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왜 영토주권에 무심할까
진보는 왜 영토주권에 무심할까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3.08.16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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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의 EEZ, 西의 NLL, 南의 이어도, 北의 백두산


“국가의 정통성은 북한이 가졌다.”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의 주장이다.

2005년 강 교수는 인터넷에 “6·25는 내전”이라며 “미군의 개입이 없었다면 전쟁은 3일만에 끝났을 수 있었다”고 썼다. 이로 인해 강 교수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됐고 법원은 그에게 유죄를 선언했다. 당시 법원의 판결도 ‘ 강 교수가 북한이 한반도에서 정통성을 가진 국가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명시했다.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국가’로 간주하는 것은 진보를 표방하는 좌파 역사학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그래서 일까. 민주당을 비롯 지금의 야당세력과 좌파 진영은 대한민국의 영토주권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관심이 없어 보인다.

논란이 되고 있는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통일한국의 영토가 될 북쪽 백두산과 남쪽 이어도를 중국이 자기네 것이라고 우겨도 민주당과 진보진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동쪽으로 독도수호의 ‘이승만 라인’을 포기하고 독도 수역에 한일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함으로써 독도분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체는 DJ정권이었다. 민주당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을 때 ‘반일감정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동서남북 영토분쟁의 이슈에서 진보 진영은 자유보수진영의 ‘영토주권’ 주장을 묵살해 왔다고 할 만하다.

중국의 백두산 점유, 민주당이 방관

1993년 9월 4일 국회 여야의원들은 ‘백두산 영유권 확인에 관한 결의안’을 상정했다. 1984년에 이어 두 번째 시도였다. 당시 민주당은 “현시점에서 국회가 채택할 수 있는 문제 해결의 방법이 아니다”라며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민주당은 당시 결의안에 대해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국회가 성급하게 결의안을 채택할 경우 국회 위상에 치명적인 오류를 남긴다”며 “영토문제가 발생된 역사적 연원과 정치적 의미 등 사안의 복잡성을 고려할 때 외교적 마찰과 같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도 야기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런 민주당의 주장은 근거가 약했다.

60년대 초반 북한 김일성이 중국과 국경문제를 정하는 ‘조·중변계조약’에서 북한이 중국의 6·25 참전에 대한 보상으로 백두산의 절반 이상을 넘겨줬다는 사실은 90년 당시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주장한 ‘사실 확인’은 ‘조·중변계조약’의 내용을 확인해 보면 해결되는 사안이었다.

영토주권 문제에 있어 ‘신중하자’는 민주당의 주장은 결국 자신들이 창출한 노무현 정권하에서 ‘어리석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한 계기는 2006년 9월 중국이 백두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노무현 정권의 외교부와 문화재청이 각각 엇박자를 내며 불거졌다.

당시 이규형 외교부 제2차관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전체회의에 출석해 “중국의 백두산 개발 및 동북공정이 북한 정권 붕괴 시에 대비한 연고권 확보용이 아니냐”는 여야 의원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문화재청은 ‘중국의 백두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 동향 및 대응 방안’이라는 내부 보고서를 통해 “북한의 백두산 개발 및 세계유산 등재 추진은 동북공정의 일환이며 한반도 통일에 대비해 백두산의 영유권 확보를 위한 유리한 기반 조성 의도를 담고 있다”고 분석했다.

문화재청은 이어 “외교통상부와 문화관광부, 교육인적자원부 등 관계기관과 공조체제를 유지하고 중국과 북한의 공동 등재를 위한 국제여론을 환기시켜 나가겠다”며 “그러나 중국이 북한과의 공동 등재를 거부하고 단독 등재를 추진해도 국제적 제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적시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김기현 한나라당 의원에 의해 국회에서 공개됐다. 노무현 정권은 내부적으로는 중국이 백두산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국민들에게는 그러한 사실을 숨겼다는 이야기다.

이 문제가 황당한 이유는 2006년 당시 이종석 통일부 장관이 다름 아닌 ‘북한의 백두산 중국 비밀양도설’의 폭로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1999년 조·중변계조약 원문을 공개함으로써 이 문제를 처음 확인했던 장본인이었다. 당시 이종석 장관은 세종연구소에서 약 10년간 북·중 국경선 획정문제를 연구해 온 그 분야의 전문가였다.

1999년 11월 이종석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백두문화연구소와 한국교육가족산우회가 주최한 ‘백두산 지역의 영토에 대한 학술발표회’에서 ‘조·중변계조약과 조·중변계의정서 연구’라는 제목의 연구보고서를 발표하며 중국과 북한간에 비밀협상을 통한 영토분할의 내용을 자세하게 공개했던 것. 물론 이종석 수석연구위원의 의도는 ‘문화혁명기의 북·중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중국이 북한에 많은 양보를 했음’을 주장하기 위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제주해군기지 반대로 위험해진 이어도

통일한국의 영토가 북쪽으로는 백두산이 중국에 넘어가는 상황이라면 남쪽으로는 이어도와 제주도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2012년 3월 1일 이명박 정부가 제주해군기지 건설 사업을 예정대로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자 민주당은 대변인 성명을 통해 “국민을 제거 대상으로 간주하고 국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라며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강력 비난했다. 그러자 2일 뒤인 3월 3일 중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들고 나왔다.

한마디로 민주당-중국간에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할 만한 상황이었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대표인 류츠구이 국가해양국장은 관영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어도를 중국명 쑤옌자오(蘇岩礁)라고 언급하며 “중국관할해역에 있으며 감시선과 항공기를 통한 정기순찰 범위에 포함돼 있다”고 밝혀 큰 충격을 줬다.

류츠구이는 인터뷰에서 “중국 해양국이 관할해역에 선박과 비행기를 동원, 정기순찰하며 중국의 해양 권익을 지키고 법을 집행하는 체제를 마련했다”며 “현재 해양국 소속 감시선과 비행기의 정기 순항 범위에 이어도도 포함된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특히 류 국장은 “감시선 및 항공기의 정기 순항을 통해 외국 선박이 중국 관할해역에서 불법적인 과학 연구조사 활동을 하거나 자원 탐사 및 개발 활동을 하는 것에 대응해 중국의 해양 권익을 지키고 법을 집행하고 있다”고 언급함으로써 한국의 이어도 과학기지 설립 및 해양조사 활동 등에 대해 우회적으로 경고한 바도 있다.

중국의 이러한 이어도 영유권 주장이 나오던 시점은 바로 제주해군기지를 둘러싸고 진보진영과 민주당의 반대가 극에 달하던 시점이었다.

‘제주해군기지는 해적기지’라는 발언으로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고려대생 민주당 청년비례대표 장하나의 발언은 차치하더라도 민주당과 야권연대를 했던 심상정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의 이어도 발언은 ‘주권포기’에 가까웠다.

심 대표는 중국의 이어도 영유권 발표가 있은 4일 후 강정마을의 평화를 촉구하는 촛불집회에 참석해 “이어도, 그건 섬이 아니다. 암초다”라고 발언했다. 그것은 중국이 이어도를 암초라는 뜻의 쑤옌자오(蘇岩礁)라고 부른 것에 대한 화답으로 들렸다.

2011년 노무현 그룹의 핵심인사로 힘을 받던 한명숙 전 총리는 민주당 당대표 후보 연설에서 “평화의 섬 제주에 도민의 동의 없이 추진되는 강정해군기지 강행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명숙 전 총리는 노무현 정권의 총리 시절 ‘제주해군기지는 대양해군의 남방 항로 보호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라고 역설했던 장본인이었다.

중국의 이어도 영유권 주장이 궁극적으로는 제주도를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은 보수진영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상식이다. 중국은 서해남방에서 미·일 해군과 교전할 경우 임시적으로 사용할 해군기지가 없다.

여기에 제주도는 중국에 유일한 전략적 기지의 가치를 제공한다는 것이 안보전문가들의 견해다. 실제로 중국은 해군활동의 범위를 상정하는 제2의 해양 도련선(島聯線)에서 제주도를 포함시키고 있다. 이어도는 제주도에 미치는 중국 해양력에 결정적인 징검다리가 되는 셈이다.

이승만의 독도수호, 김대중의 독도유실

이어도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점은 제주도에 대한 중국의 관심이다. 제주도는 과거 돌, 바람, 여자가 많다는 3多에서 돈, 자동차, 중국인이 많은 新3多로 변환 중이다. 현재 제주도에 투자한 중국 자본은 8개 사업장, 총 3조원(투자계획금액 기준)이 넘는다.

싱가포르, 홍콩 등 화교권 국가까지 합하면 투자 규모는 5조5000억원에 육박한다. 중국인 관광객의 숫자는 2012년 108만에 달했다. 제주 주요 관광지는 중국인이 먹여 살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중국인 관광객 덕에 제주도에 관광 비수기가 사라졌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것은 연일 중국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제주시 연동의 ‘바오젠 거리’를 보면 안다. 그래서 2020년 즈음에는 제주도가 ‘중국의 정원’이 되리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 의미는 좀 더 깊은 뜻을 갖는다.

중국 정부는 제주도에 투자된 자국의 자산과 거주하는 중국인들의 안전을 이유로 언제든 한·중간에 갈등이 생기면 제주도에 군대를 파견할 명분이 있다. 이어도는 그러한 분쟁을 촉발할 수 있는 중국의 중요한 방아쇠가 된다.

이것이 두려워 이어도를 포기하게 되면 중국은 이어도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제주도에 자국의 해군선박 수리와 순시선의 임시 정박을 요구하게 되리라는 것은 상식이다. 역으로 미·일의 해군이 제주도를 활용할 수 있다면 이는 중국의 해양군사력 팽창에 중요한 견제장치가 된다.

이어도와 제주도는 중국의 대륙세력과 미·일의 해양세력이 맞닿는 곳이며 동시에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르는 전략적 지점이라는 인식은 진보진영에는 전무하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이고 한민족의 정통성은 북한에 있으며 중국은 그러한 북한과 피의 동맹국이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이어도, 서로는 NLL에 대한 진보진영의 영토주권 무감각증은 사실 동쪽의 독도라고 해서 특별하게 다르지도 않다. 무엇보다 한일간에 영토분쟁을 불러 일으키는 독도문제는 결정적으로 김대중 정부의 실책에 기인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독도를 배타적 수역으로 정했던 ‘이승만 라인’을 김대중 정권이 ‘한일 공동어로구역’으로 변경해 독도 인근 수역을 일본에 양보함으로써 독도영유권 분쟁에 결정적인 모멘텀을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노무현 정권이 서해북방한계선 NLL을 북한과 공동어로구역으로 제시했던 모델이다.

현재 독도문제에 관해 가장 활발한 영토수호 주장과 행동을 펼치는 쪽은 진보가 아니라 자유보수진영이다. 진보진영은 독도에 대한 적극적인 수호의지 천명보다는 정략적 차원에서 친일청산에 주력한다.

따라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대한민국’이라는 관념은 역설적이게도 ‘독도수호’라는 대한민국 영토수호의지에 적극 찬동하지 못하는 무의식을 자아낸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잠재된 반국가, 반체제 무의식이 ‘애국’이라는 행동을 제약하고 있는 것이다. 틈만 나면 친일청산과 일본 우경화를 비난했던 민주당과 야당이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격으로 자국 영토인 독도를 방문하는 것에 반대했던 배경도 그런 맥락에 놓여 있다면 지나친 과장일 것인가. 그러한 점에서 독도문제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혜안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이 발표된 1952년 1월 우리나라는 6·25 동란의 한가운데 있었고 그 사이에 서울은 두 번이나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가 탈환됐다.

이승만 라인의 의미

부산에 임시수도를 정한 대한민국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1월 18일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통해 한국의 연안수역의 수산자원과 해저 광물 보호는 물론 당시 전쟁 중인 공산국들과 일본에 당당하게 영토주권을 선언했다.

‘이승만 라인’ 이라고도 불린 이 선언은 한반도 국가가 5천년 역사상 최초로 바다의 국경선을 국제적으로 공포한 것이다. 이 평화선 안에 독도와 그 연해가 포함됐으며 외로운 무인도 독도는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적인 국적을 획득하게 됐다.

그러한 이승만 라인에 대해 일본은 “유례가 없다”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1982년 국제해양법상에 EEZ(Exclusive Economy Zone)라는 배타적경제수역이라는 개념의 등장으로 이승만 라인이 국제법상 부합되는 개념이었음이 증명됐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의 주장에 대해 1945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에 의한 ‘연안어업에 대한 선언’과 ‘해저와 지하자원에 관한 선언’ 그리고 아르헨티나(1946년), 파나마(1946년), 칠레(1947년), 코스타리카(1948년), 엘살바도르(1950년), 온두라스(1951년), 칠레, 페루, 에콰도르(1952년) 등 다른 나라에서 채택한 유사한 사례를 들어 반박했다. 놀라운 혜안이 아닐 수 없다.

그 혜안은 다름 아닌 ‘독립’이라는 자유주의 이념과 ‘주권’이라는 보수주의 통찰이 불러온 위대한 先覺이라고 하겠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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