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수립보다 앞선 해군 창설
정부 수립보다 앞선 해군 창설
  • 정재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5.04.2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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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해군 창설 70년, 충무공 탄신 470년

1945년 11월 11일 '해방병단' 설립하고 우리바다 지켜

6·25 전쟁에서 미군과 우리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9월 28일, “서울을 되찾았다”는 대(對)국민 포고문을 발표한 대한민국 국군 최고지휘자는 육군이 아닌 해군이었다.

주인공은 해군참모총장이었던 고(故) 손원일 제독으로, 그만큼 해군이 당시 우리 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의미다. 손 제독은 해병대를 지휘하여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 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해군은 이뿐만 아니라 6·25 개전 초기, 전략적으로 의미 있는 전과(戰果)를 여러 차례 올리며 제해권을 장악했다. 개전 다음날 새벽 북한 특수부대 600여 명을 싣고 부산으로 침투하던 무장 수송선을 한국 최초의 전함 백두산함(PC-701)이 울산 앞바다에서 격침시켰다.

후방을 교란하려 했던 북한군의 의도를 봉쇄하고 우리가 부산에서 전열을 가다듬는 데 기여했던, 이른바 ‘대한해협 해전’이다. 특히 해병대는 17일간의 격전 끝에 24개 봉우리를 점령했던 ‘도솔산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무적(無敵)해병’이라는 칭호를 수여 받았다.

 

70명의 해군 용사(勇士)가 지킨 우리 바다

올해는 해군이 창설된 지 70주년 되는 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3년 전인 1945년 해군이 먼저 탄생했다. 6·25 전쟁 당시 해전에서 우위를 점했던 것도 이렇게 미리 준비를 시작했던 덕분이다.

▲ 해방병단 기념 사진. 해방병단은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로, 해군이 6.25전쟁에서 뛰어난 전공을 올리고 현재의 대양해군으로 발전하는 데 발판이 됐다.

서울 수복 포고문을 발표했던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은 정부도 없던 시절에 해군을 설립하고 체계를 만들어 나가는 산파 역할을 했다. 광복 이후 무주공산이 된 우리 바다를 우리 손으로 지키기 위해서였다.

손 제독은 1945년 11월 11일 오전 11시 정각, 70명의 청년들과 함께 서울 종로구 관훈동 옛 표훈전 건물에서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설, 해안 및 도서 순찰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해군의 모체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11월 11일 11시에 결단식을 가진 이유는 ‘해군은 신사(紳士)여야 한다’는 손 제독의 신념 때문이었다고 한다. 11을 한자로 풀면 ‘十’과 ‘一’로 선비 사(士)자가 된다.

미군정청과 협의해 창설한 해방병단은 장차 정부가 수립되면 정식 해군으로 개편한다는 전제로 시작한 준(準)군사 조직이었다. 중국 상하이(上海) 국립중앙대학 항해과를 졸업하고 중국과 독일 상선에서 승무원으로 근무했던 손 제독처럼 항해 경험이 있는 인력들이 주요 자원이 됐다.

1946년 진해를 중심으로 해상 경비를 개시한 해방병단은 인천기지 창설을 시작으로 목포·묵호(동해)·부산·군산·포항·진해에 해군기지를 창설했다. 이들은 전투함은 한 척도 없었고 일본이 남기고 간 목선 몇 척이 전부였다.

미국 정부에 지원을 요청해 1948년까지 총 37척의 함정을 인수했지만, 소해함이나 지원함 같은 비전투함이었다. 정부가 수립되고 해방병단이 정식 해군으로 개편됐지만 이러한 소해함이나 지원함으로 우리 영해를 지킬 수는 없었다.

 

해군 월급과 부인들 삯바느질로 모은 돈으로 전투함 구입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함 도입을 주도한 사람은 손 제독이다. 해군 장병들의 급여를 일부 갹출해서 자금을 모았고, 해군 부인회가 삯바느질을 하거나 스카프를 만들어 내다 판 수익금을 합쳐 전투함 구입 비용을 만들었다.

여기에 국민 성금과 정부 지원금까지 합쳐져 당시로선 엄청난 액수인 약 12만 달러가 마련되었다. 손 제독은 피눈물이 배어 있는 ‘함정건조기금’을 갖고 1949년 10월 미국으로 가서 450톤 급 퇴역 초계함 4척을 구매해 왔다. 이때 도입한 첫 번째 전투함이 바로 6·25 직후 대한해협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백두산함이었다. 손원일 제독은 1953년 6월 전역하여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 6.25 개전 초기 '대한해협 해전'에서 승리한 백두산함. 해군은 이 해전에서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부산에 침투하던 북한 특수부대 600여명을 실은 무장 수송선을 격침했다.

이처럼 척박한 환경으로 출발한 우리 해군은 1963년 미국으로부터 퇴역 구축함을 도입한 이래 꾸준히 발전해 왔다. 1998년 3000톤 급 구축함인 광개토대왕함, 4000톤급 구축함 충무공 이순신함 등 우리 기술로 건조된 한국형 구축함을 실전 배치했고, 2007년 이지스 체계를 탑재한 7000톤 급 구축함 세종대왕함을 실전 배치했다. 잠수함은 1992년 장보고함을 도입한 이래 국내 양산체계를 갖췄다.

 

28일 오후 해군 창설 70주년, 충무공 탄신 470년 기념 음악회 열려

창설 70주년을 맞은 해군은 다양한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충무공 이순신 탄신 470년이 되는 해다. 해군본부는 4월 28일 오후 7시 30분 광화문 광장 야외 특설무대에서 ‘나라사랑 호국음악회’를 개최한다. 음악회뿐만 아니라 해군 군복 체험 등 다채로운 해군 관련 이벤트가 펼쳐질 예정이다.

이번 음악회에는 해군 창설·광복 70주년과 충무공 탄생 470주년에 맞춰 황인자 국회의원이 작사한 ‘1597’이라는 헌정곡이 공연된다. 명량해전이 있었던 1597년을 상징하는 헌정곡 ‘1597’은 황 의원이 난중일기의 내용, ‘충무공전서(全書)’의 한시(漢詩), 현충사에 전시된 충무공의 칼에 새겨진 글귀를 엮어 가사를 지었고, 민경훈 한국교원대 교수와 강동수 나라뮤직 대표가 곡을 썼다.

나레이션(2분 20초)과 노래(3분 41초)를 합쳐 총 6분 길이의 곡으로 바리톤 염현준 씨가 노래했다. 해군 군악대는 이 곡을 상시 연주곡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 아래 주소에서 충무공 헌정곡 ‘1597’의 음원을 다운 받아 감상할 수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eqhwang543/220184808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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