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북한 '판가리 전략' 최초 공개
황장엽, 북한 '판가리 전략' 최초 공개
  • 미래한국
  • 승인 2015.04.14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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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김정일 비밀 연설 녹취록 통해 알려져

핵미사일로 美 증원군 격멸, 재래식 전력으로 국군 궤멸시키고 3~5일內 전쟁 종결

▲ 홍성민 안보정책네트웍스 대표 

‘판가리’는 ‘생사존망을 결판낸다’는 북한 용어다. 따라서 판가리 전략은 ‘사생결단(死生決斷)식 전쟁으로 남한을 통일한다’는 김정일의 남침전략이다. 

이 전략은 황장엽 전(前) 노동당비서가 망명 때 가져온 김정일의 비밀 연설 녹취록을 통해 최초로 알려졌다. 

이 녹취록은 1990년 중반 김정일이 김일성대학에서 군·당·정(軍黨政) 핵심간부에게 행한 비밀 연설 내용이다.  

“내가 주석께서 돌아가신 후 경제부문을 경제 관료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고, 조선반도의 판세를 단번에 뒤집을 전략에 매진하고 있는데… 경제 분야의 성과가 매우 미흡하다… 군사분야에 대한 검열도 강화하겠다.” 

황장엽 전 비서는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으며, 3일 내 부산을 점령하는 새로운 남침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인간어뢰나 항공기로 미(美) 항공모함 격침” 또는 “장거리 미사일로 일본을 초토화”할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등 새로운 북한의 대남(對南) 군사전략을 공개했다.

현재 북한의 핵무장과 전략미사일 개발 그리고 천안함에 대한 잠수함(정) 공격을 연상시키는 초특급 군사정보였다. 

그러나 당시 김영삼 정부는 황장엽의 정보를 언론에 공개했다. 분단 이후 최고위 망명자의 최고급 대북(對北) 군사정보가 무시된 것이다. 

▲ 황장엽이 우리 정보당국에 제공한 김정일의 남침도발전략을 보도한 언론(경향신문 1997. 7. 10). 우리 정부는 북한의 식량난 등을 근거로 이 정보에 대한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당시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그래서 “굶어 죽어가는 북한이 무슨 전쟁을 도발하겠느냐?”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게다가 황 전 비서와 김일성, 김정일의 특수 관계도 고려되지 않았다. 

황장엽 전 비서는 1958년 김일성의 공산주의 이론서기로 출발, 1965년부터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김정일의 개인 교육을 맡았으며, 최근 처형된 장성택 등 북한의 최고 엘리트들의 스승이었다. 

1972년부터 11년 동안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지냈으며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이른바 ‘김일성주의’로 발전시켰다. 또 김일성 우상화를 제3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20여 차례에 걸쳐 30여 개국을 순방했다. 

김정일은 북한 내부적으로 ‘친애하는 동지’, 또는 ‘당(黨)중앙’으로 호칭된 1974년 2월부터 실질적인 후계자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이복동생인 김평일로 인해 늘 긴장했다. 황장엽 선생이 북에 있을 때 군사문제와 무관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김정일은 황장엽에게 본인이 후계자로서 비밀 군사전략을 잘 추진하고 있음을 아버지 김일성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하곤 했다. 이 과정에서 황 전 비서가 김정일에게 직접 설명 들은 것이 이른바 ‘판가리 전략’이다. 

당시 안기부는 황 전 비서가 “직접 확인할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170여 개의 관련 징후 목록상 공격 징후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최고위층이었던 황장엽의 북한 내 위상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황장엽이 우리 측에게 제공한 최고급 정보에 대한 무시는 결국 북한의 핵 개발과 신(新)전면전쟁 계획을 막지 못 하는 대재앙의 서곡이 되고 말았다.


김정일, 선군(先軍)정치로 새로운 남침전략 완성 

김일성의 3년상(喪)을 마친 북한은 대포동 1호(1998.8.31)를 발사했다. 이것이 김정일 시대를 실질적으로 여는 신호탄이었다. 

국방위원장으로 재추대(1998.9.5)된 김정일은 강성대국론(1998.10)을 선포했다. 이후 노동신문(1999.7.7)은 ‘미제(美帝)와 판가리 결전준비 차원의 북한식 작전계획’을 완성했음을 보도했다. 

우리는 북한이 경제난 때문에 재래식 전쟁을 포기하고 핵 개발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김정일은 우선 ‘조선반도의 판세를 단번에 뒤집기’ 위해 북한의 정치·경제·군사 시스템을 완전히 개조했다. 이른바 강성대국론이다. 김정일은 “2012년까지 북한을 강성대국의 반열에 진입시키겠다”고 공언했다.  

▲ 북한은 김정일이 강성대국을 선포한 후 전투부대 중 70%, 화력의 80%를 휴전선에서 100km 이내로 전진 배치했다.

강성대국론의 핵심은 선군정치론과 판가리 전략이다. 선군정치는 강성대국을 건설하기 위해 ‘정치사상·반제(反帝)군사·경제과학 공동전선의 구축’을 의미한다. 

사상적으로 ‘군대가 곧 당이고 국가이며 인민’이라는 슬로건 아래 군의 국가통치기능을 확대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식 사회주의’와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전면에 내세운다. 

1990년 초반 북한은 소련 및 동구권 몰락과 중국의 개방, 한중(韓中)·한소(韓蘇) 수교로 주체사상에 대한 불신이 심화되고 있었다. 

특히 경제난으로 사회주의 지상낙원이 허구임이 드러났다. 게다가 황장엽, 장승길(이집트 주재 북한 대사로 1997년 미국으로 망명) 등 핵심계층 망명으로 인해 북한 체제는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이때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포기하고, 전면에 내세운 것이 우리식 사회주의다. 


조선반도의 판세를 단번에 뒤집는다! 

우리식 사회주의는 조선민족 제일주의에 기반한다. 동구권 붕괴는 주체사상, 김일성 부자(父子)와 같은 위대한 사상·지도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류의 사회주의 지향은 역사의 법칙, 김정일 중심 단결로 구현된다고 주장했다. 

조선민족 제일주의 5원천은 ‘지도자, 주체사상, 혁명혈통, 북한식 사회주의, 민족 고유역사’다. 

특히 북한은 탄약(170만 톤), 유류(160만 톤), 식량(120만 톤)의 전시(戰時) 비축물자를 유지하기 위해 ‘도(道) 단위 자력갱생 지시’를 하달했다. 

인민에 대한 식량 분배권을 포기한 것이다. 이로 인해 고난의 행군기간 300만 명 이상의 인민이 굶어 죽었다. 경제난으로 인민이 죽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쟁전략을 구현하기 위해 인민을 아사(餓死)시킨 것이다. 

김정일의 판가리 전략은 1991년 공산권 붕괴와 1992년 걸프전에서 드러난 미국의 첨단전쟁의 충격으로 탄생했다. 한미(韓美) 연합전력에 대한 구조적 열세를 일거에 역전시키기 위해 김정일에 의해 계획된 것이다. 

고난의 행군시기의 심각한 경제난은 북한이 기존의 항공기 함정 등 장비 위주 재래전력 중심의 군사력 증강 및 전쟁 지속능력 유지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에 북한은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전력구조와 군사전략을 완전 개편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뒤집을 것인가? 

첫째, 핵과 전략미사일을 공개 개발하는 동시에 사단급 미사일 부대를 군단급으로 증편했다. 핵과 전략미사일은 미국과 일본의 증원과 지원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기 위함이다. 

현재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사거리 1만km 내외)은 10여 기,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사거리 3000km 내외)은 30여 기, 그리고 노동 및 스커드 미사일을 포함 약 1000여 발의 전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둘째, 김정일은 강성대국 기간 북한의 전력구조와 군부대 배치를 완전 개편했다. 군부대를 정예화해서 전방으로 배치한 것이다. 

이는 속도전을 수행하고 개전 초기에 기습을 달성하기 위함이다. 조보근 국방부 정보본부장(중장)은 국회 정보위원회 국감(2013.11.5)에서 김대중 정부 이후 최초로 김정일의 판가리 전략의 추진 결과를 공표했다. 

그는 “북한군이 휴전선에서 100㎞ 이내(황해도 사리원~강원도 통천 라인 이남)에 북한 병력의 70%(70만 명), 화력의 80%를 전진 배치하고 있다”고 밝혔다. 

과거 북한군은 휴전선에서 150㎞ 이내(평양~원산 라인 이남)에 병력의 70%를 배치했었다. 

이어 조 본부장은 1990년대 중반 시작된 북한의 전력증강 실태와 대규모 군 구조 개편, 그리고 개편된 북한군 주력부대의 최전방 추진 등에 대해 설명했다. 

이 설명은 과거의 대북(對北) 군사위협평가와 크게 다른 것이다. 1999년과 2012년 발행된 ‘국방백서’ 비교에 따르면 북한은 행정적인 역할을 주로 하는 군단을 1999년 21개에서 2012년에는 15개로 대폭 감축했다. 대신 실제 전투를 담당할 사단은 같은 기간 63개에서 90개로 늘렸다. 

셋째, 소형 핵탄두를 활용한 전자기 펄스 폭탄(EMP·Electromagnetic Pulse Bomb), 한국의 원전·철도·금융망을 와해시키기 위한 사이버 공격, GPS 공격, 비지속성 화학탄 등 비대칭 공격 능력을 확보했다. 

그 동안 우리는 ‘북한은 경제난으로 전면전쟁을 감행할 능력이 없다’라는 대전제 하에 대북 및 국방정책을 시행해 왔다. 

그러나 북한은 이 기간 동안 개전 3~5일 만에 부산을 점령하고 7일내 안정화 작전을 완성하는 새로운 전쟁계획을 수립했다. 

천안함·연평도 공격은 단순한 국지도발이 아니었다. 한반도를 조기 적화(赤化)하기 위한 서해안 기습상륙 작전 훈련이었던 것이다. 
   

판가리 전략, 김정은의 2015 통일대전으로 계승

김정은도 판가리 전략을 계승해 전쟁 준비 완료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것이 최근 군 정보 당국에 의해 발표된 김정은의 ‘2015 통일대전’이다. 

김정은은 후계자로 내정된 2009년 9월 전후에 발생한 주요 도발 및 사건에 깊게 관여했다.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을 비롯해 천안함 폭침(2010년 3월), 연평도 포격(2010년 11월)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판가리 전략에 총력을 기울였던 김정일 시대에 이어 김정은 시대에 핵탄두를 소형화함으로써 통일전쟁 준비의 완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김정은이 추진하고 있는 경제·핵 무력 병진노선은 “국방에서의 자위를 위해 경제 발전을 지연시키더라도 군사력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는 김일성의 경제·국방 병진노선(당 대표회의·1966년 10월)의 김정은식 버전이다.

이는 또 장거리 미사일과 핵무기 보유를 추진한 김정일의 판가리 전략을 계승한 것이다. 
판가리 전략은 2013년 3월 선포한 ‘우리 식 전면전’ 전략과 같은 맥락이다. 

당시 김정은은 “전선부대들을 비롯, 육군·해군·항공 및 반(反)항공군, 전략로케트군 장병들이 우리 식의 전면전을 개시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며 전면전쟁 계획을 최초로 공개했다. 

우리 식 전면전은 핵미사일로 미국의 증원과 일본의 지원을 차단하고 대량살상무기(WMD)·장사정포·특수전 부대와 재편성된 재래식 전력으로 미군의 증원 이전 3~5일 이내에 전쟁을 종결하겠다는 계획이다. 

김정은의 무력통일 의지는 그동안의 발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나의 통일관은 무력통일이며 직접 탱크를 몰고 서울로 진격하겠다”(2011년), “한번은 반드시 적들과 싸워야 한다” “3년 내 혁명 무력으로 통일할 것”(2013년), “2015년 통일대전을 준비하라” “조선혁명 완수를 위해 적들과 총결사전을 벌이자”(2014년)…. 김정은은 올해 초 군 지휘관 회의에서도 “2015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통일대전을 위해 전략물자를 최대한 마련하고, 언제나 전쟁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다하라”고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설마 하다가 이제 우리는 핵무기를 실전배치한 적과 맞서 싸워야 하는 백척간두의 상황으로 내몰렸다. 

사정이 이토록 엄중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은 무기 도입과 관련한 참모총장을 비롯한 고위 장성들의 뇌물 수수, 저열한 성능의 장비 도입, 여군 성추행 등 총체적으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종북(從北)좌파들의 안보정신 무력화, 국가정보원 무장 해제 공격 등 내전을 방불케 하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이제는 북한과 싸우기도 전에 스스로 자멸하는 것이 아닌가를 우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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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2015-04-19 06: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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