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이 필요하다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이 필요하다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2.12.24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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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가 끝난 자리에 갈등의 불씨가 여전히 꺼지지 않고있다.

51:48이라는 여-야 국민 지지율은 대선을 세대간 전쟁으로, 또 보-혁간의 전쟁으로 만들었다. 승리한 쪽에서도 무언가 개운치 않고, 패배한 쪽은 분노와 울음바다가 되버렸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젊은이들과 일부 시민들은 다시 촛불을 들고 모이자고 선동을 하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젊은 세대의 좌파-진보 성향은 앞으로 우리 사회에 드리울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준다. 보수가 자긍심을 가져왔던 산업화의 가치는 이들 세대에게는 반민주, 독재와 착취의 시절에 불과했다.

이로써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재벌 대기업들은 과거 정-경유착을 통해 특혜로 성장한, 사악하고 부도덕한 자본가들의 사욕추구 전유물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인다.

대한민국 산업화 성공의 현대사가 뿌리채 뽑혀난 자리에는 부활을 기다리는 사회주의 유령들의 관들이 즐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는 여전히 ‘종북 밖엔 난몰라요’라는 낡은 레코드의 노래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유주의 가치를 깨닫는 보수가 필요하다

이번 대선에서 보수는 너무나 많은 가치를 양보해야 했다. 특히 보수철학의 근간인 자유주의는 질식해 버렸고, 집단주의와 국가주의가 그 빈 공간을 대안적으로 채워버렸다는 느낌이다. 그런 보수는 앞으로 전개될 종북이 아니고, 반미가 아닌, 사회주의, 집단주의 유령들과 싸울만한 내공을 갖추지 못했다.

보수가 가장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박근혜 정권이 국민에게 약속한 공약들이다. 매년 27조원, 5년간 135조원이라는 사회복지 재원에 대해 새로운 집권 여당은 분명하게 밝히지 못했다. 세금을 더 걷어서 하지 않겠다면, 기존의 국가 공공지출에서 무엇을 어떻게 줄여서 할 것인지 넘어야 할 산이 태산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 공공지출에서 축소되는 이해집단들은 순순히 수용해 줄 것인가.

공공정책의 확대가 사회통합을 이뤄내기 보다는 오히려 갈등을 증폭한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공공섹터라는 그 자체가 이해관계 집단들의 이익추구 경쟁이 벌어지는 ‘공유지의 비극’을 낳는 곳이기 때문이다.

노벨 경제학 수상자 뷰케년은 민간의 개인들 뿐만 아니라 정치인과 공무원들 역시 사익의 인센티브에 의해 의사결정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말이 공공이지, 표가 되고 승진이 보장되는 일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정부의 막대한 공공지출이 비효율과 부패, 그리고 이익집단들의 이해추구로 거대한 갈등의 시한폭탄이 되고야 만다는 사실은 이미 그리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남유럽국가들이 생생한 경험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보수는 이러한 문제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와 같이 ‘반공’과 ‘종북척결’이라는 아젠다만으로서는 이와같은 내적 모순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원리를 모르는 보수는 좌파와 종북이 추동하는 ‘사회적 모순’ 논리에 대항하지 못한다. 왜 개인과 자유가 나라를 부강하게 이끄는지 모르는 보수라면, 사회적 약자를 우선시하고, ‘사람이 먼저다’라고 주장하는 좌파-진보의 이념공세를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다.

낙수효과가 사라졌고, 세계화가 불평등을 초래하며, 재벌기업의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와 골목 상권 죽이기가 불평등을 초래한다는 사회주의적 이념 공세에 자유주의 원리를 모르는 보수라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기 쉽다. 이러한 이념 공세에 여전히 ‘종북’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들,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그러므로 보수는 이제 자기 혁신을 꾀해야 한다. 과거 잘못된 좌파-진보의 신자유주의 공세 오류를 바로 잡고,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는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며,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자본과 시장의 탐욕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여전히 우리가 신뢰할 만한 것은 거대한 정부가 아니라 ‘작은 정부, 큰 시장’이라는 사실과 보수를 표방한 부시정부는 무늬만 보수였을 뿐, 진정한 보수가 아니었다는 미국 보수인사들의 비판에도 귀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목적이 무엇인지, 시민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는 보수는 보수로서 자격이 없다. 국가의 목적이란 시민의 자유를 확대하고, 번영을 약속하는 질서 수호의 보루라는 사실을 잊으면, 보수 역시 진보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존재 목적을 ‘이념의 구현’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과연 민주주의라는 것이 최선의 방안인지, 이러한 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디마키’(demarchy)와 같은 민주제의 배심관제도는 필요하지 않은지 보수는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참된 보수철학은 국가주의가 아니며,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신뢰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한국의 보수는 깨달아야 한다. 동시에 헌법에는 국가의 조직을 규명하는 ‘조직규칙’ 외에,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국가의 권한을 제한하는 ‘제한규칙’이 있다는 점도 보수는 깨달아야 한다.

무제한의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원리에 의해 제약되어야 하며, 사회에는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규범이 먼저’여야 한다는 준칙을 보수가 깨달아야 지금 오도된 가치의 젊은이들을 안전하게 미래로 인도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진보 뿐만 아니라 한국의 보수(保守)도 이제는 보수(補修)되어야 하는 시기에 왔다. (미래한국)

한정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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