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의 공든 탑, 누가 무너뜨렸나
대우의 공든 탑, 누가 무너뜨렸나
  • 정용승
  • 승인 2014.09.0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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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과의 대화> 출간과 함께 불거진 ‘대우 논쟁’

기억은 미화되게 마련이다. 같은 일도 한 사람에게는 나쁜 기억으로 또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연인이 이별을 겪은 후 한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다른 한 사람은 착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개인이 갖고 있는 가치와 기준은 다르기 때문에 같은 기억을 두고도 다른 해석이 나올 수는 있다. 

문제는 ‘제3자’다. 사건의 변방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주변인은 속내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당사자가 말해주는 정황을 바탕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두고도 여러 해석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김우중과의 대화> (신장섭, 북스코프)

20세기 말 우리나라 재계 2위까지 올라섰지만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대우’에 대해서도 무수한 논란이 있었다. 그리고 21세기인 지금, 다시 이 논란들이 고개를 들고 있다. 불씨를 붙인 것은 한 권의 책 <김우중과의 대화> (신장섭, 북스코프)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학교 교수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간의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은 대우의 설립부터 해체까지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는 한국의 미래에 대한 김 전 회장의 철학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이 주목받는 이유는 김 전 회장의 입을 통해 ‘대우의 해체’에 대해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으로 일으킨 그룹이 무너지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본 ‘실패 당사자’의 말이기에 더 시선을 끈다.

책 안에서 가장 지배적인 감정은 김우중 전 회장의 ‘억울함’이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대우는 정부의 정책 때문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이른바 대우의 해체는 정부 관료들의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김 전 회장은 “IMF 역시 정부가 자초한 일”이며 “그때의 미숙한 정책 때문에 1인당 GDP 3만달러 시대로 가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세르지오 호샤 한국GM 사장은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후 한국경제를 발전시켰다”며 “리더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김 전 회장의 “대우자동차가 GM에 헐값으로 넘어간 뒤 한국은 30조원이라는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는 발언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일각에서도 “대우의 해체는 정부의 탓이 아닌 시장에 적응하지 못한 대우의 잘못”이라며 김 전 회장의 주장에 맞불을 놨다.

세계시장을 쉽게 판단했던 YS정부

대우그룹은 사라졌지만 대우그룹에 대한 논란은 아직 한국 사회에서 유효하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관치경제냐 시장경제냐’의 문제로까지 연결되지만 방향성에 대한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서 대우 해체의 전말에 대해 우선 살펴보자. 어쩌면 논란의 바깥에 존재하는 주변인들에게는 이 문제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양쪽의 주장만으로 대우 해체에 대해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문제는 대우와 당시 DJ정부 간의 문제로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외환위기’라는 배경적 요소가 논란의 주요 변수이기 때문이다.

많은 국민들은 외환위기 때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노숙자’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국내시장을 주름잡던 굴지의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쓰러졌다. 실업자들이 급증했고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심각한 수준으로 치달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경제성장을 낙관하고 있었던 국민들은 말 그대로 ‘쇼크’에 빠졌다. 한때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꼽히며 일본을 맹추격하던 한국의 신화도 종언을 고하는 분위기였다.

어디서부터 잘못 됐을까.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춰보자. 하나는 당시 YS정부의 경제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경제 흐름이다. 먼저 YS정부의 경제기조를 볼 필요가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임기 전부터 ‘신경제’를 기본방향으로 제시했다. 한국시장을 더 개방해 세계화에 발맞춰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과감한 개혁들이 있었다. 금융실명제를 실시했고 공기업 민영화, 민간주도 경제 등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 임기 중 OECD 가입은 김 전 대통령이 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김 전 대통령은 ‘골수 정치인’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26세에 정치에 입문해 7선을 하며 얻은 것은 ‘정치적 감각’이었다. 대통령이 돼서도 그는 정치적 감각으로 대부분을 결정했다. 즉 김 전 대통령의 과감한 경제 드라이브는 다분히 정치적인 판단으로 내린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세계화’라는 구호를 ‘Globalization’이 아닌 ‘Segyewha’로 표기한 것은 그가 얼마나 정치적 수사에 강한 ‘정치인’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이런 김 전 대통령의 미숙한 경제 감각은 결국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어쨌든 YS정부의 경제정책은 그럴 듯해 보였으나 무리한 시장개방은 결국 이렇다 할 조치도 취해보지 못한 채 ‘IMF 구제금융 신청’이라는 백기를 흔들게 만들었다.

한편 YS정부 때의 세계경제는 말 그대로 ‘혼돈’이었다. 투기세력들이 이제 막 성장하는 신흥 아시아 국가들을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세계시장에서 걸음마를 시작한 신흥국들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투기세력들의 공격은 태국부터 시작됐다. 이들은 바트화를 빌려 달러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빠르게 태국을 잠식해갔다. 바트화의 가치가 폭락하자 태국 정부가 금리를 올리는 강수까지 두면서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결과는 투기세력의 승리였다. 승리한 투기세력들은 같은 식으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공략했다.

이때 YS정부가 적절히 대처했다면 큰 피해 없이 넘어갔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투기세력이 들어오기 전에 금리를 올려 미리 방어한다든지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환율을 정상화 시켰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YS정부는 이 국면에서도 선제적 대처보다 정치가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이전 정권인 노태우 정권과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기에 급급했다. 또 1997년 1월 한보철강의 부도를 시작으로 기업의 도산이 매일같이 일어나자 ‘부도금지’ 지시를 내리는 등 오히려 국제적인 신뢰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자초하기도 했다. 야당도 가세해 노조의 편을 들며 정부를 깎아내리는 행동을 보이고 노동개정법을 반대하는 등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모습만을 보였다. 총체적인 난관이었다.

‘넓은 세계’에서 ‘할 일’이 많았던 김우중

이쯤에서 김우중 전 회장의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며 ‘신화’라 일컬어지는 여느 기업가와 마찬가지로 김 전 회장도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왔다. 우즈베키스탄의 키리모프 대통령은 그를 가리켜 ‘킴기즈칸(김우중 + 징기스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국의 징기스칸 김 전 회장의 일화를 몇 개 들여다보면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왜 그가 킴기즈칸으로 불렸는지, 왜 신화가 됐는지 말이다.

그는 처음부터 대우를 설립해 경영자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 4학년 때 유학을 고민하던 중 한성실업 김용순 사장의 부탁으로 회사 일을 도운 것이 그의 ‘정복’ 본능을 건드렸다. 시간을 보내려고 들어간 회사였지만 막상 들어가서 일을 해보니 행정적 문제가 빠른 업무를 방해하고 있는 게 보였다. 예를 들어, 같은 서류 양식을 매번 만들어 제출하는 잡일이 업무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김 전 회장은 이런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몇날 며칠 야근을 하며 서류 양식을 만들어 놓았다. 은행업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은행은 여직원이 서류를 직접 쳐서 보고하는 식이었다. 항상 이런 식으로 업무가 늦어지니 김 전 회장은 담당하는 여직원과 친해져 자신들의 서류를 항상 먼저 처리할 수 있도록 부탁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한성실업은 증권회사에 손을 댔다. 하지만 증권파동을 맞아 망할 처지에 놓이자 김용순 사장은 김우중을 불러 해외여행 겸 유학도 알아보라며 비행기 표를 줬다. 이 기회를 김 전 회장이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예전의 대우는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로 하고 여행을 떠났지만 여러 경유지를 거치며 외국의 경제상황을 본 후 ‘킴기즈칸’은 귀국을 결심했다. 결국 처음에는 여행 목적으로 떠났던 여정이 돌아올 때는 37만달러 가량의 계약을 맺고 돌아온 비즈니스 출장으로 변해 있었다. 김 전 회장의 나이 27세 때의 이야기다. 한성실업은 다시 부활했다.

그리고 이렇게 20대의 후반의 나이에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던 김 전 회장은 30세의 나이에 한성실업을 나와 대우를 창업했다. 경영자가 된 후의 김 전 회장의 일화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이미 유명해진 ‘캐나다 대구탕 일화’만 해도 그의 경영 스타일을 유추해볼 수 있다.

캐나다 출장을 간 김 전 회장 일행은 우연히 들른 한국식당에 들렀다. 그 자리에서 혼자만 대구탕을 시킨 직원에게 “왜 대구탕을 시켰나?”라고 묻자 그 직원은 “여기 대구가 유명합니다”라고 답했다. 대답을 들은 김 전 회장은 그 지역을 맡고 있던 직원에게 “그렇게 유명하면 상품화해 수입을 하든가 수출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안 하고 뭐했나”라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다.

어쨌든 ‘브레이크 없는 차’와도 같은 성격의 김 전 회장이 대우를 어떻게 경영했는지는 굳이 여러 자료를 보지 않아도 될 법하다. 김 전 회장이 주장했던 ‘세계경영’과 ‘탱크주의’로도 경영철학을 엿볼 수 있다.

장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지버튼이 없는 ‘킴기즈칸’식 경영은 결국 대우를 해체의 위기로 몰고 간 요소 중 하나로도 손꼽힌다. 대표적인 사례가 GM을 제치고 폴란드의 국영자동차회사(FSO)를 차지한 것이다. 또 동구권과 신흥시장에 자동차 공장을 무리하게 진출시킨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김 전 회장은 FSO를 인수하기 위해 FSO의 요구조건(2만 명 직원 전부고용, 지속적인 투자)를 모두 받아들였다. 인력의 30%만 흡수하겠다는 GM과는 다른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김 전 회장은 동구권과 신흥국의 시장이 급속히 성장할 것이라고 판단했기에 이런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1997~1998년 두 해 동안 해외 공장의 가동률은 30~40%에 머물렀다. 그렇다고 인력과 기계를 놀릴 수도 없었다. 결국 밀어내기 식 판매를 하게 됐고 대우자동차의 재무 상태는 악화됐다. 이런 과정에서 ‘시장개혁’을 외치는 야당이 정권을 잡게 됐다. 이는 대우 입장에서는 ‘엎친 데 덮친’ 상황이 됐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김대중 VS 김우중

김우중 전 회장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좋았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정도다. 그런데 왜 김 전 회장은 대우가 ‘기획된 해체’였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물론 김 전 대통령이 ‘시장개혁’ ‘재벌개혁’을 가지고 대통령이 됐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이 있을 수도 있다.

사실 더 심각한 갈등의 골은 정부 관료들과 김 전 회장 사이에 존재했다. 김 전 대통령 임기 초반에는 대통령이 김 전 회장을 가리켜 ‘경제 대통령’이라고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실제로 많은 부분에 있어서 김 전 회장이 대통령에게 조언과 의견을 냈었고 그런 의견을 김 전 대통령이 좋아했다.

특히 김 전 회장이 1998년 주장했던 ‘500억달러 무역흑자론’이 맞아 떨어지자 원래도 가까웠던 사이는 더 돈독해졌다. 500억달러 무역흑자론은 “수입을 줄이고 수출에 총력을 실으면 IMF를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정부의 공식적인 흑자목표는 20억달러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김 전 회장은 390억달러 흑자를 만들어냈다. 물론 정부의 독려와 수출기업들의 수출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김 전 회장의 아이디어가 적중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부터 DJ가 아닌 정부 관료들과 김 전 회장의 사이는 멀어져갔다. 정부 관료들의 눈에는 김 전 회장이 ‘대우 무역금융을 받으려는 의도로 대통령에게 접근’하는 기업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관료들이 보는 500억달러 흑자는 비과학적이고 뜬금없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강봉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500억달러 무역흑자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맞지 않는 얘기”라고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강 전 수석은 “김 회장은 수출을 늘려 무역흑자를 낸다고 했지만, 실제 그해 수출은 늘기는커녕 오히려 전년보다 2.3%(38억달러)줄었고 수입이 35.5%(514억달러)나 급감한 탓에 무역흑자가 커졌다”고 설명했다. (김우중 비사, 한국경제신문)

멀어진 사이는 쉽게 가까워지지 않았다. 김 전 회장은 대통령과의 면담을 하고 싶다고 측근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지만 관료들이 중간에서 차단하곤 했다. 또 이 과정에서 IMF가 제안한 BIS비율 8%, 부채비율 200%은 대우가 쓰러지는 데 한 몫을 담당했다. 당시 부채비율이 400%에 가까웠던 대우에게는 뼈아픈 요구였던 까닭이다. 당시 5대 재벌기업의 평균 부채비율은 500% 정도였다. 이렇게 대우는 ‘분식회계 21조 규모’라는 오명을 남기고 해체됐다.

지금도 대우의 해체에 대해서는 무수히 많은 해석이 존재한다. 누군가는 관치경제가 대우를 죽였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대우가 자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미 대우가 사라지고 없는 지금, 그 잘잘못을 가리기엔 늦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케케묵은 논쟁들 사이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는 것은 김 전 회장의 말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항상 도전의식을 강조했던 그의 말은 일자리가 없어 취직을 못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김우중에 비판적인 사람조차도 김우중의 ‘명언’은 인용한다. 김우중은 그렇게 한국경제의 ‘신화’로 한국인들의 가슴에 족적을 남겼다.


정용승 기자 jeongys@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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