면서 로마는 멸망했다.

로마는 초기의 낮은 세율로 인해 번성했지만, 결국 전비 조달을 위해 통화조작을 함으로써 파탄에 이르렀고 합리적인 조세 정책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 농민들이 제국에 등을 돌리면서 로마는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국민이 주는 대로 세금을 받았던 영국 엘리자베스1세의 기적

세금이 국가의 흥망에 끼친 가장 극적인 사례는 영국 엘리자베스1세의 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자 베스 여왕은 세금을 국가가 정하지 않고 국민들이 주는대로 받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실천했다. 그 결과 당시 영국의 세금은 유럽에서 가장 낮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영국의 세금제도는 놀라운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 내게 된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을 위협하자 엘리자 베스 1세는 국민들에게 전비 모금을 호소했다. 당시 영국 왕실의 재정은 빈약했고 이로 인해 스페인에 맞설 전함구축 비용이 부족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직접 전비모금을 국민에게 호소하자 상인들과 목축업자들이 먼저 적극 호응하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마음과 뜻과 몸과 생명과 재화를 다해 여왕을 돕자!"

그 결과 여왕이 제시한 금액보다 훨씬 많은 34만 파운드의 모금이 이뤄졌다. 영국인들의 높은 애국심은 그해 아르마다 해전에서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했다. 이를 계기로 제해권은 영국으로 넘어갔다. 지지않는 영국의 태양은 그렇게 떠 올랐다.

그렇다면 그러면 당시 스페인은 어땠던가.

16세기 스페인에는 알카발라(alcabala)라는 소비세가 있었다. 거래단계마다 거래가액에 10%가 부과되는 세금이었는데, 예를 들어 상인의 이윤을 고려할 때 4번 정도 손이 바뀌면 물건 값이 2배로 뛰어올랐다고 한다.

결국 스페인의 알카발라는 물가상승과 생산둔화의 주범이 되고 말았다. 시민들 사이에는 무거운 조세저항으로 광범위한 조세회피가 성행했다. 그 결과 90%의 세원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 영국과 스페인은 이미 경제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영국은 작은 정부로 시민들이 부강했고, 스페인은 큰 정부로 시민들이 가난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영국과 스페인간의 전쟁에서 국민들의 애국심에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낮은 세금으로 국민들의 애국심을 끌어 낼 수 있었다.

로마의 황제 역시 낮은 세금으로 속주들을 결속시켜 팍스 로마나를 이룰 수 있었다.

아테네는 초기에 낮은 세금으로 전성기를 누렸지만 이후에 분배와 소비성 경비로 국가 재정이 파탄나 전쟁을 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선택은 무엇인가. (미래한국)

한정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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