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정부는 ‘해외 식량기지’ 건설을 꿈꿨다
역대 정부는 ‘해외 식량기지’ 건설을 꿈꿨다
  • 미래한국
  • 승인 2015.02.24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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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해외농업이 본격 추진된 것은 5·16 직후인 1962년 3월 ‘해외이주법’이 제정되면서부터다. 당시 군사정부는 국내 농축산업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고 인구분산, 해외영토 확장, 식량안보 구축을 위해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칠레 등 남미지역을 대상으로 농업이민을 적극 추진했다.

정부는 농업이민자들의 현지 정착을 돕기 위해 약 8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파라과이의 산페드로 농장(1968, 1500㏊), 아르헨티나의 야타마우카 농장(1978, 2만 800여㏊로 여의도 면적의 70배 정도)과 산하비엘 농장(1981, 2714㏊), 칠레의 테노 농장(1980, 185㏊) 등 4개의 농지를 매입했다.

이 중 아르헨티나의 산하비엘 농장은 이주농민 이창호 씨가 경영하고 있으며 파라과이의 산페드로 농장은 2005년 한국에서 이주한 농민 3가구에게 매각됐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173㎞ 지점에 위치한 테노 농장은 1988년부터 현지인에게 임대를 줘 운영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986㎞ 떨어진 서북방 지역에 위치한 야타마우카 농장은 우리나라 평수로는 약 7000만 평으로 새만금 지역과 비슷한 면적이다.

그런데 염분이 과다해 농사가 불가능한 땅을 시세보다 10배나 비싸게 매입하는 바람에 황무지로 방치돼 있었다. 정부는 2007년 국제 곡물가가 폭등하자 이 농장에 시범영농을 시도한다고 발표했으나 그 후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정부가 선발한 남미 농업이민자들은 서독 파견 광부 모집 때와 비슷하게 대부분 농업과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정부는 이들에게 기초농업훈련을 시켜 582세대를 이주시켰다.

현지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영농기술과 경험부족으로 갖은 고생을 하다가 농사를 포기하고 하나둘 대도시 지역으로 몰려들어 의류봉제업, 요식업 등에 종사했다. 결국 박정희 정부의 농업이민은 해외이주 정책으로는 성공한 셈이지만 해외농업 진출에는 실패했다.

전두환 정부도 박정희 시대와 비슷한 방법으로 해외농업 이주를 진행했다. 특히 케냐, 통일교가 대규모 농업단지를 조성한 자이레(현 콩고민주공화국), 가나, 라이베리아 등 아프리카 지역으로 농수산 이민을 보낸 것이 특징이다.

또 포항제철의 후원금으로 브라질의 리오그란데와 상파울루 지역에 약 8만㏊에 달하는 십자성농장과 아리랑농장을 매입해 이곳을 중심으로 불법이주자의 정착과 농업이민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먼저 진출한 일본인들의 방해공작으로 브라질 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해 투자기금도 회수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주 브라질 대사를 경질했다.

1981년에는 선경(주)을 앞세워 미국 워싱턴 주에 3300㏊의 옥수수 농장을 임대해 생산을 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곡물저장시설)와 곡물부두를 선점하고 있는 곡물 메이저들의 방해공작과 국제시세보다 비싼 생산비로 인해 가격경쟁력을 잃어 사업을 중단했다.

중국 베이징에서 동북쪽으로 1500여㎞ 떨어진 헤이룽장(黑龍江)성에 위치한 싼장(三江)평원은 백두산에서 발원해 흘러온 쑹화(松花)강, 시베리아 남부를 횡단해온 헤이룽(黑龍)강,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와 경계를 이루는 우쑤리(烏蘇里)강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10만8900㎢로, 남한 국토면적(9만9720㎢)보다 더 넓다.


싼장평원과 장덕진의 원대한 꿈

 

싼장평원 일대의 토양은 세 개의 강물이 수천 년 동안 상류에서 실어 나른 퇴적층과 유기물들이 혼합된 비옥한 옥토다. 유럽 동부의 우크라이나, 미국 중서부 평야 지대와 함께 세계 3대 흑토(黑土) 지대로서 유기물질이 일반 토양보다 6배나 많아 농업의 최적지로 꼽힌다. 이곳은 과거에는 고구려, 발해 땅으로서 중국어로는 거대한 북쪽 황무지라는 뜻에서 ‘북대황(北大荒)’이라고 불린다.

이 일대의 옥토를 개발해 해외 식량기지로 만들자는 구상을 한 발상자는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이다. 그는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농업진흥공사(한국농촌공사의 전신) 사외이사로서 학술회의 참석차 당시 미수교국이었던 중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김 전 장관은 중국이 개혁 개방을 하면 값싼 노동력과 만주벌판의 비옥한 토지를 이용해 해외 식량기지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귀국한 그는 장덕진 당시 농업진흥공사 이사장에게 ‘중국 식량기지’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이것이 구체화되는 과정에 ‘사랑의 전화’를 운영하던 코미디언 심철호 씨가 등장한다. 심 씨는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아들 등업방과 친분이 깊었는데 장 이사장에게 등업방을 소개해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다.

등업방은 장 이사장의 싼장평원 개발 아이디어를 적극 지지했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농업진흥공사는 20여 명에 이르는 전문가를 현지에 보내 타당성 조사를 마친 후 1988년 12월 중국 헤이룽장성 정부와 싼장평원 개발 관련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그러나 한국의 공기업이 당시 미수교국인 중국에 투자를 하는 것은 여건상 불가능했다. 이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내다 본 장 이사장 등 일부 임직원이 퇴직해 1990년 1월 대륙종합개발을 설립했다.

이 회사 이사장에 취임한 장덕진은 헤이룽장성 정부와 각각 31억1647만원씩 출자해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중국 하얼빈시 싼장평원 일대 3만8000㏊를 연간 1140만 원(당시 환율 기준)의 토지임대료를 내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40년간 임대했다.

1991년 중국 국가계획위원회와 한국은행은 대륙개발의 싼장평원 개발 투자를 승인했다. 대륙개발은 전체 면적 중 1차분으로 1만3200㏊를 개간하고 콩 2975톤, 밀 3225톤을 생산했다.

당시 장 이사장이 확보한 토지는 저지대여서 비가 오면 물이 잘 빠지지 않았다. 농민들은 물빠짐이 좋지 않은 곳에 콩이나 밀 같은 밭작물을 심기 위해 땅 주변에 해자(垓字)같은 둘레 못을 파 놓았다. 장 이사장은 배수를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싼장평원을 가로지르는 대수로를 만드는 등 엄청난 비용과 노력을 투자했다.

그런데 1996년 추가 투자를 위해 한국수출입은행에서 대출을 약속했던 2200만 달러의 자금에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대통령직을 걸고 쌀 수입 개방을 막겠다”고 공약했는데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으로 이를 지키지 못하게 되자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 직속으로 농어촌발전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UR 이후의 농업정책을 설계하는 역할을 장덕진 이사장에게 맡아달라고 했다. 당시 장 이사장은 싼장평원 개발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과 열정과 노력을 투입하고 있던 상황이라 그 자리를 맡을 형편이 못 됐다.

덕분에 수출입은행으로부터 지원받기로 한 2200만 달러는 청와대의 말 한 마디로 대출이 중단됐고 장 이사장의 원대한 구상은 10년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정치인들의 감정적 대응으로 인해 210억 원에 달하는 부채를 끌어안고 쓰러지면서 ‘한 여름 밤의 꿈’으로 막을 내렸다.

한국으로부터의 후속 투자가 중단되고 한국이 IMF로 휘청거리면서 한국에서 싼장평원의 이름조차 잊혀지자 이번에는 기다리다 지친 중국 정부가 나섰다.

2008년 국제 쌀값이 폭등하자 중국 정부는 북대황(北大荒)그룹을 동원했다. 그들은 인민해방군 제대군인 50만 명을 투입해 과거 장덕진 이사장이 설계한 계획서대로 쑹화강의 물을 끌어들여 밭작물을 재배하던 곳을 논으로 바꿨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연해주 ‘광개토대왕프로젝트’

싼장평원 일대의 구불구불하던 농지는 대단위로 경지정리를 해서 항공기로 볍씨와 농약을 뿌리고 트랙터, 콤바인 등을 투입해 기계화 영농단지로 변모시켰다. 그리고 조선족들을 동원해 이 지역에 논벼 농사를 성공시켰다.

오늘날 싼장평원 일대는 영농 기계화율이 92%에 달해 마치 미국의 농사 현장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인력 의존도가 크게 낮다. 게다가 친환경 농법을 도입해 이곳은 친환경 녹색농업의 메카로 탈바꿈했다.

이제 싼장평원은 ‘북대창(北大倉)’, 즉 북쪽의 거대한 곡창으로 변해 중국인들은 “중국의 쌀 창고”라고 부른다. 싼장평원의 평균 쌀 수확량은 1㏊당 5.7톤으로 한국보다 훨씬 높다.

김성훈 전 장관이 발의하고 장덕진 이사장이 추진했던 ‘싼장평원의 꿈’은 중국 정부가 이어받아 현실화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10년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지도자들의 무능과 무식, 무지로 인해 남 좋은 일만 하고 말았다.

극동러시아의 연해주(프리모르스키)는 남한 면적의 1.6배나 되는 16만5000㎢에 인구는 217만 명에 불과하다. 원래 청나라 영토였으나 1860년 북경조약에 의해 러시아 영토로 편입됐다.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연해주 일대에 거주하던 고려인 17만3000여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기 전까지는 고려인들이 농사를 지었는데 이들이 강제 이주 당한 후에는 돌보는 사람이 없어 황무지가 됐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이 일대에 남아 있던 고려인과 북한 인력이 투입돼 버려졌던 농지 중 일부에서 쌀농사를 재개했다. 흐루시초프 수상 시절 구 소련은 미국의 농업수출개발지원법(PL-480)을 모방해 쌀을 주식으로 하는 7개의 사회주의 형제국가(북한, 라오스, 미얀마, 월맹,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네팔)에 원조미를 제공할 목적으로 항카호의 물을 끌어들여 관개수리시설과 구획정리를 한 다음 대규모 국영농장을 조성하고 쌀을 생산했다.

원조미 제공은 구 소련의 경제가 파탄이 나 1985년에 중단됐고 이 지역 국영농장들은 또 다시 황폐화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 무렵 국제농업개발원의 이병화 원장은 1989년 9월 구소련의 유리온실 관련 국제 응모에 1위로 당선돼 고르바초프 대통령으로부터 극동러시아 지역 농업경제 대통령 자문관으로 임명됐다.

 

그의 임무는 극동러시아 지역의 국영농장을 해외와의 합작을 통해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1990년 6월 대륙연구소 장덕진 이사장으로부터 연해주 농지를 확보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우스리스크 부근의 크레모브 국영농장(1만1000ha)을 인수했다.

대륙연구소가 이 농장에서 시범 영농에 착수하자 고합그룹의 장치혁 회장이 연해주 농업을 자청하고 나섰다. 장 회장의 선친 장도빈 박사는 구한말 연해주로 망명해 발해의 역사 흔적을 처음으로 찾아내 알린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장 이사장은 크레모브 농장을 장치혁 회장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싼장평원 개발에 전념했다. 고합그룹은 1992년부터 러시아 기업과 합작으로 이곳에서 콩 농사와 축산업을 시작했다.

1990년 12월 노태우 대통령은 모스크바에서 가진 고르바초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수교 대가로 30억 달러의 차관 제공을 약속했다.

이 중 절반 가량인 14억7000만 달러가 제공된 1991년 12월 25일 소련이 붕괴됐고 옐친의 러시아는 소련에서의 독립을 선언했다. 한러 양국은 한국이 소련 정부에 제공한 14억7000만 달러의 차관 승계 문제로 논란을 벌이다가 ‘러시아가 심의해서 갚기로 노력한다’라는 식으로 어정쩡하게 타협했다.

차관 도입의 당사자였던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한국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1992년 10월 노재봉 특사에게 한국이 제공한 경협차관의 대가로 연해주 다르네고브스키 지역(한국의 경상도 면적과 비슷)의 개발권을 한국에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노태우 정부는 이 지역에 대규모 농장을 조성하고 북한 인력을 투입해 농사를 지은 다음 생산된 농작물을 북한에 농업 노동자 임금 형식으로 제공해 식량난을 타개하면 남북관계의 진전에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

노태우 정부는 이 계획을 ‘광개토대왕 프로젝트’로 명명하고 농업 전문가를 다르네고브스키 지역에 보내 현지답사를 했다. 답사 결과 광산이 많고 농지는 별로 없는 데다 용수 부족으로 논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으로 판명되자 광개토대왕 프로젝트를 폐기했다. 그러나 다르네고브스키 지역은 다이아몬드 등 지하자원이 다량 매장된 곳이었다.

러시아는 농업뿐만 아니라 지하자원 개발권까지 한국에 제공한다는 것이었는데 우리 정부는 현지에 대한 정보 부재와 무지로 인해 황금 같은 찬스를 놓치고 말았다.

정권이 바뀌어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6월 모스크바에서 옐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길에 연해주 고합농장을 시찰했다. 이 와중에 연해주 농업 문제가 다시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 주인공은 친구 노태우의 손에 의해 백담사로 유배됐다가 돌아온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연해주에 고려인 자치구역을 만들겠다”

혹독한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전두환은 국내에 전직 대통령이 여러 명 있을 경우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자신이 직접 연해주에 가서 농사를 짓고자 했다.

그는 광개토대왕 프로젝트에 관여했던 이병화 원장에게 “자비를 들여 고려인을 끌어 모아 농사를 짓게 해서 연해주에 고려인 자치구역을 만들어보겠다”며 협조를 부탁했다. 전두환 측은 이 프로젝트를 항카호의 한자 표기인 ‘흥개호(興凱湖) 프로젝트’라고 명명했다.

이 원장은 1995년 11월 7일 연해주 농업아카데미 총장이자 극동러시아 국영농장의 총감독인 알렉세이 데민과 항카호 일대의 포그라니치니 지역 18만㏊를 587만 달러(약 63억 원)에 임대해 농사를 짓는다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 연해주 옛 고려인 정착지가 있었던 수이푼강 유역의 '한마당'이라 불렸던 평원/연합

서명 직후 전 씨 측은 18만㏊의 경작권 확보 계약금으로 17만 달러(약 2억 원)를 지불했고 잔금 590만 달러(61억 원)는 한 달 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박계동 의원의 노태우 비자금 폭로로 인해 국내의 정치적 상황이 급변했다. 1995년 12월 13일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고향 합천으로 내려갔던 전 씨가 검찰에 압송됐고 12월 19일 국회에서 5·18 특별법이 통과돼 전 씨의 비자금 수사가 시작됐다.

검찰은 1996년 1월 20일 쌍용양회 경리부 창고에서 사과상자 25개에 담긴 현금 61억 원을 찾아내 전 씨의 비자금이라며 압수했다. 이 돈은 전 씨 측이 흥개호 프로젝트의 잔금으로 준비해 둔 것이었는데 이 돈이 압수되면서 전두환의 흥개호 프로젝트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병화 원장은 전 씨 측이 러시아에 지급한 계약금의 법적 효력 상실기간인 2000년까지 한국 농민단체들에게 국영농장 경작권을 얻어주는 권리를 확보하고 연해주에서 농사를 짓고자 하는 기업가들에게 항카호 일대의 농지를 경작하도록 했다. 그 결과 대순진리회, 풀무원, 소망교회를 비롯한 10여 개 기업과 단체들이 연해주에 진출해 영농을 시작했다.

대순진리회는 2002년 6월 연해주에 아그로상생이란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약 500억 원을 투자해 자신들이 영농하던 항카호 일대의 농장을 매입해 사유화했다. 그곳은 전두환 측이 흥개호 프로젝트를 위해 계약했던 지역이다.

▲ 연해주 현대 자원개발 농장/연합

전두환의 흥개호 프로젝트 덕분에 현재 연해주에는 대순진리회의 아그로상생을 비롯해 현대중공업(현대자원개발) 등이 쌀과 콩, 야채 농사를 짓고 있는데 한국계 기업이 확보한 농장과 초지는 제주도 넓이의 2.8배 정도다.

1998년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햇볕정책의 주창자답게 북한을 도울 방법을 찾다가 김성훈 농림부 장관(1998년 3월~2000년 8월 재임)으로부터 연해주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재임 중 이병화 국제농업개발원장을 통해 연해주 일대의 한국계 농장에서 재배한 농산물(도정하지 않은 벼)을 28차례에 걸쳐 1만 톤을 구입해 북한으로 보냈다.

또 2012년 11월 23일 대선 직전에는 박근혜 후보의 지지모임인 박사모와 녹색환경연합(대표 김시약)이 공동으로 연해주의 한국계 농장에서 농사를 지은 보리(화차 2량 분)를 북한 두만강구역을 통해 제공했다.

 

<일본의 해외농업 진출 사례>

한국과 일본은 1905년 비슷한 시기에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있는 에네켄(애니깽) 농장에 농업이민을 보냈다. 올해로 이민 110주년이 된다. 멕시코로 간 일본 이민자들 중 일부는 1908년 브라질로 진출해 그때부터 집중적으로 농업과 임업 분야를 파고들었다.

또 식량안보를 위한 본국 정부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브라질 거주 일본 농업 이민자들을 비롯한 일본국제협력단(JAICA), 일본전농(全農, 한국의 농협중앙회에 해당)은 일본 자국 영토의 1.5배에 달하는 약 56만㎢의 토지(농지와 임지)를 소유해 농산물과 임산물을 비롯한 사료곡물 등을 생산하고 있다.

현재 브라질 내 일본인(브라질 시민권을 소요한 일본계 및 영주권자, 일본기업 지사직원 등)이 경영 주체로 있는 농장은 약 5300개, 농장 당 평균면적은 약 1만㏊ 정도다.

일본은 또 세계 랭킹 10위 내의 미국 곡물 메이저 중 두 개를 미쓰비시(三菱)와 이토추(伊藤忠)상사가 매입해 이 메이저 회사가 소유하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통해 유통물량을 확보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3년 말 현재 국내 민간업체의 해외농업 진출 및 추진은 러시아 12건, 중국4건, 인도네시아 5건 등 28건으로 집계됐으나 이 중 40%인 11건은 실패해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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