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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기즈칸’이라 불린 사나이 김우중

[한국 기업 영웅들 ①] 미래한국l승인2015.01.19l수정2015.03.20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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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한국  futurekorea@futurekorea.co.kr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 한다. 전쟁 때 장수가 영웅이 되듯이 산업을 한창 일으키던 경제난국시대에는 기업가가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해방 이후 한국이 농업경제에서 산업경제로 탈바꿈하던 시기에 불세출의 기업가들이 영웅으로 대접받던 시대가 있었다. 그들이 이뤄놓은 텃밭에서 작금의 현실은 이미 ‘3세경영시대’로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한국의 기업을 세계적 기업으로 만든 영웅들의 입지전적 이야기는 우리에게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비틀거리는 ‘3세경영시대’에 다시금 1세 경영인들의 기지와 용기와 놀라운 추진력은 미래의 희망이 되는 ‘경영의 지혜’로서 본받을 바가 매우 많다. <편집자 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사람들은 ‘킴기즈칸’이라 불렀다. 무엇이 그를 칭기즈칸처럼 느끼게 만들었을까. 바람처럼 나타나 속전속결로 세계를 휩쓰는 무서운 속도감. 실제로 그랬다. 김우중은 칭기즈칸처럼 세계를 누비며 비즈니스 세상을 바꿔나갔다.

칭기즈칸을 연상시킬 정도로 세계 시장을 점령해 가는 새로운 방식의 성공 신화는 경영학 교과서에 담아야 하는 새로운 경영 성공 사례가 될 정도였다. 김우중의 세계경영은 이후 국내 기업들이 해외에 진출할 때마다 연구하는 최고의 경영지침서가 됐다. 경영학의 교과서를 새로 써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아시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상황은 급반전한다. 일순간에 대우는 붕괴하고 만다. 김우중 회장도 종적을 감췄다. 화려했던 신화와 찬사도 함께 사라져갔다. 돌풍처럼 일어나 세계를 뒤흔들던 글로벌 기업가 김우중은 이미 역사 속으로 묻혔다.

그가 만든 기업들이 아직 건재하지만, 그의 명성은 바람처럼 사라진 지 오래다. 오랜 침묵을 깨고 김우중이 입을 열었다. “정부의 기획 해체, 대우는 타살 당했다”는 그의 외마디 외침에, 그러나 그 메아리는 작았다. 왜일까? 지금 그의 존재는 환영받지 못한다.

정치권, 정부관료, 언론, 학자들 모두 외면하고 싶어 하고 마땅치 않아 한다. 그의 경영방식에서 더는 배울 것이 없다고 느끼는 것일까. 이제는 구시대의 전형이라 치부하고 싶은 것일까.

우리 기업사의 한 획을 그은 김우중은 분명 ‘세계경영의 징기즈칸’다운 영웅이었지만 지금 그의 뒷모습은 초라하다. 하지만 역사적 평가까지 초라할 이유는 없다.

비록 그의 세계경영이 완성을 목전에 두고 멈춰야 했지만 그의 선구자적 시도의 의미는 이대로 사장시키기 아까운 게 사실이다. 김우중 회장은 시대를 앞서간 리더였기에 지금도 그의 스토리에는 배울 점이 많다. 다시 그가 창조해 냈던 업적들을 되돌아보는 것은 마치 우리의 역사 유산을 찾는 것처럼 새롭고 신비스런 일이다.


시대적 환경이 요구하는 영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시대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그 시대에 걸맞은 영웅이 태어난다. 시대적 환경이 요구하는 영웅이 있다. 우리나라는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대기업이 태어날 수 있었다.

자연히 그룹 총수도 여러 명 나왔다. 먼저 제조업 분야에서 이병철, 정주영, 구인회 등 뛰어난 기업가들의 활력이 컸다. 삼성, 현대, LG는 세계로 뻗어 나가는 대한민국의 상징적 기업이었다. 그 뒤를 김우중이 이끄는 대우가 뒤따랐다. 처음에는 뒤쫓았지만 점차 추월해 나갔다.

무역을 통한 경제성장은 개발시대의 시대정신이자 국가적 합의였다. 그 시대를 이끌던 지도자인 박정희와 기업 총수 사이의 공감대가 있었다. 사업보국이었다. 그 큰 그림 속에 정치와 경제는 하나가 돼 힘을 발휘했다.

우리나라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정경유착이 올바른 방향으로 전개됐기 때문이다. 정경유착이 자신들의 이권을 얻기 위해 다른 경쟁자를 억압하는 것으로 이뤄진다면 이는 실패의 길이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가 경쟁의 폭을 넓히고 더 치열한 경쟁이 이뤄지도록 함께 노력하는 정경유착은 바람직하고 좋은 것으로 모두를 이롭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경유착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만 생각해 정치인들은 기업인들을 무조건 멀리하려고 하고 심지어 적대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하지만 선진국 정치인들은 기업가들과 함께 자국 기업의 사업 기회를 넓히기 위한 외교전을 함께 펼치는 성숙한 정치를 펴고 있다.

김우중은 국가의 부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모든 것을 껴안았다. 부실기업을 인수하라고 하면 인수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일을 거절하지 않았다. 정부가 맡긴 부실기업들이 그의 손을 거쳐 우량기업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부실기업 해결 청부사’라는 별명도 얻게 된다. 김우중의 말이다.

“우리가 정부와 가까웠던 건 맞는 얘기예요. 그런데 그게 정부가 골치아파하는 일들을 해줬으니까 그런 거지 우리가 로비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내가 중화학산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정부에서 나한테 떠맡기다 보니까 수의계약이 된 거지요. 그리고 경제발전을 하려면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서 잘해야 돼요. 합심해서 노력하는 걸 놓고 정경유착이라고 매도하면 안 됩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기업가 정신 빛나다

그는 최고 지도자와의 독대에 강했다. 박정희와도 수없이 독대했다. “우중아!”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웠다. 물론 김우중이 대구사범학교 스승(김용하)의 아들이라는 요인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김우중의 탁월한 추진력과 경영능력 그리고 국가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가 박정희와 김우중을 끈끈하게 연결한 공감대였다. 최고 지도자와 바로 독대하면서 문제를 단 시간에 해결하는 경영 방식은 세계경영에서도 빛이 났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다. 고도성장을 꿈꿨던 우리 사회는 김우중이라는 뛰어난 기업가를 원했다. 그는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거칠 것 없이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김우중의 리더십은 우리 사회가 가장 필요로 했던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에너지였다.

대우는 해외 건설 사업의 후발주자였다. 김우중 회장은 리비아 남단 국경지대의 사막 한복판에 비행장을 건설하기로 계약했다. 이탈리아 건설업체도 시공을 포기한 이 공사는 무모한 계약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김우중은 밀어붙였다.

1979년 12월 22일 대우 선발대 50여 명이 리비아의 황량한 사막에 도착했다. 이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죽음의 땅인 황량한 사막뿐이었다.

그러나 선발대는, 후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심야에도 대낮같이 불을 밝히고 불철주야 작업에 몰두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리비아의 우조비행장은 불퇴전의 용기와 개척정신으로 최단 기일 내에 건설한 리비아 최대의 자랑거리가 됐다. 첫날부터 모래바람과 싸워야 했던 그들은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각오로 도전했다.

대우는 그 이후 20년 동안 리비아 도로의 1/3을 건설한다. 주택 1만5000세대를 짓는다. 학교도 270개 지었다. 대우에는 김우중과 함께 역사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는 역사를 이룬 성취감과 자부심, 그리고 뿌듯함이 있었다. 대우가 해체된 지도 한참 지났지만 지금도 그들은 모여 과거를 이야기하고 그 영광의 순간을 나눈다.


정치 리스크를 외면한 대가는 컸다

지금도 김우중의 유산이 살아 숨 쉬는 우즈베키스탄에선 전설 같은 얘기가 많다. 1990년대 중반 대우의 한 임원이 우즈베키스탄의 고위 공무원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

임원의 비행기 출국 시간이 됐다. 그 임원이 “비행기 출국 때문에 일어서야 한다”고 하니, 고위 공무원은 공항에 전화를 걸어 “비행기 이륙 시간을 늦추라”고 했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어서 놀랐지만 대우의 위상이 그 정도로 높다는 생각에 뿌듯해 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대우가 직격탄을 맞은 건 역설적으로 그의 세계경영이 너무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환율이 폭등하자 국내 대기업 중 외화 자산이 유난히 많았던 대우는 1997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8조5000억 원의 환차손을 입었다.

국가신용등급이 여섯 단계나 떨어지면서 세계 곳곳에 가장 많은 사업장을 갖고 있던 대우는 해외 채권자로부터 상환 압력도 가장 심하게 받았다.

아시아 국가들 상당수가 외환위기를 겪었다. 우리나라도 정부의 외환금융정책의 실패로 국가부도위기에 몰린다. 또 정권교체가 이뤄진다. 이 험난한 파도를 넘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김우중은 내부보다는 외부 리스크에 몰입해 있었다. 그의 해법은 더 올바른 선택이었고 뛰어났다. 하지만 정부는 그의 의견을 외면했다.

대우를 붕괴시키겠다는 정부의 속내가 1998년 7월 22일 발표된 회사채 발생 제한조치로 드러났다. 정부의 의중을 간파한 노무라 증권은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한다.

노무라 보고서는 필자의 책에 들어 있는 자금사용 내용에 관련한 표를 인용하며 대우 부실의 증거로 삼았다. 하지만 그 표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추측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금융시장의 압박은 대우의 자금난을 불렀고, 결국 김우중은 1999년 봄에 백기를 듣다. 전 재산을 담보로 내놓고 유동성 자금을 요청한다. 하지만 대우는 결국 1999년 10월 워크아웃에 들어가 그룹 해체를 맞았다.

IMF 외환위기 최대 희생양은 대우였다. 왜 정부는 대우를 해체했을까. 김우중은 자신의 장기였던 국가 지도자와의 교류에 문제가 없었다. 김대중과 여러 차례 독대할 정도로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김대중 정부를 뒷받침하는 세력은 생각이 달랐다. 김우중의 독대도 그들에게는 화나는 일이었다. 해체해도 시원치 않을 재벌의 오너가 자신들을 제치고 대통령과 독대하는 것에 못마땅해 했다.


‘세계경영’의 리더 김우중을 위한 변명

김대중 정부에는 재벌 해체를 획책했던 세력이 득세했다. 그들은 재벌 해체에 열을 올렸다. 치열한 삶에 충실했던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산업화를 깔봤다. 민주화만이 모든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살았다. 산업화 없는 민주화는 불가능하고 모래성임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기업은 지식의 유기적 복합체다. 역사가 있고 노하우가 녹아 있다. 대우라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유산을 파괴하는 일은 인류의 문명을 파괴하는 것처럼 무지한 일이었다. 자학이 지나쳐 스스로 날개를 꺾어 버리는 우를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김우중은 1999년 10월 중국의 대우자동차 공장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해외로 나간 지 5년8개월 만인 2005년 6월 유랑생활을 끝내고 귀국한다. 그의 명성은 땅에 떨어진 채 7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2014년 9월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의 입에서 “대우, 정부 기획 해체”라는 말이 나왔을까. 회한이 컸을 것이다. 기업이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의 최종 기준점은 살아남았는가에서 갈린다.

1998년 여름 그 위험한 순간에 정주영 회장은 소 1001마리를 직접 몰고 북한을 방문한다. 장사꾼의 상징적 존재인 김우중보다 한발 앞선 유연한 태도로 현대를 살렸다. 장기적으로 현대그룹을 어렵게 만들고 그룹을 계승한 아들의 죽음까지 이어진 최악의 투자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현대는 위기를 넘겼고 대우는 해체됐다. 현대와 대우가 달라서라기보다 정부는 현대와 대우를 다르게 처리했다. 기업에게 생존(survival)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성공의 필요조건이다. 김우중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소나기는 피해야 했고 기업을 일단 살려 놨어야 했다.

기업은 살아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려면 사업도 잘 해야 하고 정치리스크도 잘 관리해야 한다. 김우중은 왜 정치리스크를 보지 못했을까.

일에 파묻히다 보면 보지 못하는 것이 많다. “나는 일을 벌이기를 좋아한다. 도대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편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그 상태를 ‘휴식’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식의 휴식보다는 차라리 힘든 일을 택하겠다. 움직여야 한다.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자꾸만 일을 만들어 내게 된다.” 김우중은 그랬다.

그는 탁월한 일꾼이었지만 일 속에 묻혀 세상을 보는 데 소홀했다. 그의 일 욕심은 끝이 없었지만 그가 펼친 사업이 마무리 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세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여전히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아

대우를 빼앗기고 엄청난 추징금까지 징벌적으로 부과받은 김우중. 그의 나이 78세, 하지만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여전히 일을 쫓는다. 김우중은 2014년 9월 아주대를 방문해 “저는 30대에 대우를 창업했으나 여러분은 40~50대에 시작해도 늦지 않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충실히 실력을 쌓아나가길 바란다”며 “저는 이미 미련이나 욕심을 가지면 안 되는 나이가 됐다. 봉사로 여기고 교육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 김우중 같은 불세출의 기업가는 앞으로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 경제는 작은 기업이 환영받고 약한 기업 흉내를 내야 지원과 보호를 받는 경영환경으로 굳어 가고 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김우중이라는 존재가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고자 했다. 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여전히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지금도 도전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다.  


최승노 편집위원·자유경제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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