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이지 않는 ‘두뇌 유출’의 행렬
끊이지 않는 ‘두뇌 유출’의 행렬
  • 이원우
  • 승인 2014.08.2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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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빨아들이는 미국, 인재 내보내는 한국

로마제국의 성공 비결에 대해 논할 때 반드시 빠지지 않는 사항이 하나 있다. 인재 등용의 ‘개방성’이다. 무수한 식민지를 거느렸던 로마는 정복지의 시민들에 대해 인종이나 종족에 상관없이 시민권을 부여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기준은 능력과 실적이었다. 태생과 관계없이 대우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로마제국에 대한 탄탄한 충성심으로 연결됐고, 카르타고의 한니발이라는 희대의 장수를 로마제국이 무찌를 수 있었던 비결로 작용하기도 했다.

‘최종 자원은 인적 자원’이라는 속설로도 증명되는 이와 같은 사례는 로마 이외에도 많다. 칭기즈칸이 세계를 정복했을 때, 조조가 중원을 제패했을 때도 인재의 개방적인 등용은 핵심적인 기능을 발휘했다. 21세기에는 어떨까. 우리가 흔히 듣는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이라는 말은 미국의 개방적인 인재흡수 정책과 궤를 같이 한다.

‘옛날 같지 않다’는 평가를 들으며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아성마저 위협받고 있는 것이 현재 미국의 실상인 것은 맞지만 그들은 여전히 인재 흡수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인재들이 ‘같은 값이라면 미국’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 비자에는 총 50개의 종류가 있다. 이 중에서 미국 이민법 101조 a항 15호 H목에 규정된 H-1B 비자는 미국이 전 세계의 인재를 빨아들이는 강력한 유인책으로 활용되고 있다.

 

H-1B이라는 이름의 ‘기회’

미국 내의 미국 기업에 외국인이 취업할 때 발급되는 취업비자의 일종인 H-1B는 전문기술을 가진 외국인(간호사 제외)이 미국에서 단기체류하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도입됐다. 미국은 석사와 박사 2만명, 학사 6만5000명에게 매년 H-1B 비자를 발급하고 있다.

로마의 시민권이 당시 제국 주변의 속주들에 ‘선망의 대상’으로 인식됐듯 기회를 찾고자 하는 세계인들에게 H-1B 비자는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매년 ‘매진 사례’가 반복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풍경이다. 세간에는 H-1B 비자를 ‘로또 비자’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2013년 H-1B 비자는 5일 만에 조기 소진된 바 있으며 ‘닷새만의 매진사례’는 2014년에도 정확히 똑같이 반복됐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미국 이민서비스국(USCIS)은 컴퓨터 추첨을 통해 비자 이용자를 선별했다. 경쟁률은 1.5대1 수준. 미국은 현재 전체의 65%를 차지하고 있는 가족이민을 줄이고 취업이민의 비중을 늘리는 쪽으로 이민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단순히 미국인의 숫자를 늘리는 것보다는 ‘인재’에 집중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는 셈이다.

美 상·하원 “한국인 전용비자 추진”

H-1B 비자는 아시아, 그 중에서도 중국과 인도인들에게 많이 할당된다. 워낙 인구가 많은 나라들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미국과 FTA를 맺고 있는 한국은 1만5000개의 한국전용 E-3 비자를 요구하며 H-1B 비자가 줄 수 있는 혜택의 폭을 넓히려고 시도한 바 있다. 미국은 역시 FTA를 맺고 있는 호주인들에 대해서는 E-3 비자를 열어 매년 1만500명에게 전문직 취업비자를 할당하고 있다.

미국에 취업을 원하는 한국인들에게 희망적인 소식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작년 봄 미국 하원은 한국인 전문직에 ‘E-4 비자’를 발급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을 초당적으로 발의했다. ‘한국과의 동반자 법안’(Partner with Korea Act, HR1812)으로도 불리는 이 법안은 국무부로 하여금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전문직 인력에 H-1B 비자와 유사한 E-4 비자를 연간 1만5000개 내주도록 한다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한 해가 지난 지금 법안은 여전히 연방하원에 계류 중이지만 공동발의자로 동참한 의원의 숫자는 100명을 돌파했다. 공화당 의원이 51명, 민주당 의원이 49명으로 이 법안에 대한 초당적 지지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다만 중간선거 일정 때문에 신속한 처리는 힘들 수도 있다는 분석이 있다. 만약 올해를 넘기게 되면 114차 의회로 회기가 넘어감으로써 법안은 자동 폐기된다.

한편 지난 24일에는 연방 상원에서도 연간 1만5000개의 한국인 전용 전문직 취업비자를 신설하는 법안(S2663)이 상정됐다. 공화당의 조니 아이잭슨 의원(조지아)이 발의한 이 법안에는 같은 공화당의 로이 블런트 의원(미주리)과 민주당 마크 베기치 의원(알래스카)이 공동발의자로 참여했다. 역시 초당적인 발의라는 점이 눈길을 끌며 전문 인력을 영입하는 문제에 대한 미국의 ‘의지’를 엿보게 한다.

미국이라는 기회의 땅에서 취업해 돈을 벌고 꿈을 펼치는 것은 개인 차원에서는 매우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국가 거시적 차원으로 눈을 돌리면 이와 같은 패턴이 고착화될 때 국력저하의 악순환 고리가 형성될 수도 있다. 대한민국의 교육 인프라 그 자체가 미국에 고급인력을 공급하는 ‘베이스캠프’로 활용되고 말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실력 있는 인재들이 당당하게 해외 진출할 수 있는 문을 넓히되 한국 내부의 환경 역시 미국 못지않은 ‘인재 블랙홀’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진화시킬 필요성이 제기된다.

 

韓 석박사들 “솔직히 돌아오고 싶지 않다”

현실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하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기를 원하는 고급인력이 꾸준히 존재하는 반면 미국에서 공부한 고급인력이 한국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경우는 계속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두뇌 유출’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이유도 바로 그래서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일하고 있는 30대 중반의 어느 한국인이 최근 자신의 블로그에 남긴 한 편의 글은 많은 이공계 학생들의 공감을 샀다. 유학 목적으로 미국에 갔지만 결국 그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한 그는 “한국에서는 벤처의 모험에 뛰어들기 쉽지 않아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고 말하며 한국과 미국의 서글픈 차이를 대비시켰다. “정형화된 인재를 요구하는 대기업 이외에 갈 곳이 없는 한국의 산업구조에서는 창조적인 인재가 오래 남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골자였다.

한국 최고의 기업으로 꼽히는 삼성전자마저 관료주의의 함정에 빠졌다는 지적을 듣는 한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쉽게 부정하기 힘든 일침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례는 한국 출신의 이공계 석박사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대부분의 인재들이 미국 유학을 선호할뿐더러 일단 해외로 나가면 국내에 돌아올 생각을 접고 만다. 미국이 자신의 꿈을 펼치기에 훨씬 더 용이한 국가라는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경직된 연구 문화” … 떠나는 발걸음 재촉

미국과학재단(NSF)이 2008년 ‘미국 박사학위 취득자’의 국제 유동성을 조사한 바를 확인하면 이와 같은 현실은 수치로도 증명된다. 미국에서 과학기술보건 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한 한국인 가운데 54%가 미국에 남아 있고 44%만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자의 비율은 절반에도 못 미친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이 2006년부터 3년마다 발표하는 ‘이공계인력 유출입 실태조사’를 보면 2006년 1만866명이었던 이공계 대학원생 해외유출은 2011년 1만2240명으로 증가했다. 연평균 2.4% 증가한 수치다. 이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에 대해 미국과 일본에서 유학 중인 이공계 석박사들은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되는 직장문화와 연구 환경 때문’이라는 응답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인프라와 문화의 차이가 인재 유출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평생을 공들여 애써 공부한 뒤 한국에 돌아와 봐야 바늘구멍 같은 교수직 몇 개, 인원이 동결된 정부출연 연구소, 연구 분야가 조금만 달라도 뽑지 않는 기업 연구소 등의 ‘좁은 문’이 열려 있을 뿐이다.

반면 미국에는 얼마든지 실패를 용인하고 연구에 ‘미치게’ 만드는 미국 DARPA(국방고등기술연구소)와 같은 혁신적 연구기관들이 존재한다. 둘 중 이공계 석박사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은 어느 쪽일까. 조금만 감정을 이입해서 생각해 보면 사실 정답은 너무도 명백한 것일지 모른다.

작년 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내놓은 2012년 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PISA)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수학 1위, 읽기 1~2위, 과학 2~4위의 성적을 거두며 명불허전의 성과를 자랑했다. 우수한 두뇌를 갖고 있는 이들의 미래는 어떤 국가에서 펼쳐지게 될까.
수학·과학 교육의 기본적인 틀마저 무너지고 있는 한국의 현주소는 지반이 붕괴되는 싱크홀처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땅 위에 올라서 있는지도 모른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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