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로 진보하라!
보수주의로 진보하라!
  • 김민정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5.03.1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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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진단] 보수주의 승리의 길

보수는 경제를 살릴 수 없다는 생각이 확산되면서
차기 보수세력의 정권창출은 어렵다는 회의론이 일고 있다

대한민국 보수는 안녕한가. 2007년 정권교체와 2013년 정권 재창출을 이뤄낸 한국의 보수는 대한민국의 주류로서 미래를 확신하고 있는가. 들려오는 대답은 희미하다.

오늘 우리의 안보는 미·중(美中)간의 파워게임 앞에서 분열되어 있고, 경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이 모두 보수세력이 창출한 정권 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그러한 보수는 대한민국의 주류가 될 수 있는가. 대한민국을 성공의 궤도에 올려놓은 보수에게 왜 이러한 위기가 깊어지고 있는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도 보수에게는 그런 고민이 있었다. 1909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황성신문에는 기묘한 사설이 실렸다. ‘보수주의로써 진보함이 가량(佳良)하다’라는 제목의 사설은 대한제국의 개혁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 한 대목을 들여다보자.

“유럽 열강을 보면 영국은 보수주의가 최승하여 이천년 역사상 규모로 지금까지 준수하는 기초로써 때에 따라 적절히 하여 진보발전을 여행함으로 그 나라의 문명사업과 발달정신이 가장 완전 공고하고, 동양의 일본도 그 유신의 실상을 관찰하면 표면적 개혁은 없지 않으나 또한 보수주의의 근거로 그 발달의 효력이 그렇게 완전한 바라. 프랑스 인민은 파괴행동이 심히 극렬한 결과로 지금까지 대단한 손해를 입힌 영향이 있다.”

‘보수주의로 진보하자’는 황성신문의 사설은 대한제국의 병폐 일소를 주장하며 폭력성을 띠던 급진세력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 신문의 사설을 발견한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는 이를 우리 근대사에 있었던 최초의 보혁(保革) 논쟁이라고 평가했다.

   
▲ 1898년 독립협회의 서재필 등이 주도했던 만민공동회. 만민공동체를 주도했던 개회파가 오늘 한국의 보수 정치세력의 뿌리다.

당시 서재필 등이 주도했던 만민공동회에서는 대한제국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활발한 시민 토론이 열렸다. 그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주장을 편 이들은 군주제 폐지와 프랑스식 코뮌을 주장한 혁명적 공화주의자들이었다. 만민공동회는 그러한 공화주의자들의 연설을 금지시켰다.

‘한국의 보수세력 연구’를 펴낸 남시욱 교수는 만민공동회를 주도했던 개화파가 오늘 한국의 보수 정치세력의 뿌리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보수세력은 수구(守舊)가 아니며, 변화의 중심에서 미래를 모색하던 ‘진보적’인 이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면은 오늘 대한민국 보수에게 전승되어 오고 있을까. 이 문제를 연구해 온 김주성 한국교원대 교수는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김 교수에 의하면 한국의 보수는 대한민국 건국을 계기로 ‘근대국가 따라잡기’라는 목적론에 경도되었다는 것이다.


반공주의와 발전주의로 변모한 자유민주주의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시민혁명을 통해 형성된 체제 이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단 상황에서 미국에 의해 주어졌으며, 서둘러 근대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시대적 당면과제 속에서 ‘반공주의’와 ‘발전주의’라는 두 개의 축으로 치환됐다.

반공과 발전은 대한민국 보수이념을 외양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로 표방하면서도, 내면으로는 ‘가부장적 민주주의’ 또는 ‘권위주의적 민주주의’로 이끌었다. 다시 말해 서구의 보수주의가 생성시켜 온 자유민주주의와는 다른 이념의 형태로 오늘에 이르렀다는 분석이다.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한미동맹, 경제성장은 오늘날 적지 않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과거와 같은 보수 이념으로 이런 문제를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은 적다. 그것은 ‘보수의 위기’를 의미한다. 동아시아를 둘러싼 정세의 변화와 대한민국 성장의 위기가 ‘보수의 위기’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10년간 한국의 보수세력에게 중국의 부상은 새로운 도전이 되어 왔다. 중국은 6·25 때 북한을 도왔던 적성국의 지위에서 이제는 우리의 최대 교역국으로 등장했다. 한·중(韓中) 수교 이후 지난 22년 동안 양국 간 교역량이 40배가 넘는다는 사실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국내 기업들은 중국 투자에 사활을 걸었다. 중국은 여전히 공산당이 영도하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북한과 혈맹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보수세력에게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딜레마를 안겨줬다.

박근혜 정부는 친중(親中)적 외교노선으로 기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은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고, 그 핵심에는 사드(고고도 미사일 요격 시스템·THAAD·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과 같은 첨예한 문제들이 자리한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국이 사드 배치를 거부할 경우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문제는 보다 복잡한 국면을 맞았다.

군사 안보적으로는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고, 경제적으로는 중국과 교류를 지속한다는 현실주의적 선택이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이라는 흐름 속에서 과연 얼마나 현실적일 수 있을지 미지수다.

냉전시대 탁월한 보수주의 외교전략가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은 이런 상황에 ‘고슴도치와 여우론’을 제시했다. 즉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하는 외교에서는 비타협적인 고슴도치의 가시와 유연한 여우의 얼굴,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이론을 한·미·중 삼각외교에 적용해 본다면 북핵(北核)을 우리의 고슴도치 가시로, 사드 배치 문제를 여우의 얼굴로 연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즉 미국과 중국에게 북핵 해결과 사드 배치 가입 결정을 연계한 타임라인을 제시하고 ‘북핵-사드’를 미·중 간에 협의할 문제로 던지는 방법이었다.

지난해 케리 미 국무 장관이 시진핑 주석을 베이징에서 만났을 때 그는 “중국이 북핵문제 해결에 적극 나설 경우 동아시아 미사일 방어망(Missile Defence) 전진배치 문제는 재고될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 정치세력은 그런 기회를 이용하지 못했다. 한미동맹이냐, 중국을 통한 북핵 해결이냐는 선택에서 중심을 잡지 못했던 것이다.

영국의 보수주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는 “변화의 수단이 없는 국가는 스스로를 보존할 수단도 없는 국가”라고 갈파했다. 구한말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개화파도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한미동맹과 중국 접근의 문제는 일거양단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는 이런 문제에 현실적 답을 찾아야 한다.


외환위기로 무너진 보수

대한민국 보수이념의 중요한 한 축은 시장경제였다. 그것은 박정희 시대를 관통하며 88올림픽을 치르는 198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발전주의’라는 보수이념과 맞아 떨어졌다.

그렇기에 보수는 건국 이래 자본주의가 국가의 발전을 가져온다는 믿음을 가져왔다. 그런 믿음은 1997년 외환위기 사태를 맞아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위기는 그 순간에 갑자기 찾아 온 것은 아니었다. 1987년 민주화 체제로 등장한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문민정부는 관치(官治)경제를 신봉했다. 당연히 정경(政經)유착이 깊어갔다.

IMF 외환위기는 관치경제와 정경유착의 모순이 축적되어 외환위기라는 얼굴로 등장했다. 김영삼 정부는 이러한 모순 속에서 문민시대를 내세워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프로파간다를 동원했다. 그렇게 해서 한국 보수의 ‘근대화 따라잡기’가 일궈놓은 성과마저 그 뿌리째 잘라냈다.

그 결과 좌파의 사회주의 노선과 반(反)대한민국 투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과를 낳았고, 1997년 IMF 외환위기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신(新)자유주의’라는 이름의 공세를 불러왔다. 이는 동시에 보수에 대한 공세였다. 보수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보수세력 내부에는 좌파에 굴복하는 투항주의가 뿌리를 내려갔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두 개의 대한민국 보수 아젠다 가운데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은 점차 희석되어 갔다. 그 결과 김대중, 노무현 정부로 표상되는 진보-중도좌파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국민들은 이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표현했다.

문제는 진보 정권의 경제 실패와 무능에 실망한 국민들이 ‘경제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했을 때 기대했던 ‘보수의 역전’이 일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초기였던 2008년 반미 광우병 시위 광풍(狂風)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선출된 대통령이 광화문 촛불시위를 보고 “내가 좋아하는 ‘아침이슬’ 노래를 들으며 반성했다”고 고백한 것은 소통을 위해 보수의 신념을 유보한 것이라고 쳐도, 이후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보수의 이념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2011년 보수 경제학자였던 최광 교수(現 국민연금공단 이사장)는 계간지 ‘시대정신’의 토론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현 정부는 스스로 내세우는 중도 실용으로 보나 구체적 정책을 놓고 보나 보수 정권이 아니라고 봅니다. … MB 정부는 처음에는 747정책, 대운하의 성장론을 추구했다가 안정론, 부양론, 민생론으로 계속 옮겨왔습니다. 사실 이렇게 정책의 중심이 옮겨가는 것은 가치나 이념의 부재(不在)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책의 변화가 한 20년 동안에 이뤄졌다면 이해가 가지만 불과 2~3년 동안 정책의 중심이 어떻게 이렇게 빈번하게 바뀌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바뀐 것도 아니고 정책 입안자들이 대대적으로 바뀐 것도 아닌데 정책의 중심이 계속 바뀌는 것은 그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최광 교수는 보수 정권의 경제정책이 포퓰리즘으로 흐르고 경제 성장에 실패하면 정권 재창출은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한 예상은 사실 정확한 것이었다.

   
▲ 보수의 아이콘인 새누리당이 정권을 재창출하려면 '보수'라는 정체성을 재확립 해야 한다. 사진은 새누리당 전당대회 장면.

2013년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가 ‘세금 없는 복지와 경제 민주화’를 집권 공약으로 내놨을 때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던 보수세력은 경악했다. 그리고 보수는 분열됐다. 보수의 아젠다는 진보와 누구의 것이 더 선동적인가를 놓고 경쟁을 해야 했다.

그해 4월 총선은 친박(親朴)연대가 전멸하고 새누리당의 의석이 줄어들며 통진당이 약진하는 등 사실상 보수의 패배였으나 선방으로 치부됐다. 보수의 아이콘 박근혜 후보의 대세론은 시간이 갈수록 밀려 끝내 51.6%라는 신승으로 간신히 당선됐다.

선거 막판에 터진 NLL 안보 이슈와 이정희 통진당 후보의 종북론(從北論)에 위기를 느낀 보수의 막판 결집이 아니었다면 지금 박근혜 정부는 존재하기 어려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많던 지지와 대세론은 어디로 갔는가. 박근혜 정부는 통진당 위헌(違憲)정당 해산청구로 ‘종북척결’이라는 보수의 지지를 얻었으나 원칙 없는 인사, 소통 없는 국정, 정체를 알 수 없는 창조경제론과 경제민주화, 세금 없는 복지 등의 이슈로 국민들의 실망감과 마주해야 했다.

이제 더 이상 보수는 경제를 살릴 수 없다는 생각이 국민들에게 확산되면서 차기 보수세력의 정권창출은 어렵다는 회의론마저 일고 있다.

대한민국 보수는 분명히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위기의 본질은 변화로부터 오고 있다. 변화에 대응하려면 올바른 이념을 가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토대를 만든 레오 스트라우스(1899~1973)의 주장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마키아벨리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스트라우스는 “군주는 국민들이 어떻게 사는 지를 관찰해야 한다”고 했던 마키아벨리에 대해 “참된 군주는 국민이 어떻게 사는지를 관찰할 것이 아니라, 국민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보수주의 정치이념이 대중영합주의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정치 지도자가 가져야 할 ‘절대선(善)’의 가치를 역설한 것이기도 했다.


보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보수주의 정치이념은 보수주의 철학에서 비롯된다. 한국에는 애석하게도 보수주의의 철학적 이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 진보 역시 그렇다. 그런 점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용어 대신 좌익과 우익으로 구분하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대안이 있다면 이제부터 ‘대한민국 보수’라는 정체성을 재확립하는 길이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황성신문의 사설이 주장했던 ‘보수로 진보하자’는 모토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 정신으로 건국 이후 87 민주화체제 이전까지 이르는 ‘대한민국의 성공사(史)’를 다시 쓰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다만 ‘근대화 따라잡기’는 이뤄졌으므로 그 정신은 ‘통일에 대한 비전’으로 등장해야 한다.

동시에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에 국한하는 방어적 민주주의로 해석하는 한계를 넘어 ‘자유’의 의미를 더 심화시켜야 한다. 그것은 지금 무너져 내리는 성장과 발전을 회복할 이념이다.

거래의 자유, 교육의 자유, 생산의 자유, 소비의 자유 등을 통해 이제는 보수가 진보의 ‘민주화’ 아젠다를 넘어 ‘자유화’라는 아젠다를 설정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이 보수가 진화하는 길이며 보수주의의 아버지, 에드먼드 버크가 주장한 ‘변화론’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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