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군사협력을 한다는데…
한중 군사협력을 한다는데…
  • 미래한국
  • 승인 2015.02.23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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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한 미국 국제정치학자가 ‘중국의 외교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될 터인데, 즉 힘이 늘어났으니 이웃의 작은 나라들이 알아서 잘 할 터인데 왜 그들을 위협·협박함으로써 주변국들이 오히려 미국과 더 긴밀한 관계를 갖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었다.

국제정치학 최고·최대의 이론인 세력균형이론에 의하면 위협을 당하는 국가들은 자신의 힘을 증강시키려고 노력하거나 서로 연합해 힘이 센 상대방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힘쓰기 마련이다.

힘이 부상하면 가까운 이웃 국가들은 당연히 군사력 현대화, 궁극적으로 핵무장을 통해 자신의 힘을 증강시키거나 혹은 그것이 여의치 못할 경우 중국의 위협을 상쇄해 줄 동맹국을 찾기 마련이다.

점잖게 행동해도 그러한데 힘이 막강해진 중국이 마치 불량배처럼 군다면, 중국의 주변 국가들은 당연히 중국에 맞서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이미 중국으로부터 위협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일본, 인도, 베트남, 필리핀, 호주, 싱가포르 등 대부분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상호간 혹은 미국과의 협력 관계를 더 공고히 하고 있다.

▲ 한민국 국방부 장관(오른쪽)과 창완취완 중국 국방부장이 4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열린 한중 국방장관 회담에서 악수하며 기념촬영하고 있다/연합

美 국제 정치학자의 의문, 중국은 왜?

이들은 모두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한편, 상호 안보 협력관계도 대폭 증진시키고 있다. 필리핀과 베트남의 해군협력, 일본과 인도, 일본과 호주의 협력 관계는 인도와 호주가 일본의 잠수함을 구입할 계획을 수립할 정도로 진전됐다.

그렇지 않아도 중국의 부상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미국은 중국 주변의 웬만한 나라들이 서로 힘을 합쳐 중국의 힘과 균형을 이루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개별적으로 모두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겠다고 나오는 바람에, 때 아닌 인기를 얻고 있을 정도다. 냉전이 끝난 후 미국의 주둔이 더 이상 필요 없다며 미국을 사실상 몰아냈던 필리핀은 지금 미군의 재주둔마저 원하는 처지가 됐다.

현대국제정치학의 관점을 가진 미국 학자가 중국의 외교 행태를 이해하기는 곤란 했을 것이다. 필자는 중국의 외교 행태를 이해할 수 없다던 그 미국 학자에게 중국인의 국제정치관을 설명해 줬다.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은 ‘중국적 세계질서하의 전쟁’(War in the Confucian International Order)으로, 유학 당시 필자의 지도교수였던 Jack S. Levy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 ‘현대강대국 국제정치 체제 하의 전쟁’(War in the Modern Great Power System)의 동양(東洋)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리비 교수는 주로 서양 역사에 나타났던 강대국 국제체제에서의 전쟁을 분석했는데 그의 논문에 동양의 전쟁은 포함되지 않았다.

필자는 리비 교수의 분석 틀을 원용, 동양 즉 중국이 지배하던 세계를 유교적 국제질서라고 정의하고 그 세상에서 발발했던 전쟁 원인과 패턴을 분석했다.

서양의 전쟁과 동양의 전쟁 사이에 나타나는 유사점이 훨씬 더 많았지만 특이한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같은 차이는 중국 사람들의 세계관에서 연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중국 사람들의 독특한 국제질서 관점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서양 사람들은 국가 혹은 개인이 비록 힘의 격차가 있더라도 동등한 실체로 취급 될 때 그들 사이에 평화와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과 사회의 수평적 평등 개념이 서구적 질서관, 평화관의 축을 이룬다.

예를 들면 UN 총회는 모든 나라가 한 표를 행사하게 돼 있다. 약소국 짐바브웨나 초강대국 미국이나 한 표뿐인데 이는 바로 서구적 질서관, 평화관에 기초한 것이다. 물론 현실을 반영, 강대국 클럽인 안보리가 있기는 하다.

▲ 6·25 전쟁 때 美 해병대원이 중부전선에서 중공군 포로를 잡은 모습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보기에 인간사회 혹은 국제사회에서 수평적 평등이란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하는 개념이다. 어떻게 왕과 신하가 동등할 수 있으며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형과 동생 사이에 수평적 평등 관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것은 오로지 금수(禽獸)들의 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각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인 자리가 있다. 자신이 처한 곳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질서와 평화의 근원이다.

유교(儒敎)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며 한(漢)나라 시대 이후 이 같은 사회 질서관은 국제정치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중국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중국은 보통 나라가 아니라 세계의 한 가운데 있는 나라다.

또한 중국 사람들이 자신을 말할 때 쓰는 말 중화(中華)가 의미하듯 자신들은 모든 다른 나라와 달리 ‘한가운데서 빛나는 나라’다.

중국의 왕은 인간과 하늘을 연계시키는 하늘의 아들(天子)이다. 천자는 중국만 통치하는 사람이 아니라 온 인간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이다.

중국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는 중국을 흠모하는 모든 나라들이 천자의 지배와 가르침을 받는 그런 세계다. 그런 세계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인종,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두 사해동포(四海同胞)다. 모두 천자의 아들딸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평화와 질서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중국은 국제정치를 서구식 국제정치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구성했다. 즉 중국을 흠모하는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들로 만들려 했다.

작은 나라의 사절들은 좋은 특산품을 들고 가서 중국의 천자를 방문, 바닥에 코를 대는 절을 해야 하고 중국은 그런 나라 왕들의 권위를 스스로 인정해 준다. 조공 책봉관계(朝貢冊封)가 그것이다.

중국이 보기에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들은 중국의 문명권에 들어와 혜택을 보는 나라들이며 먼 변방에 있는 나라들은 중화문명의 혜택을 보지 못한 채 야만족으로 남아 있는 불쌍한 나라들이다.


서양과는 다른 중국의 국제질서관

물론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들의 왕은 중국 천자처럼 황제를 칭하면 안 된다. 급(級)이 낮은 지도자이니 왕 또는 그보다 낮은 직급으로 칭해야 한다. 조공을 바치는 나라의 왕권의 정통성과 권위는 중국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조공을 바치는 나라들을 침략하지 않는다. 말을 잘 듣지 않을 경우 가끔 혼 내주러 올 뿐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중국과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들 사이의 싸움은 독립된 실체들 간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에 전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중국 사람들은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기준도 다르게 생각한다. 말 잘 안 듣는 작은 나라에게 큰 교훈을 줬다고 스스로 생각되면 그 전쟁은 이긴 전쟁이다.

1979년 베트남을 침공했다가 큰 곤욕을 치르며 훨씬 많은 인명 피해를 내는 봉변을 당한 중국이, ‘월남에게 교훈을 줬다’며 너스레를 떨며 철수하던 모습은 중국적 국제질서 관점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행동이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군에게 중국군의 공격 루트를 정확히 알려줬고 베트남군은 중국군을 사정없이 공격할 수 있었다.

▲ 베트남 전쟁

아무튼 중국은 중국 주변의 상당수 나라들을 조공국으로 만듦으로써 중국적 국제질서를 형성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중국인이 생각하는 국제평화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현대말로 바꿔 말하자면 중국은 ‘힘의 불평등 관계를 제도화’시키고자 했고 힘의 불평등 관계가 제도화된 국제관계는 실질적으로 가장 평화로운 국제관계가 될 수 있다.

조공국은 법적으로 무릎을 굻었으니 상전에게 대들 수 없고 상전인 중국은 작은 나라를 침략해야 할 일이 법적으로 없어지게 될 것이다.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 사대하고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돌봐주는 자소사대(字小事大)의 관계는 자신이 큰 나라인 한, 중국인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국제관계다. 요즘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를 대국(大國), 한국을 소국(小國)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오랫동안 형성된 중국적 국제질서 관점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중국의 오만과 한국의 쓸쓸한 자화상

문제는 21세기인 현대 국제정치는 서구식 웨스트파리아체제, 즉 권력정치체제에 기본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주변의 대부분 나라들은 중국을 과거처럼 중화(中華)의 나라라고 보지 않으며 더구나 그들은 지난 100년 이상 주권, 독립의 개념을 체득하고 살아왔다.

이 나라들은 오늘 중국에 무릎 꿇기보다는 대항함으로써 독립, 주권은 물론 안보를 보장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최근 해상자위대 고급 장교 출신인 일본학자가 ‘중국 사람들이 자신을 과신(overconfident)하고 있다. 일본은 중국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또한 베트남의 국제정치학자가 ‘우리 힘만으로도 중국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들었다. 중국의 위협에 굴하지 않을 것이라는 베트남과 일본 사람들의 결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경우는 어떤가? 며칠 전 서울을 방문한 중국 국방장관이 의제에도 없던 사드(THAAD) 문제를 들고 나왔다고 한다. 한국을 우습게 봐서인가? 그의 눈에는 오늘의 한국이 조공국 수준으로 보인 것일까?

이제 중국은 대한민국의 국방정책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는 말인가? ‘THAAD’는 기술적으로 전혀 중국이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중국에 아무런 손해가 되지 않는 방어 시스템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동료학자의 글이다. 같은 생각이다. “언제부터 우리는 우리의 국방태세 강화에 관해 중국의 조언을 들어야 했고, 그들의 입장을 고려해야 했는지…… 우리의 처지와 위상, 그리고 자화상이 오로지 쓸쓸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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