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개인의 특별한 자살
어떤 개인의 특별한 자살
  • 미래한국
  • 승인 2015.05.0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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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문화 코드로 본 자살

성완종 씨의 자살은 ‘타인 전가형 소통적 자살’

▲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자살은 우리 정서가 아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했다. 자살에 대한 우리의 오래된 관념은 공포와 부정(不淨)이다. 

저승을 이승과 유기적으로 묶어, 오고 가는 것으로 해석한 것은 이 공포를 퇴화시키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고대 한반도 북부에서 사람이 죽으면 집을 태워버린 것은 부정의 증거다.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자살은 갑신정변 직후다. 실패한 거사자들이 달아나는 동안 가족들은 집단으로 자살을 이어갔다. 

홍영식의 아버지는 어린 손자를 독살한 뒤 자살했다. 홍영식의 아내도 자살했다. 박영효의 아버지도 어린 아들을 죽이고 자살했다. 서재필의 아내와 아버지도 자살했다.

우리는, 조선은 죽음을 숭상하고 의미를 부여하여 예의를 갖추는 나라가 아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더 큰 공포 앞에서 그들은 상대적으로 작은 공포를 선택한 것뿐이다. 

우리나라는 자살 왕국이다. 2004년부터 OECD 국가 중 자살순위 1위를 내준 적이 없다. OECD 평균은 인구 10만 명당 13명 정도이고 우리는 30명 내외로 세 배 가까이 된다.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람이 1년에 6500명 정도인데, 자살자는 1만4000명이 넘는다. 한 달에 1000명이 넘는 사람이 자살한다. 20명 중 한 명이 성공한다니 계산하다보면 무서워진다. 


자기 귀책적 자살, 타인 전가적 자살

전통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했던 나라에서 이렇게 죽음이 횡행하니 놀라운 일이다. 자살이라는 형이상학을 사회학의 영역으로 끌어온 뒤르켐은 자살을 개인적인 문제에서 사회적인 힘이 작용하는 ‘사회적 사실’로 설명했다. 

뒤르켐 이후 ‘지위변동이론’이라는 게 등장했고, 도시의 익명성이 고립과 정서적 긴장을 유발해서 자살이 늘어난다는 ‘도시론’도 나왔다. 

설명이 되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 수많은 자살과 이 자살은 결이 다르다. 이 자살은 ‘타인 전가형 소통적 자살’이라는 매우 특별한 경우다. 성완종 씨의 자살 이야기다. 

▲ 성완종 회장의 자살은 삶의 포기가 아니라 자신의 분노와 배신감을 복수하기 위해 감행한 '소통을 위한 자살'이다.

소통적 자살은 타인을 염두에 둔 자살이다. 대략 여덟 개 정도로 유형을 나눌 수 있는데 회피형, 이해형, 해결형, 배려형은 ‘자기 귀책적’이다. 내 책임이올시다, 자인하여 스스로와 타인을 배려하는 가운데 자살하는 것이다. 

나머지 넷은 ‘타인 전가적’인 자살이다. 비난형이 있고 각인형이 있고 고발형이 있으며 탄원형이 있다. 

비난형 자살은 일방적인 소통 행위다. 내가 이런 줄 몰랐지? 당신이 내게 어떤 짓을 했는지 알아? 같이 사후(死後)에 통보하는 식이다.

각인형 자살은 고통의 기원을 상대에게 확정하고 그 사람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려는 유형이다. 

폭력과 외도를 일삼은 남편에게 끓는 물을 끼얹고 자살한 아내는 그 상처를 볼 때마다 나를 떠올리라는 저주의 소통을 실현한 경우로 상호 지향적이다. 

고발형 자살은 일방적 소통 행위로 자신의 고통을 타인의 행위의 결과로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의도로 감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자살의 목적은 억울함의 개인적인 해소다. 

마지막이 탄원형이다. 이 자살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구체적인 해결을 촉구하는 경우다. 당연히 상호 지향적인 이 탄원형의 특징은 탄원이 주 목적이며 자살은 그저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전략적이고 의도적인 행위이며, 살아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권력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서의 수신인은 대부분 회장님이나 대통령이다. 

성완종 씨의 자살은 삶의 포기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소통행위다. 이 경우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며, 삶이라는 프로젝트의 일부가 된다. 

성완종 씨에게는 죽음까지 삶의 당당한 한 부분이 되는 것이며, 그리고 그 프로젝트는 상당한 동력을 가지고 굴러가고 있다. 

그러면 다 이뤘는가. 도덕의 문제가 남았다. 도덕적 개인이 비(非)도덕적 개인에게 자살로 응사한 것은 의미가 있다. 

도덕적 개인이 죽음이라는 형식으로 사회적 발언권을 신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도덕적 개인이 역시 비도덕적 개인에게 던진 자살은 ‘자기 살해’라는 형식에도 불구하고 입지가 넓지 않다. 

그 부분까지 아마 성완종 씨는 계산하고 갔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자신이 얻을 것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최후를 감행했다는 것은 그의 분노와 배신감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소통’을 위한 자살 

사실 자살에 대한 연구에는 별 관심이 없다. 사후의 증언이 뒤따르지 않는 한 그저 추정과 통계에 불과한 것들이다. 

죽음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다. 다만 자살에 대한 몇 가지 사실들은 알아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자살은 가장 손쉬운 탈출구이며 비겁한 사람이 쓰는 방법이라는 통설이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몸에 상처를 내서 죽으려던 사람들은 죽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맞서 격렬하게 싸워야 했던 경험을 털어놓는다.

피는 툭하면 멎어버리고 칼날은 생각만큼 깊게 파고 들어가지 못한다. 심지어 머리에 총을 두 번이나 쏜 사람도 있다. 

처음 생각했던 방식으로 실패하여 다른 방법을 동원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그래서 몸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던지거나 뛰는 것이다. 

몸의 저항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살보다 차라리 살인이 더 쉽다고 말한다. 자살은 고통스럽고 끔찍한 행위이지만 절대 쉽지는 않다. 

한편 자살하는 사람들의 4분의 1 정도가 유서(遺書)를 남긴다. 유서의 내용은 놀랍게도 매우 일상적인 것이다. 

열쇠는 어디에 있는지, 받아야 할 돈이 얼마나 있는지, 미납한 세금이 있다든지 하는 따위의 사소한 것들이다. 심지어 자신의 시신(屍身)을 발견할 사람을 배려하여 이후 행동 요령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의 인지력은 높은 수준의 사고가 아닌, 눈앞의 목표나 생각, 행동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성완종 씨의 메모가 이 틀에서 벗어난 것은 그가 얼마나 타인 전가적인 목적으로 ‘소통’을 감행했는지 알려주는 또 다른 단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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