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없다’ 우익의 서글픈 각자도생
‘부활은 없다’ 우익의 서글픈 각자도생
  • 이원우
  • 승인 2014.08.21 0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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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는 ‘공동체정신’과 결합될 수 없는가

2014년 6월 24일.
기골이 장대한 백발의 남자 하나가 정부 서울청사에서 열린 기자회견 단상에 올라섰다. 극도로 긴장된 표정으로 준비된 발언을 이어가던 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다”고 서두를 열었지만 이따금씩 감정이 고양된 듯 말을 멈추곤 했다.

“제가 총리 후보로 지명 받은 후 이 나라는 더욱 극심한 대립과 분열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대통령께서 앞으로 국정운영을 하시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또 이 나라의 통합과 화합에 조금이라도 기여코자 한 저의 뜻도 무의미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 저는 오늘 총리 후보를 자진사퇴합니다.”

어쩌면 많은 한국인들의 뇌리에서 이미 잊히기 시작했을지 모를 이 남자의 이름은 문창극이었다.

문창극 사태에 대한 논평을 이제 와 반복할 필요는 없다. 이미 끝난 일이요 엎질러진 물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지금 문창극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대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느냐다.

 

낙마하면 그걸로 ‘끝’ … 명예회복은 없다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 8월 15일 현재 포털사이트 네이버 검색창에 ‘문창극’을 기입했을 때 나오는 기사들은 지난 9일에 나온 것이 최신이다. 불과 한 달여 전 그에 대한 기사가 거의 분(分) 단위로 쏟아져 나왔음을 상기하면 격세지감(?)이다.

교회에서 신앙인으로서 했던 강연을, 그것도 마구잡이로 짜깁기해서 내보낸 뒤 결국 청문회조차 거치지 않은 뒤 낙마시켜 버린 일련의 정황은 ‘인격살인’이라는 말로밖엔 달리 표현이 안 된다. 그런 그가 대중의 스포트라이트 저편으로 사라진 것에 대해 좌익들이 한 마디 말이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정국 운영의 절차 하나하나가 첨예한 진영논리 속에서 전개되는 한국의 정치 상황 속에서 문창극은 ‘우익의 자충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관건은 ‘다음 타깃’이 누구인지에 집중될 뿐 이미 지나간 유행인 문창극에 더 이상 좌익들이 집착할 이유는 없다.

다만 우익들까지 문창극에 대한 일말의 관심조차 꺼버린 상황은 다소 기이하게 다가온다. 문창극에 대한 무차별적 보도에 대해 많은 언론사들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의 징계를 받았다는 뉴스가 전송됐지만 이조차도 그다지 이슈가 되지 않았다. 그의 억울함을 씻어줘야 한다는 움직임도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그는 우익들에게도 그저 흘러간 유행일 뿐인 것일까.

문창극은 기나긴 리스트의 끝자락에 지나지 않는다.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불쾌한 발언이 문제가 돼 직장(홍익대학교)에 사표를 내야 했던 김호월 前교수, 술자리에서 부적절한 농담을 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아나운서들에게 고소를 당한 강용석 前의원, 좌익들이 만든 단어인 종북(從北)이란 말을 통합진보당 이정희 일파에게 썼다가 1500만원 배상판결을 받은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 전교조 명단을 공개했다가 피소를 당해 교육감선거 보전비용까지 압류당할 뻔했던 조전혁 前의원에 대해 한국 우익들이 보여주는 반응은 ‘그래도 잘못은 했잖아’로 요약된다.

잘못을 했다는 이성적 판단을 하는 것과 그들의 실수에 대한 ‘맥락’을 살피고자 하는 배려심이 공존하는 풍경은 한국의 우익들에게선 기대하기 힘든 것일까. 대한민국에서 우익이 된다는 건 어쩌면 ‘절대로 버려진 카드가 돼선 안 된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 버려진 카드의 향후 거취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버려진 카드를 대하는 좌익의 방식

개인주의(個人主義)라고 명명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이 방식에는 사실 장점도 많다. 아니 장점이 더 많다.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스스로 지게 하는 자세야말로 거대한 스케일로 돌아가는 익명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합리적인 방식이다. 서로의 추악한 단점마저 ‘우리 편’이라는 이유로 감싸주겠다는 태도로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상황을 온전히 감당하기 힘들다.

그런데 웬일일까. 적어도 한국의 정치 상황만을 놓고 보면 ‘공동체주의’와 일말의 ‘의리’로 뭉쳐 있는 한국 좌익들이 훨씬 더 실속 있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이 짙다.

2010년 교육감선거에서 후보를 매수한 혐의로 교육감직을 상실한 곽노현 前서울시교육감은 여전히 좌익진영의 ‘쓸 만한 카드’다. 그는 최근까지도 교육문제에 대한 코멘트를 하거나 인터뷰를 하는 것으로 언론지상에 오른다. 언젠가 다시 ‘컴백’한다는 시나리오도 전혀 불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만약 문창극 前 총리 후보가 기독교 문제에 대해 발언을 한들 그 말을 들어줄 사람이 좌익은 고사하고 우익에도 과연 있을까?

새정치민주연합의 강기정 의원의 사례를 보자. 작년 말 청와대 경호원에게 폭력을 휘두르고도 적반하장으로 큰소리를 쳤던 사건은 세간의 화제를 모았지만 그가 받은 실질적인 불이익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국회의원이다. 역시 새민련 소속인 정호준 의원의 경우를 보자. 작년 말 국회에서 가족이 아닌 여성에게 ‘여보 사랑해’라는 문자를 보내 불륜 논란에 휩싸였던 그는 지난 5월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원내대변인 역할을 수행했다.

사생활 문제이므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라고 치부하기엔 새누리당 심재철 의원은 국회에서 휴대폰으로 ‘누드사진’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는 이유만으로 전국적인 망신을 당하고 국회 윤리위원회에까지 회부된 바 있다. 아직도 오마이뉴스는 ‘야동 심재철’이라는 어구를 넣어 기사제목을 뽑고 있다.

기업가 정주영이 ‘의심되는 사람은 뽑지 말고, 사람을 뽑았으면 의심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지만 현재 상황에서 그 말을 지키는 건 친(親)기업 우익이 아닌 반(反)기업 좌익들이다. 문제는 이 차이점이 단지 심리적·정신적인 차원에서만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한민국의 정치사회적 현실에도 3차원적인 영향을 미친다. 교육감선거가 바로 그 사례다.

단지 심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6·4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전국 교육감선거는 親전교조 계열 좌익들의 압승으로 끝났다. 17개 광역단체 중 무려 13곳의 교육감선거가 좌익 후보의 승리로 귀결됐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국민들이 좌익 교육감을 선택했다’고 말하지만 당선된 좌익 교육감 중에서 득표율 50%를 넘긴 후보는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이번 선거 결과는 ‘좌익이 아닌’ 후보들이 난립함으로써 파생된 필연적 패배였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서울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좌익 조희연 후보는 그의 이름이나마 알고 있는 서울의 유권자들을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인지도가 낮은 후보였지만 결국 당선됐다. 넓은 의미에서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 문용린 후보와 고승덕 후보가 표를 나눠 가졌기 때문이다. 좌익후보는 1명인데 그 밖의 후보가 여러 명이면 당연히 ‘작지만 방향성 뚜렷한’ 표들이 효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바로 조희연 당선이었다.

의문은 남는다. 왜 좌익후보는 1명밖에 없었을까? 좌익후보라고 해서 난립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데 왜 교육감선거에서는 일사불란한 ‘자체 단일화’가 이뤄졌을까? 사실 좌성향으로 분류되는 후보는 조희연 말고도 있었다. 교육부총리까지 지낸 윤덕홍 前 장관이다. 그의 출마 준비는 조희연 캠프와 상당한 마찰을 빚었지만 결국 윤 후보는 후보등록 전에 자진사퇴했다. 그리고 조희연 당선 후 교육감직 인수위원회의 지도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것을 ‘윈-윈’으로 표현한다면 지나친 처사일까.

조희연의 승리는 단순히 조희연 한 사람의 승리가 아니었다. 이것은 ‘좌익형 공동체주의의 승리’다. 철저한 진영논리적 사고가 선거라는 특수상황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실질적 권력의 획득을 가능케 한 것이다.

 

조전혁 “그들은 내가 고통 받길 원해”

교육감선거의 대패는 우익진영에 수많은 ‘버려진 카드’들을 양산시켰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시선이 가는 인물은 경기도교육감 낙선후보인 조전혁 前의원이다. ‘전교조 킬러’라는 닉네임으로 우익진영의 탄탄한 신임을 받고 있는 그였지만, 전교조 교사들의 이름을 공개했다가 교사 1인당 10만원씩 총 12억원이 넘는 배상금을 물어야 할 그의 처지는 고립무원(孤立無援) 그 자체다. 다음은 본지와 만난 조전혁 前의원의 말이다.

“저와 행동을 같이 해주셨던 분들에게 죄송하죠. 그 중에 한 양반은 우리가 잘못했고 선처를 바란다는 취지로 판사 앞에 가서 사과까지 했어요. 어느 정도 선에서 마무리를 해주길 바란다는 제스처였지만 전교조는 모든 금액을 꼭 받겠다는 취지로 항소를 했죠. 그쪽 변호사 중 한 명이 이런 얘길 하더군요. ‘우린 당신네들이 고통을 받길 바란다’고요.”

조전혁 구명운동이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는 기자의 말에 조전혁은 “나 때문에 피해 본 여러 동지들과 업체들의 구명운동을 하는 게 낫습니다. 그분들 물건 좀 더 팔아주고 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을 받았다.

이런 그의 겸양(?)은 2010년 조전혁 콘서트의 실패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교조에 대항하는 그의 취지에 공감하고 응원한다는 의미로 추진된 이 콘서트는 출연을 약속한 가수들이 전원 불참하는 등 좌익들의 비웃음만 산 채 25분 만에 마무리된 바 있다. 그 후로 다시 한 번 곤경에 처한 조전혁 前의원이 주변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 마디를 하지 않는 정황도 어쩌면 이와 같은 ‘교훈’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우익은 실패자를 돕지 않는다는 바로 그 뼈아픈 교훈 말이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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