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국가를 생각했던 어떤 CEO
언제나 국가를 생각했던 어떤 CEO
  • 이원우
  • 승인 2014.08.1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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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속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애국자 이건희’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와병이 길어지고 있다. ‘인사’를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점점 크게 들려온다. 이건희 체제 이후를 논의하고 후계 구도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끝에 대한 암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 시점에서 던지게 되는 하나의 질문이 있다. 우리는 ‘인간 이건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쉽게 추산이 안 될 정도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는 것 말고, 아버지(故 이병철 회장)로부터 그룹을 물려받아 제2의 창업을 했다는 것 말고, 그의 내밀한 인간적 측면에 대해서 말이다. 거의 없다. 그는 언제나 국가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경제적 공인(公人)으로서만 존재해왔던 까닭이다.

너무 멀리에 있는 그의 내면에 다가가기 위해 글만큼 좋은 수단은 없겠으나 아쉽게도 그것마저 쉽지가 않다. “인간의 목소리는 그 사람의 문장에 그대로 나타나는 법”이라고 말한 것은 시오노 나나미였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리더 이건희의 글을 읽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사실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건희의 문장은 그가 쓴 단 한 권의 책이자 에세이 모음집인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1997)’로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절판돼 시중에선 구하기 힘든 책이지만 다양한 주제와 진솔한 고민을 함축하고 있어 꽤 의미가 깊은 책이다. 누군가는 그를 돈에 눈먼 탐욕의 노예쯤으로밖에 보지 않겠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애국자’로서의 이건희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그의 문장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자동차사업 시작한 동력은 ‘나라 사랑’

이 책이 발간된 1997년은 IMF 경제위기가 세기말적 위기의식과 함께 한국 사회를 뒤흔들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이 책은 바로 그 시기 이건희 회장이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에세이를 모아놓은 형태로 구성돼 있다. 책 곳곳에서 드러나는 것은 ‘변화’에 대한 가히 편집증적인 목적의식이다.

“그저 그런 모든 사업과 기능을 한꺼번에 껴안고 운영하기에는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세계 무대를 주름잡는 우리 경쟁자들의 실력이 너무 강하다. 자기 실력과 성격에 맞는 사업과 기능만 가지고 경쟁하기도 벅찬 현실이다. 자신의 강약점을 냉정하게 파악해서 약점은 버리고 강점에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 잘 버리고 잘 집중하는 것, 이것이 미래가 요구하는 지혜이고 경영의 요체라고 생각한다.” (‘버릴 줄 아는 용기’ 中)

이 무렵 이건희 회장이 자동차 산업에 ‘집중’하고자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제 와서는 ‘이건희 회장의 유일한 실패작’으로 꼽히고 있지만 이 당시 자동차 사업에 대한 이건희 회장의 집중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이 사업이 갖는 ‘국가적 의미’에 대해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사실 나 개인이나 삼성의 처지만 생각하면 자동차 사업 때문에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수출로 먹고 살아야 하는 우리 경제구조와 자동차 산업 수준을 볼 때, 누군가는 반드시 새로 참여해서 그 수준을 한 차원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 나름대로 21세기 국가 장래를 위해 애국심으로 시작했던 자동차 사업이 세간에서 정경 유착이니 개인적 취미에서 시작한 것이니 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자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안타까움을 넘어 실망감마저 든다. 즉흥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고 10년 전부터 철저히 준비하고 연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자동차 사업에 거는 기대’ 中)

‘정치는 4류’ 발언의 뒷이야기

언제나 위기의식을 강조하는 이건희 회장이 했던 발언 중에는 세간에 파장을 불러온 발언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발언이다. 1995년 4월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주석과 만난 뒤 북경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나온 이 발언은 당시 상당한 후폭풍을 야기한 바 있다.

“사실 나는 말할 때 외교적 수사를 동원하거나 세련되게 하기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편이다. 중국 지도자들이 보여 준 국가발전에 대한 비전과 자신감, 열정에 대해 느꼈던 부러움과 우리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의 일단을 표출했다. (…) 사실 일본에서는 ‘기업은 1류, 행정은 2류, 정치는 3류’라는 말이 나온 지 이미 오래되었다. 내 발언의 진정한 취지와 의도는 덮어둔 채 마치 정부를 비판하고 정치권을 매도하는 내용으로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이 일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민족이 융성하고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는 데 어느 누가 사심을 갖고 이기주의에 빠질 수 있겠는가?” (‘북경 발언 유감’ 中)

책의 마지막 원고는 ‘사업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글은 선친 이병철 회장이 사업 성공의 요체로 운(運, 환경 변화에 적응), 근(根, 끈기와 집념), 둔(鈍, 기본에 충실하는 자세) 3글자를 꼽았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여기에 덧붙여 이건희 회장은 ①초심을 유지하는 것 ②신용을 얻는 것 ③사람을 소중히 하는 것의 세 요소를 덧붙인 뒤 마지막으로 ‘사회적 책임’을 거론한다.

“기업의 부실 경영은 기업주나 경영진만의 불행으로 그치지 않는다. 수많은 종업원과 그 가족의 생계, 협력업체의 경영에 부담을 주고 나아가 국민 경제 전체에 주름살을 만든다. 기업인은 조직에 나타나는 자만과 오만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사업이 자기 힘만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태만과 부패가 시작되고 고객이나 제품 개발에 소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기업에는 더 이상 앞날이 없어지는 것이다.”

영화 감상에 대한 얘길 할 때도, 동물 다큐멘터리를 경영과 연결 지을 때에도, 조선이 멸망한 이유를 언급함에 있어서도 결론은 ‘국가’로 맺는 것이 이건희식 글쓰기의 특징이다. 이걸 그저 무게 잡기 좋아하는 CEO의 허세로 본다면야 할 말은 없겠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일을 하다 쓰러진 그의 일생이 온전히 ‘국가경제’에 투입되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답 없이 누워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생각은 비슷한 영역을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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