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6·25 참전 도운 매카시 의원, 빌리 그레이엄 목사
미국의 6·25 참전 도운 매카시 의원, 빌리 그레이엄 목사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6.25 10: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25발발 65주년 특집] 미국의 한국전 참전 秘史

트루먼, 아시아 전체의 공산화 막기 위해 한국에서 ‘반공의 聖戰’ 벌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1950년 6월 24일(미국 시간) 밤 9시, 딘 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북한 인민군의 전면적인 남침 관련 보고를 받았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6월 26일 저녁,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군을 돕기 위해 공군력 사용을 결정했고, 6월 30일 한국 전선을 시찰하고 온 맥아더 원수의 건의를 받아 지상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했다. 미국 역사상 이렇게 신속한 파병 결정을 한 사례는 두 번 다시 찾아보기 힘들다. 

1950년 12월 한국전쟁 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미8군 사령관 워커의 후임으로 한국에 온 리지웨이 장군의 저서 <한국전쟁>에 의하면 한국에서 전쟁이 터질 무렵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만을 계획하고 있었을 뿐, 봉쇄선 주변의 한국과 같은 지역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국지전에 대한 긴급대응계획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 결과 미국은 예고도 없이 전쟁에 휩쓸렸고, 미국 국민도 이해하지 못한 지구 반대편의 싸움에 말려들었다는 것이다. 

트루먼은 자신의 한국전 참전이 아시아 전체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반공의 성전(聖戰)’이라고 말했다. 이정식 교수는 트루먼 대통령이 인민군의 대규모 남침은 스탈린이 세계 공산화를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판단하고, 한국에서 스탈린의 공세를 막기 위해 신속하게 참전을 결정했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미국의 신속한 참전 결정을 도운 두 명의 은인(恩人)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바로 ‘매카시즘(McCarthyism)’ 선풍을 몰고 온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과 세계적인 부흥 목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다. 

1950년 1월 12일,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아시아의 위기: 미국 정책의 시험대’라는 연설을 했다. 이날 애치슨은 “아시아에 있어서 미국의 방어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을 지나 오키나와와 타이완을 거쳐 필리핀으로 그어진다”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인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 당원대회에서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은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나는 297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을 갖고 있다”고 폭탄선언을 하면서 미국 내에서 이른바 ‘빨갱이 사냥’이라는 반공 열풍이 불었다. 

그 시절 미국의 보수 반공주의자들은 중국 대륙의 공산화(1949년 10월 1일), 소련의 원폭 실험(1949년 8월 29일) 등에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공화당 지지자들은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 등 민주당 지도부가 공산주의에 지나치게 유화적이고, 정보관리가 허술하여 소련에 원자폭탄 비밀이 누설됐다며 공격을 퍼부었다. 

▲ 빌리 그레이엄 목사(左), 조지프 매카시 의원(右)

반공주의자들의 오해 사지 않기 위해 재빨리 참전 

거센 반공 열풍으로 정치적 위기에 처한 트루먼과 애치슨은 정부 요원들에 대한 충성 재검토 작업으로 수세에서 탈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매카시의 활동에 신뢰성을 높여주는 결과만 초래했다. 

트루먼과 애치슨은 공화당과 반공세력의 압력, 그리고 내부적으로 안보문제를 은폐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반공 공화당원인 존 셔먼 쿠퍼와 존 포스터 덜레스를 입각시켰다. 덜레스는 자신이 동아시아의 정책 결정에서 강력한 실권을 가진다는 조건으로 트루먼 행정부에 합류했다. 

이후 트루먼과 애치슨은 ‘소련에 대한 총력외교’로 방향을 수정했고, 한국에서 공산군이 전면 남침하자 반공주의자들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미국의 즉각 참전을 결정했다는 것이 미국 정치학자 스테펜 펠츠의 분석이다(스테펜 펠츠의 ‘미국의 대한정책 결정’, <한국전쟁과 한미관계>, 도서출판 청사) .

스테펜 펠츠는 트루먼 대통령이 6·25 남침 보고를 받자 ‘대단히 신속하게’ 참전 결정을 내렸다고 지적한다. 블레어 하우스 회의에서 보좌관들을 만나기 전에 이미 트루먼은 참전 결심을 굳혔으며, 보좌관 회의에서는 한국을 구원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라 한국을 구원하는 방법에 대한 토론이라는 주제를 명시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트루먼이 신속하게 한국전 참전 결정을 내린 배후에는 매카시 의원의 활약이 숨어 있었다고 봐야 한다. 말하자면 매카시즘이 한국을 위기에서 구해준 셈이다. 

1995년 7월 11일, 미국 정부는 냉전 시절 ‘베노나 프로젝트’(Venona Project)라는 이름으로 진행됐던 소련 암호 해독 문서를 공개했다. 베노나 프로젝트 덕분에 매카시 의원이 공산당, 혹은 소련 간첩으로 지목했던 인물들이 실제로 간첩활동을 한 행각이 드러났다. 얄타 회담에 참석한 후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갔던 미국의 핵심 스파이가 ‘알레스’란 가명을 사용한 앨저 히스로 밝혀졌고, 소련으로 원자탄 기밀을 유출한 줄리우스 로젠버그, 저널리스트로서 한국전이 미국의 음모에 의해 북한을 먼저 침략한 것으로 기술한 <비사(秘史) 한국전쟁>의 필자 I. F 스톤 등이 모스크바의 첩자임이 밝혀졌다. 

이밖에도 루스벨트 행정부의 재무부 차관, IMF 총재를 역임했던 해리 덱스터 화이트, 트루먼 대통령의 중국 문제 보좌관 프랭크 코우 등도 소련 간첩이란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앤 코울터는 1940년대와 1950년대 미국 행정부 안에 수백 명의 소련 간첩들이 벌집처럼 다닥다닥 진을 치고 원자탄, 군사문제, 레이더, 항공, 로켓 프로그램 등 모든 기술적 정보를 닥치는 대로 훔쳐 소련으로 퍼 날랐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신속한 한국전 참전의 배후에는 당시 30대 후반의 젊은 침례교회 목사로서 세계적인 부흥 바람을 일으킨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역할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1950년 무렵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평화 무드에 젖어 있었다. 이 와중에 그레이엄 목사는 전국 순회 집회를 하면서 “미국인이여 평화무드에서 깨어나라”고 외쳤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북한 공산군의 남침이 시작되기 두 달 전인 4월 23일 보스턴에서 2만5000여 명이 모인 대집회를 열었다. 

“미국인이여 평화무드에서 깨어나라”

이날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집회 도중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한다. 평화무드에서 깨어나 군사력을 강화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국 회개의 날을 선포할 것을 요구하면서 ‘진정한 평화를 위한 5가지 방안’을 발표했다. 

첫째는 미국이 강력한 군사력으로 재무장하여 이웃을 도울 준비를 해야 한다. 둘째, 국내 안보, 셋째는 경제 안보, 넷째는 인종과 피부색, 종교를 뛰어넘는 미국인들의 신뢰 회복, 다섯째, 개개인은 예수 안에서 회개하고 믿음을 회복할 것과 겸손을 갖고 평화를 위한 전국적인 연합기도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부인 루스 그레이엄 여사의 영향 덕분이다. 루스 그레이엄 여사는 일제 때 북한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의 딸로서, 함경북도 함흥이 출생지다. 부흥목사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던 빌리 그레이엄의 이런 외침은 백악관을 비롯한 미국 지도층에게 전해졌고, 트루먼은 미국이 본격 참전을 결정한 후인 1950년 7월 14일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