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부역자들의 슬픈 아이러니
6·25 부역자들의 슬픈 아이러니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3.06.24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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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부역자는 보상받고, 국군 협력자는 외면받고…


전쟁은 사람들을 한계 상황으로 몰아간다. 일본의 전쟁문학 작가 고미카와 쥰페이(五味川純平)는 그의 소설 <인간의 조건>에서 이렇게 썼다.

‘인간이 진화하는 데는 수백만년이 걸렸지만, 다시 짐승으로 퇴화하는 데는 단 5분이면 충분하다’

증언을 하나 소개하겠다.

“형님이 봉산교회 집사였어요. 김형배라고. 해방 후 대동청년단 부단장을 맡고 있었고 이승만 대통령의 직계라인이었지요. 사촌들이 있었는데 좌익활동을 했어요. 이들이 6·25 직전에 체포돼 경찰서에 연행됐죠.

그때 사촌들이 형님에게 애원을 했어요. ‘형배야. 제발 살려다오...’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형님이 백방으로 탄원하고 계도를 약속해 처형될 목숨들을 구해줬어요. 그해 8월이었지요. 인민군이 마을에 들어왔고 당시 아무 것도 몰랐던 내가 직접 교회 종을 쳤죠.

인민군과 좌익들이 교인들을 상대로 인민재판을 열었어요. 그때 형님이 목숨을 구해 준 사촌들이 직접 형님을 고발하고 묶어 데려갔죠. 죽도록 때리고는 두 눈을 꼬챙이로 파냈어요. 그리고는 근처 모래사장에 생매장을 해버렸습니다.

그때 아무 죄도 없는 성도들이 함께 죽었어요. 심지어 친형이 국군 장교였다는 이유만으로 교회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학생을 끌고가 처형했지요. 그때 저는 좌익들이 용서할 수 없는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전주에서 6·25를 겪었던 김형좌 목사의 증언이다.

잔혹했던 좌익들의 민간인 학살

6·25 부역자들에 의해 희생된 양민들의 숫자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국군이나 경찰에 의해 희생된 부역자들이나 양민의 기록은 남아 있다. 그래서 이들은 국가의 보상 대상자들이 된다.

2012년 6·25 때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처형된 자들의 유족 93명에게 150억이 보상 지급되는 법원 판결이 있었다. ‘고양금정굴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6·25전쟁 중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분하에 고양경찰서 경찰의 주도로 다수의 민간인을 불법 총살해 암매장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지난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승소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유족들이 피해보상금의 5%인 6억2000만원을 출연해 ‘금정굴 인권평화재단(가칭)’을 출범시켰다는 점이다.

‘금정굴 인권평화재단’을 주도하는 사람들이나 이 단체의 성격은 불분명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재단이 금정굴 사건을 전쟁이 빚어낸 참극이라는 ‘반전’ 인식보다는 ‘대한민국 부정’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 같다는 우려다.

이러한 우려는 그동안 금정굴 유족회의 위령제를 전교조, 민중연대를 비롯 대한민국 체제 부정의 노선을 걷거나 종북적 노선을 걷는 단체들의 참여와 주도로 이뤄져 왔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단체들은 6·25 당시 인민군 부역자들에 의해 살해된 양민들의 억울함이나 보상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단체들이었다.

인민군 부역자들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양민들의 유족 마음은 우익에 의해 희생된 금정굴 피해자 유족들이 잘 알 것이다. 그렇다면 금정굴 유족회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켰어야 한다.

전쟁이라는 한계 상황은 인간을 모두 광기로 몰아간다. 더구나 금정굴 사건은 좌익 부역자들이 먼저 고양경찰서장을 부당하게 처단한 것에 대한 경찰들의 보복심리가 빚어낸 참극이었다.

국가는 그러한 점도 인정해서 유족들에게 보상했다. 1심판결의 두 배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그렇다면 유족들은 금정굴 사건을 체제 부정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자들과 절연해야 하는 것이 도리다.

금정굴 유족회의 뻔뻔함

6·25 자원 참전 전사자들에 대한 국가 보상금이 5천원이었던 것은 지난 해였다. 이 보상금이 올해 약 946만원으로 조정됐다. 다시 교회 내 양민들을 학살했던 6·25 부역자들에 대한 김형좌 목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사탄이 들어왔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어요. 교인들이 무서워 예배당을 나오지 못했고 협박과 회유에 넘어간 몇몇 교인들이 함께 선동에 나서기 시작했지요. 가족처럼 지내던 교인들끼리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고발해야만 했어요.

정 장로라는 분이 계셨는데 협조를 안하자 가족이 보는 앞에서 몽둥이로 때리기 시작했지요.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나 죽네.’ 비명 속에 돌아가시는 모습을 그 부인이 울면서 지켜봤죠.”

권태술·김일천·정기봉·나백두·고순동 등 5명의 교인이 함께 희생됐다. 이튿날에는 금산교회 교인이며 대한독립촉성국민회원인 지주 김두현(당시 56세)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전황이 인민군에게 불리해져 김제에서 퇴각할 때에도 학살이 있었다.

9월 27일에는 일제 때 김제경찰서 형사부장을 지냈고, 당시 영단(농협)에 다녔던 임정규(당시 39세)가 김제내무서 길 건너 앞 야산 공터에서 지방 좌익에 의해 살해됐다.

같은 날 만경면 분주소에서 지방 좌익에 의해 지주였던 정판석(당시 52세)과 부인 김이례(당시 44세), 아들 정태봉(당시18세), 딸 정금주(당시 20세), 젖먹이 아이 2명 등 가족 6명이 만경면 분주소 내 우물과 방공호에서 지방 좌익에 의해 살해됐다.

1950년 7월 25일부터 9월 28일 사이 인민군 치하 및 치안 공백기에 김제에서 희생된 크리스천, 우익인사, 부유층, 지주 및 가족은 최소 208명에 달했던 것으로 인권위는 밝히고 있다.

김 목사는 당시 잔인하게 학살을 저지른 이들이 아직도 잘 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을 찾아내 단죄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북한 공산집단을 망하게 하는 것이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고 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잖아요. 그들도 어쩌면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하고 있을 겁니다. 피를 피로 씻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저 사탄 마귀의 집단인 김씨 공산집단은 반드시 궤멸돼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자들의 올바른 선택입니다.”

고양시 금정굴 피해자 유족들은 한 번쯤 생각해 볼 말이 아닐까.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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