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이 反美의 화염에 휩싸인 날
부산이 反美의 화염에 휩싸인 날
  • 이원우
  • 승인 2014.03.18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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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문화원 방화사건 3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1982)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은 오래 전부터 행정 요지의 역할을 수행해 온 곳이다. 지금도 한국은행 부산지점과 우체국, 용두산 공원 등이 자리한 이 부근에는 3층짜리 회색 건물 하나가 서 있다.

1929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건물로 신축된 이 건물은 건국 이후 1949년 미국 해외공보처 미문화원으로 용도가 변경됐다. 전쟁 통엔 미국대사관으로도 활용됐다가 다시금 미국문화원이 된 이 건물은 1982년에 와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게 된다.

3월 18일, 검은 연기와 함께 별안간 건물이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단순 화재가 아니었다. 같은 시각 800m 근방에 위치한 유나백화점과 국도극장에서는 유인물 수천 장이 흩뿌려졌다.

“살인마 전두환 북침준비 완료!”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광주시민을 무참하게 학살한 전두환 파쇼정권을 타도하자!”
“최후발악으로 전두환 정권은 무기를 사들여 북침준비를 이미 완료하고 다시 동족상잔을 꿈꾸고 있다!”
“88올림픽은 한국경제를 완전히 파탄 나게 할 것이므로 그 준비를 즉각 중단하라!”
“미국과 일본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한국에서 물러가라!”

수천 장의 유인물들은 이 사건이 미국을 겨냥해 치밀하게 계획된 것임을 입증해 줬다. 이른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다. 3월 18일은 ‘부미방’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이 일어난 지 32년 되는 날이다. 사건의 전후 맥락과 의미를 짚어본다.

3‧18로 돌아온 5‧18

한국의 학생운동사에서 1980년의 5‧18은 중요한 분기점이다. 3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종의 ‘성역’으로 남아있어 자유로운 담론이 불가능한 광주사태를 기준점으로 학생운동은 한층 더 극렬한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 지적할 점은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 반미(反美) 분위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미국이 광주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보냈다”는 유언비어가 당시의 광주에 일말의 기대감을 불어넣었다는 정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기대는 좌절됐고, 실망감은 반감(反感)으로 변했다. 5‧18은 미국에 대한 적대감의 꽃을 피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주한미군의 허락 없이 그 수많은 공수부대 요원들이 광주에 투입될 수는 없었다는 시각이 확산되면서 운동권 내부에 ‘반미’가 하나의 코드로 자리 잡았다. 주한미군 사령관과 주한 미 대사의 한국인 비하발언 또한 악감정을 키웠다.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는 거대한 반미 담론의 분기점이 이 무렵 형성된 것이다.

한편 당시 운동권의 상황은 별로 좋지 못했다. 1971년 박정희 정부의 위수령 이후 정부는 학내 서클들을 해체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명시적인 조직을 가지면 곧바로 덜미를 잡히는 구조 속에서 운동권 학생들은 서로를 패밀리(family)라는 은어로 호명하며 조직의 구성과 지휘체계를 철저히 숨기는(아예 정하지 않는) 무정형성(無定形性)을 유지했다.

무림(霧林)과 학림(學林), 그리고 영화 ‘변호인’으로 유명해진 부림(釜林) 사건에 공통적으로 붙은 수풀 림(林) 자가 바로 이 조직의 무정형성을 의미한다. 어디까지가 조직 내부고 어디부터가 외부인지 아무도 모르는 안개 속 같다는 의미다. 이 이름을 붙인 것도 학생들이 아니라 공안 당국이었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은 위수령 이후 약 10년간의 세월동안 지하에서 암약해야 했던 운동권들의 ‘안개’를 걷어냈다는 점에서도 치명적인 영향력을 획득한다. 보란 듯이 문화원 건물에 불을 지르고 유인물을 뿌리며 과격한 구호를 외쳤기 때문이다.

이후 광주, 대구 등에서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잇따랐다. 1985년에는 73명의 대학생이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을 벌였다. 반미와 방화, 농성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져나간 것이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1982)

생각보다 크게 번졌던 불

모든 것의 시작이 되었던 1982년 3월 18일의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김현장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는 부미방 이전부터 이미 학생운동권의 유명 인사이자 르포라이터였다. 광주사태 관련자로 수배를 당하던 상황에서 부산으로 넘어온 김현장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허진수라는 인물과 접촉한다.

부산의 한 호텔에서 김현장과 만난 허진수는 고신대학교 신학과 4학년 휴학 중인 문부식이라는 인물을 소개했다. 당시 운동권에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던 문부식이 거물이었던 김현장과 만나게 된 순간이다. 문부식은 이후 1982년 3월 부미방에 사용된 휘발유를 운반한 인물이자 사건의 주모자가 된다. 그의 자취방은 부미방에 사용된 각종 게시물들이 제작된 장소이기도 하다.

3월 18일의 상황을 시간 순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이날 정오경 부산대학교 약대생 최인순과 부산여대 재학생 김지희가 부산 미국문화원의 담장을 넘어 잠입했다. 2시를 넘어 도착한 문부식과 부산대학교 학생 류승렬은 휘발유를 배달한 뒤 흩어졌다.

직접 불을 지른 건 여학생들이다. 이후 고신대 신학과 김은숙, 그리고 같은 학교 의대생 이미옥이 합류해 휘발유 통을 들고 문화원 정문으로 접근했다. 이미 잠입해 있던 최인순과 김지희는 문을 열어줬고 여학생 4명은 미국문화원 문을 깨고 실내에 잠입해 휘발유를 쏟아 부었다.

그 뒤 밖으로 나와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솜사탕 모양의 방화봉을 꺼내 가스라이터로 불을 붙여 휘발유가 쏟아진 건물 안으로 던졌다. 문화원 건물은 순식간에 폭발음과 함께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여학생 4명은 대신동 방향으로 사라졌다.

한편 휘발유를 운반했던 문부식과 류승렬은 각각 건너편 건물과 유나백화점으로 향했다. 문부식은 건너편 건물 2층 창가에서 발화 장면을 녹화했고 류승렬은 유나백화점 4층에서 신창동쪽 도로를 향해 유인물을 뿌렸다. 국도극장 3층에서 미리 대기하던 박원식, 최충언 등 여러 명의 학생들 또한 유인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인근 주민들의 신고로 소방차가 도착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크게 번진 불은 문화원 건물 내부를 전소시켰다. 지하 및 건물 1,2층과 집기 등 당시 금액으로 1억8천7백만 원 상당의 막대한 피해액이 산출됐다.

사상자도 발생했다. 동아대학교 경영학과 장덕술(22)은 사건발생 4일 전 휴학계를 내고 군 입대 전까지 유학을 위한 공부를 위해 미국문화원 도서실을 찾았다가 이날 사망했다. 그 밖에 동아대학교 회화과 허길숙(24), 김미숙(24) 등이 각각 전치 3주의 화상을 입었다.

‘변호인’ 노무현, 등장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 전대미문의 충격을 안겨줬다. 사람이 사망할 정도로 불이 워낙 크게 번졌던 데다가 여러 명의 학생들이 극렬한 구호의 유인물까지 뿌렸기 때문이다. 고의성이 명백해 보였기 때문에 사건 직후부터 수사 종결까지 대중들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다.

정부는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하면서 범인들에게 현상금 2천만 원을 내걸었다. 이후 여학생들이 휘발유 통을 옮기는 장면과 문화원 주변을 맴도는 장면을 본 목격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문부식과 인상착의가 일치하는 사람을 본 목격자도 나왔다.

한편 문부식과 김은숙은 사건 이후 원주교구청의 최기식 신부에게로 갔다. 최 신부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활동하던 함세웅 신부에게 연락을 취했고 사건발생 14일 만인 4월 1일 두 사람은 자수했다. 출두 직전에는 결혼식을 대신한 예식을 올리기도 했다. 이후 공범 3명과 전단 살포자 3명, 의식화 학습을 함께 한 3명 등 11명이 검거됐다.

김현장이 등장하는 것은 4월 2일이다. 김씨는 천주교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의 보호를 받으며 2년 가까이 숨어 있는 형편이었고 부미방 당시에도 원주에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검거돼 결국 부미방의 배후조종자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문부식 또한 사형선고를 받았고 김은숙은 무기징역 형을 받았다. 범인들을 은닉했다는 이유로 최기식 신부에게도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이 선고됐다. 이로 인해 정부와 천주교 간의 미묘한 갈등구조가 형성되기도 했다.

한편 당시 피의자들을 변호한 사람들의 명단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변호인’ 노무현의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잘 나가는 세무 변호사에서 부림 사건을 통해 의식화돼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그는 당시 이돈명 변호사가 이끄는 부미방 변호인단의 말석을 차지했다.

전 국민과 세계 언론에 경천동지할 충격을 안겼던 부미방은 부림 사건과는 달리 변호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사건이다. 영화 ‘변호인’의 “제가 하께요, 변호인, 하겠십니더”라는 대사는 부림보다는 부미방에 쓰는 게 적절할지 모른다. 노무현 변호사는 부미방 변호로 인해 부림 사건 이상으로 큰 명성을 얻게 된다.

연행되는 최기식 신부(가운데)

‘각자의 길’ 걸어간 사건의 주역들

피의자들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선고까지 내려졌지만 실제로 사형을 당한 인물은 없다. 김은숙의 경우 약 5년을 복역한 뒤 1987년 출옥했다. 이후 ‘김백리’라는 필명으로 소설 창작과 번역 활동을 했으며 2011년 5월 암으로 사망했다.

사망 한 달 전에는 치료를 받고 있던 서울 녹색병원 로비에서 후원 음악회가 열리기도 했고 고은 시인은 그녀를 “숨은 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투병 당시 김은숙 후원에 앞장선 인물은 ‘통일의 꽃’ 임수경 의원이며 사망 직전 김은숙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어머니에게 수여되는 ‘오월 어머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녀가 한 것은 정말 민주화운동이었는가?

무고하게 사망한 피해자 故장덕술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아 보인다. 부미방을 민주화운동으로 치켜세우는 사람은 꽤 많지만 그에 비하면 장덕술에 대한 조의는 의례적인 수준이다. 1982년 3월 3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장덕술의 어머니) 홍복순 씨는 당국이나 문화원 측으로부터 아들에 대한 보상대책이 없어 더욱 서운하다고 푸념하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이후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지금은 흔치 않다.

대법원 확정판결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은 김현장과 문부식은 각각 징역 20년으로 감형 받은 뒤 김영삼 정부 때 특별사면을 받고 출옥했다. 이후 두 사람은 좌파 진영에 크고 작은 파문을 남기면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문부식의 경우 2002년 조선일보와 했던 인터뷰가 첨예한 논쟁을 야기했다. 2002년 7월 12일 ‘동의대 사건 민주화 인정은 납득할 수 없다’는 제목의 인터뷰에서 문부식은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동의대 사건 관련자 46명에 대해 화재 진상규명을 하기에 앞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한 것은 성급한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화운동 인정 여부는 공론 영역에서 충분한 논의를 통해 설득력을 갖추고 사회적 합의를 거쳐 이뤄져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했다는 점에서도 큰 파장을 야기한 해프닝이었다.

이 인터뷰는 9년이 지난 2011년 12월 문부식이 진보신당의 대변인으로 임명되는 과정에서도 다시 한 번 거론됐다. 우여곡절 끝에 문부식은 홍세화 당시 진보신당 대표의 비서실장 겸 대변인으로 임명됐지만 만 1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2012년 1월 사표를 냈다. 택시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모르냐”고 소리치며 기사의 얼굴을 두 차례 때렸다가 지구대에서 조사를 받은 일이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김현장 “역사를 증오심으로 풀 순 없어”

반면 김현장은 2007년 대선 무렵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경선 후보를 공개 지지한 것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2012년 치러진 19대 총선 직전에는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18번 강종헌에 대해 “북한 평양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남파된 간첩이었다”는 내용의 충격적인 증언을 해 파문을 일으켰다. 강종헌에게 공개편지까지 보냈지만 대답이 없는 상태에서 이석기 RO사태가 일어났고, 강종헌은 여전히 통합진보당에서 활동 중이다. 이석기가 국회의원직을 상실하면 금배지를 승계할 예정이다.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김현장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 나라의 역사를 증오심으로 풀 순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정치인들을 보면 민주화 운동했다는 사람들이 이래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내 주장이 아니면 옳지 않고, 상대방이 하는 건 덮어놓고 틀렸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그동안 뭘 위해서 투쟁을 했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거죠. 결국 가장 이기적이고 가장 고집스런 사람들이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얘기밖에 안 되는 거라고요.”

1982년 미국문화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은 현재 부산 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부미방의 그날을 기억하고 있는지 제2전시실에서는 ‘근현대 한미관계’에 대한 전시공간을 마련해두고 있다. 모든 세월을 견뎌낸 건물은 아무런 말이 없지만 한미관계, 민주화운동, 공안당국과 ‘투사’들의 줄다리기는 80년대의 기억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사건은 올해로 32주년을 맞는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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