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6·25전쟁
영화로 보는 6·25전쟁
  • 미래한국
  • 승인 2013.07.01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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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문 편집위원·인하대 교수·영화평론가·전 영화진흥위원장
 

영화는 전쟁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드라마로 바꾼다. 전장에서는 사람이 죽고 다치며, 세상이 뒤집어지는 일이 일상처럼 벌어져도 영화 속에서는 더 집중하고 과장도 서슴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는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은 물론 미국의 남북전쟁, 두 번의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전에 이르기까지 웬만큼 규모가 있는 경우라면, 스펙터클을 구성할 요소가 있다면 거듭 만든다.

지구가 좁다고 느끼면 우주로 나아가거나 우주인들이 지구로 쳐들어오는 상황까지 만들어낸다. 실제로는 전쟁을 두려워하고,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내가 있는 곳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남의 일처럼 지날 수도 있는 것이 세상의 풍경이다.

전쟁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재산을 파괴시켰지만 영화는 전쟁을 빌려 더 풍성해졌고 성숙해졌다. 현실과 영화의 사이는 그렇게 가깝고도 멀다.

가깝고도 먼 현실과 영화 사이

우리는 6·25 또는 6·25동란이라 부르고, 북한은 조국해방전쟁, 중국은 항미원조전쟁,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서는 한국전쟁(Korean War) 또는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부르는 6·25전쟁은 엄청난 비극이었지만 좌파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켜낸 거대한 승리의 전장이었다.

 

6·25전쟁에 가장 먼저 접근한 영화는 미국 쪽에서 나왔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을 골라 기습적으로 군사공격을 시작하면서 전면전으로 번진 전쟁은 미국과 소련, 중공이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한 국제전이었다. 서울의 함락과 유엔군의 참전, 인천상륙작전, 중공군의 개입, 1·4후퇴, 휴전협정, 반공포로석방 등으로 이어지는 공격과 반격, 역전의 드라마가 이어졌다.

전장은 한국이었지만 세계의 강대국들이 참가한 치열한 격전장, 어느 쪽이 주도권을 잡고 상대를 타격하는가에 따라 이후의 정치적 영향력이 달라질 수 있는 전쟁. 전장의 규모는 제2차 세계대전에 비해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지만 전쟁의 성격이나 의미, 극적 긴장감은 그 이상이었다. 미국영화계는 이 전쟁에 주목했다.

발발 1년을 넘기면서 전장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격동, 전장에 나가야 하는 젊은 군인들과 그들의 가족,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머나먼 낯선 곳에서 젊음을 던지는 이야기들을 영화로 재현하기 시작했다.

사무엘 풀러 감독의 ‘한국동란의 고아’(1951)는 포병부대의 관측 지원을 위한 척후대 병사들의 치열한 투혼, 그들을 돕는 고아 소년의 헌신을 소재로 하고 있다. 풀러 감독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다가 부상을 당해 퇴역한 경력을 가진 인물. 한국 전선에도 직접 돌아보고 난 뒤 영화를 만들었다.

영웅들의 이야기를 그리다

뒤이어 나온 다른 영화들은 알지도 못했던 나라, 처음 가본 나라이지만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던 영웅들의 이야기를 한다.

‘한국전의 미군’(A Yank in Korea, 1951)은 제목 그대로 전장에 투입된 미군 병사들의 전투 상황을 다룬 경우이고 ‘싸우는 젊은이들’은 장진호 전투 중에 중공군에게 포위된 미군들의 안전한 후퇴를 지원하는 미해병대 병사들의 투혼을 그린다.

유능한 지휘력을 보이면서도 흑인에 대해서는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킨케이드 상사(알란 라드)와 흑인 상사 에디(시드니 포이티어)는 서로 갈등하지만 결국 몰려오는 적 앞에서 서로 신뢰하며 목숨까지 대신하는 전우들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준다.

장진호 전투는 ‘백병전’(Fixed Bayonets, 1951)과 ‘후퇴작전(Retreat, Hell, 1952)에서도 등장한다. ‘창공의 맹호’(The McConell Story, 1955)는 한국전에서 17대의 미그기를 격추하며 최고의 에이스이자 전쟁영웅으로 떠오른 조셉 맥코넬 대위의 실화를 그린 전기 영화. ‘싸우는 젊은이들’에 출연했던 알란 라드가 맥코넬을 연기한다.

‘전송가’(Battle Hymn, 1957) 역시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전기 영화. 한국전에 참가해 비행사 양성 훈련을 맡고 있던 딘 헤스 대령은 400여명의 전쟁 고아들을 제주도로 피난시키는 일에 팔을 걷어붙인다. 온갖 고난 끝에 후송작전은 성공한다.

 

전쟁 중에 드러난 감동 드라마. 당시 인기 절정이던 록 허드슨이 딘 헤스 역을 맡았고, 헐리우드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배우 필립 안(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들)과 미국으로 초청받은 25명의 고아들이 출연하는 등 우리나라에서 크게 주목받았던 영화이기도 하다.

미국 배우 중에서 자주 등장했던 배우는 윌리엄 홀든(1918-1981). ‘모정’(1955)에서는 종군기자로, ‘원한의 도곡리 철교’(1955)에서는 도곡리 철교 폭파 임무에 나섰다가 순직하는 미해군 전투기 조종사로, ‘원산만의 사브마린’(1951)에서는 해군 작전을 지휘하는 잠수함 함장으로, ‘로켓 파일럿’(1956)에서는 한국전에서 적군의 포로가 돼 고문 당한 공군조종사로 각각 등장한다. ‘원한의 도곡리 철교’는 당대의 톱스타 그레이스 켈리가 모나코 공국의 레이니에 왕자와 결혼하기 전에 출연한 영화로도 주목받았다.

터키·필리핀 영화도 10여 편

전투가 길어지자 전쟁 중에 포로가 된 병사들의 이야기도 나왔다. ‘전쟁포로’(Prisoner of War, 1954), ‘대나무 감옥’(The Bamboo Prison, 1954) 같은 영화들이다. ‘저격자’(The Manchurian Candidate, 1962)는 적의 포로가 돼 세뇌 고문을 당한 뒤 명령에 따라 목표물을 저격하는 킬러의 이야기를 다룬다.

터키는 미국영화보다는 수가 적지만 그래도 여러 편 만든 경우다. 10편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전쟁에 참가한 터키군의 용맹과 희생을 주로 다룬 것으로 보인다. 현재 터키 영화는 목록만 검색될 뿐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고 당시 자료의 보존 여부도 확인하기 어렵다.

필리핀 영화는 세 편 정도를 찾을 수 있는데 그중 ‘Ulirlang Bituin’(1958)은 ‘나의 아내는 한국여성’이란 제목을 달고 국내에서 소개됐다. 전쟁 중에 고아들을 보살피던 보모와 필리핀 군인이 사랑에 빠지고 결혼에까지 이른다는 내용이다.

중국은 전쟁의 상황을 크게 바꾸고 진행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영화 쪽에서는 오히려 빈약하다. 장춘영화제작소가 만든 ‘상감령’(1956)은 강원도 철원지역의 상감령 전투를 소재로 다룬 영화. 강원도 철원지역의 저격능선 전투와 인근의 삼각고지 전투를 합쳐서 중국 측이 상감령 전투라고 부른다.

한국 2사단 소속 5개 연대와 중공군 7개 연대 병력이 6주간의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중공군이 대승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휴전선을 38선 보다 남쪽으로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당연히 중국군의 용맹을 자랑하는 내용으로 채우고 있다.

특히 주제곡 ‘나의 조국’(我的祖國)은 국가(國歌)에 버금갈 만큼 널리 알려진 곡. 지금도 중요한 행사에 등장하는데 2011년 1월 후진타오 주석이 미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환영 축하곡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집결호’(2007)는 한국전을 다룬 중국영화 중 가장 최근작이다. 1948년 중국 공산군과 국민당 정부군과의 문하 전투 중, 부대원을 모두 잃은 중대장이 6·25 전쟁에 참가한 뒤 전쟁 영웅이 돼 퇴임한 후 부대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과정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중국, 홍콩, 한국의 공동제작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기술효과 부분은 ‘태극기 휘날리며’ 제작진이 담당했다. 전쟁이 멈춘 지 50여년을 넘기고서는 우리의 기술력을 6·25전쟁을 다룬 중국영화 쪽에 보태준 것은 아이러니하다.

北, 빈약한 환경에도 선전영화 독려

6·25 전쟁을 직접 발발한 북한도 관련한 영화를 여러 편 만들었다. 전쟁의 책임이 자신들 쪽에 있고, 희생자들에 대해 사죄한다는 등의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적들의 방해로 적화통일을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우며, 미국을 몰아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다.

해방 이후 북한 영화계의 기반은 극히 빈약했지만, 영화를 중요한 선전수단으로 인식한 김일성 정권은 전략적으로 영화 제작을 독려했다. ‘조국해방전쟁’으로 선전하며, 전쟁 기간 중에 미군과 싸웠거나 빨치산 활동을 찬양하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빨치산처녀’(1954)는 처음으로 만든 전쟁소재 북한 영화이고, ‘다시는 그렇게 살 수 없다’(1954)는 국군과 미군이 점령했다가 다시 인민군이 되찾은 마을에서,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당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강조한다.

특히 ‘이름 없는 영웅들’ 20부작(1979~81)은 정전협정이 진행되던 무렵 미군의 동정을 살펴 협상에 유리한 조건을 만드는 데 기여했던 수많은 인물들의 첩보활동을 다룬 연작. 6·25전쟁을 다룬 북한 영화 중에서 본격적인 미화작업을 한 경우로도 꼽힌다.

‘월미도’(1981)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월미도에서 북한군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던 국군이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킨 중요한 분기점. 그런 만큼 북한 입장에서는 통탄의 순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는 적들의 공격을 막기 위한 영웅적인 투쟁이 있었다는 것으로 선전한다.

남부군, 태백산맥, 태극기휘날리며, 고지전 …

우리나라 영화 중에서는 6·25를 소재로 다룬 영화들이 적지 않다. 중요한 전투 상황을 묘사한 경우와 ‘짝코’(1980), ‘길소뜸’(1985), ‘피와 불’(1991) 처럼 전쟁은 수십년 전에 끝났지만 비극은 여전히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는 내용을 다룬 경우들까지 폭은 비교적 넓다.

전쟁 이후 한국 정부는 6·25전쟁의 참상에 대한 홍보와 교육을 넓게 진행했고, 영화를 중요한 교육 수단으로 보았다. ‘반공영화’ 제작을 정책적으로 장려했고 우수한 작품으로 선정되면 상당한 보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에 이르러서는 북한과의 화해, 협력, 교류가 중요한 시대적 화두인 것처럼 떠오르면서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기 시작했다.

‘남부군’(1990)은 금기처럼 꺼내지 않았던 지리산 빨치산의 활동을 그들의 시각으로 보는 것처럼 묘사했고, ‘태백산맥’(1994) ‘태극기 휘날리며’(2004) ‘웰컴 투 동막골’(2005) ‘작은 연못’(2007) 같은 영화들에서는 오히려 미군이나 국군이 북한 인민군보다 더 잔학한 집단처럼 나타난다. 이런 영화들에서는 전쟁의 책임이나 가해자 피해자 문제를 굳이 피하며 특정한 상황만을 부각시킨다.

6·25전쟁이 담고 있는 국제적 환경에 대한 맥락적 성찰도 배제한다. 최근작인 ‘고지전’(2011) 역시 국군 부대 안에서 벌어지는 증오와 음모에 대해 부각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영화만으로 본다면 최근의 경우들은 6·25전쟁에 대해 우리가 가해자인 것처럼 강조하는 데 비해 북한의 책임과 재발을 막기 위한 고민 같은 것은 지워버린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며 얼버무리는 것을 넘겨버리기에는 그 영향이 커 보인다.

조희문 편집위원·인하대 교수·영화평론가·전 영화진흥위원장

<본지 미래한국 최초 정리 공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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