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無敵) 해병 신화, 제주人들이 만들다
무적(無敵) 해병 신화, 제주人들이 만들다
  • 미래한국
  • 승인 2015.04.0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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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제주와 해병대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 6·25 발발하자
제주도에서 해병대 사병 모병, 3000명의 제주도민 해병대 입대

정재욱 미래한국 기자 jujung19@naver.com 

38선 부근 전선에서 지루한 소모전을 벌이던 1951년 5월 중순, 한국군 해병 1연대가 중동부 전선의 강원도 양구 도솔산 부근 24개 봉우리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시작했다. 

미 해병 1사단이 고지 하나를 점령하는 데 800여명의 사상자를 낸 뒤 한국군에게 임무를 넘긴 후였다. 당시 도솔산은 중동부 전선의 심장이나 다름없었다. 

도솔산 지역을 장악하면 강원도 철원과 화천, 양구, 인제, 고성을 확보해 전선을 38선보다 훨씬 위쪽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정식 대대장(6·25 전쟁 후 해병대 사령관 역임)이 이끄는 해병대 1연대 1대대는 도솔산 골짜기를 온통 피로 물들이는 17일 간의 격전 끝에 24개 봉우리 전체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38선 이북 지역이었던 철원, 화천, 양구, 인제, 고성은 대한민국 영토가 되었다. 

도솔산 점령 소식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영웅’들을 격려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가 직접 부대 표창을 하고 ‘무적해병(無敵海兵)’이란 친필 휘호를 내린다. 

이 대통령은 당일 생일을 맞은 공정식 대대장에게 깜짝 이벤트를 마련했다. 헬기로 생일 케이크를 공수해 온 것이다. 이 대통령은 태극기와 성조기로 장식된 케이크를 직접 전달했다.  

이 대통령의 해병대에 대한 애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해병대가 용맹한 전투로 곳곳에서 승리하자 이승만은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에게 요청해 한미 해병대를 서부전선으로 이동시켜 서울 북방을 지키도록 한 것이다. 

해병대는 이후 서부전선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1년 4개월을 버텼다. 


마거릿 히긴스의 作名 : ‘귀신 잡는 해병’

해병대의 불패(不敗) 신화는 1950년 8월 경남 창원군 진동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시작된다.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이 해병대를 앞세워 부산을 압박하던 인민군 6사단 등을 섬멸해 반격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 진동리 전투였다. 

방호산이 지휘한 인민군 6사단은 중공 인민해방군 소속의 한인 부대로서 장개석 정부를 대만으로 몰아낸 후 모택동의 지시에 의해 북한으로 가서 인민군 소속이 되었다. 

이 막강 사단과 마산 진동리에서 격돌하여 대승을 거둔 해병대는 이 공로로 전 부대원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는다. 부대장은 후에 국방부 장관을 지낸 6·25의 영웅 김성은 대령이었다. 

진동리 전투의 승리로 인해 한국 해병대에는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명예로운 별칭이 붙었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의 종군 여기자 마거릿 히긴스가 진동리 전투에 이어 통영상륙작전까지 성공시킨 우리 해병대의 용맹함에 감탄해 붙인 애칭이었다.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취재하기도 했던 마거릿 히긴스는 1951년 전쟁 비망록 <한국전쟁>을 출간, 이 책으로 여성 기자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진동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둔 해병대는 이후 미 해병대와 함께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작전에 투입돼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된다. 

우리 해병대가 미 해병대와 연합 작전을 펼칠 수 있는 전력을 구비한 것은 인천상륙작전 직전이었다. 

이때 병력을 충원하고 교육 훈련을 한 곳이 제주도였다. 낙동강까지 전선이 밀린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루였던 제주도에서 반격의 힘을 비축한 셈이다. 

해병대와 제주도의 인연은 19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만남은 악연이었다. 1949년 4월 장교와 사병을 합쳐 380명으로 창설, 진해와 진주에 주둔했던 해병대는 12월 28일 제주도로 이동한다. 

한라산의 공비토벌과 4·3 사건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제주도민들은 국군에 대한 피해의식과 일종의 원한을 갖고 있던 시기였다. 

▲ 제주 4·3사건 파견 해병대. 제주도인 3000명이 자원 입대해 구성된 해병대는 이후 6·25전쟁의 주인공이 된다.

이 때문에 제주도민 입장에서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외지에서 온 해병대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해병대가 제주도로 온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1950년 6월, 6·25 남침전쟁이 발발했다. 

위기에 몰린 우리 군은 임시 해병대 사령부를 제주도에 세우고 국군 훈련소를 제주도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신현준 당시 해병대 사령관이 제주도에서 해병대 사병을 모병했다. 

이때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외지인과 우리 국군을 경계하던 제주도민이었지만, 고등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포함, 3000명이 해병대에 지원한 것이다. 여기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군 학도병 126명도 포함돼 있었다. 

일각에서는 이와 관련 아픈 역사이지만 4·3사건으로 가족과 이웃이 공산주의자, 소위 ‘빨갱이’로 몰린 데 대한 오명을 씻기 위해 자원 입대가 줄을 이었다고 한다. 

제주도 출신 해병들은 4·3 사건을 통해 덧씌워졌던 ‘빨갱이’란 오명을 씻기 위해, 제주도민들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명예회복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용맹무쌍하게 싸웠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조국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이렇게 모인 제주도 출신 해병 3, 4기가 대한민국 해병대의 주축이 돼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9·28 서울수복작전을 이끈다. 제주도를 해병대의 본산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병대는 현재 제주도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출정한 날을 ‘해병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6·25 전쟁에서 만들어진 불패(不敗) 해병, 무적 해병의 신화는 제주도에서 시작한 셈이다. 


인천상륙작전, 서울 수복 때 혁혁한 전공 

제주도에 투입돼 공비를 토벌하면서도 제주도민들을 위한 봉사와 보호활동을 펼친 것도 해병대가 민심을 얻은 비결이다. 

해병대는 제주도로 이동한 후 4·3 사건으로 피폐한 제주도민들에 대한 민심 수습을 위해 새로운 차원의 노력을 경주했다. 

그 당시 제주도민들은 대부분 공비들과 혈연관계에 있었던 탓에 군에 대한 공포와 원한을 품고 있었다. 

신현준 사령관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 장병들에게 ‘해병대는 적에게는 사자같이 무서운 군인이 되어야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온순한 양 같은 군인이 되어야 한다’고 정신교육을 통해 강조했다. 4·3 사건 때 공비들에게 학살당한 도민들의 제사에도 참석해 주민들과 신뢰를 쌓기도 했다. 

공비를 섬멸하기 위해 투입된 해병대와 국군에게 가족과 이웃이 피해를 봤다고 생각하는 제주도민, 처음에는 어색하게 만났지만 현재 해병대는 제주도를 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1950년의 제주도민이 4·3 사건으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한 해병대를 만들어낸 역사에서 제주도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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