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적 감청조차 못하는 대한민국
합법적 감청조차 못하는 대한민국
  • 정재욱 기자
  • 승인 2015.06.30 1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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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논란

 

선진국은 휴대폰 감청뿐만 아니라 PC·스마트폰 해킹을 통한 범죄 증거 확보까지 합법화

 

지난해 2월 세계 최대의 ‘마약왕’ 호아킨 구즈만이 멕시코 서부의 한 해변 리조트에서 체포됐다. 구즈만은 2001년 세탁물 바구니에 숨어 탈옥한 후 13년 간 경찰의 추적을 따돌려 왔던 신출귀몰한 인물이다.

이중 삼중의 경호와 비밀리에 움직이던 그를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 마약단속국 등 수사 당국이 범죄 조직의 휴대전화 감청을 통해 결정적인 단서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미국 CIA가 2011년 오사마 빈 라덴의 은신처를 알아내 그를 사살할 수 있었던 것도 휴대전화 통화 분석의 힘이 컸다.

정보 요원들이 도청·감청을 통해 범인을 붙잡는 장면은 스파이를 소재로 한 할리우드 영화뿐만 아니라, <감시자들> 같은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가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국가정보원의 요원이나 경찰들은 간첩이나 테러리스트로 의심이 되는 사람이 있어도 그가 사용하는 휴대전화 통화를 감청할 방법이 없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남한 내에서 암약하는 북한의 고정간첩들이 휴대전화로 버젓이 북한의 지령을 하달(여간첩 원정화, 일심회, 왕재산 사건 당시 확인) 받고 있는 상황이다.

또 납치 살해 등 강력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하는 용의자를 붙잡는 데도 휴대폰 감청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세월호 사건 이후 유병언 전(前) 세모그룹 회장은 타인 명의의 휴대전화를 사용하며 검경의 추적을 피했다. 유병언이 휴대전화를 통해 측근들과 도피 계획을 수시로 모의했으나, 감청 능력이 없는 우리 수사 당국은 번번이 체포에 실패했다.


간첩의 휴대전화조차 감청 못해
 

왜 그럴까?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제15조 2)에 따르면 모든 전기통신에 대하여 법원의 허가 또는 대통령의 승인에 따라 감청 집행이 허용돼 있으며, 전기통신사업자는 정보수사기관의 감청 집행에 협조해야 한다. 문제는 SKT, KT 등 통신사업자의 감청 협조 설비 구비가 의무화되어 있지 않아 관련 법령이 유명무실화 되어 버렸다. 유선전화는 전화국이 개별 전화선의 연결 협조만 하면 감청이 가능하지만, 유무선 통신 중 75% 이상을 차지하는 휴대전화(국내 5600만여 대 보급)는 감청 대상자의 전화 회선만을 선별할 수 없는 데다가, 통화 내용이 부호화 되어 있어 통신사업자의 협조 설비 구축 없이는 감청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국정원이 감청에 직접 나서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국정원은 과거 2005년 8월 불법 도청에 대한 대(對)국민 사과를 한 이후 독자적인 감청 시도는 물론, 기술 개발이나 장비의 도입도 추진하지 않고 있다.

독자 감청은 기술적으로도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국정원이 대(對)국민 사과를 했던 당시는 2세대 휴대전화를 사용하던 시기여서 ‘휴대전화 감청장비’(CAS)를 통해 도청이 가능했지만, 단말기 고유번호 복제 방지용 USIM칩이 도입된 3세대 이상 휴대전화가 사용되는 지금은 통신사업자의 협조 없이는 감청이 불가능하다.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국회의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노력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1월 서상기 새누리당 의원이 대표 발의해 현재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에 계류돼 있는 통신비밀보호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대표적인 예로, 전기통신사업자가 감청 집행을 위한 협조 장비를 의무적으로 구비하도록 하고 있다. 전기통신사업자가 필요한 장비를 구비하지 않을 경우 미래부 장관이 연 20억 원 이하의 이행 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다. 장비와 설비 구축에 필요한 비용은 국가가 부담한다.

법안대로 되면 감청 업무는 ‘법원 허가→통신사업자의 감청 집행 및 내용 전달→국가기관의 통화 청취’ 등 3단계로 처리돼 결과적으로 정보수사기관은 통신업체가 전송해주는 특정한 감청 대상의 통신만 감청하게 된다. 이때 통신사업자는 감청 내용을 보관하지 않고 제3자가 알지 못하도록 암호화해서 국가기관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도 지난 6월 1일 비슷한 내용을 골자로 하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박 의원은 개정안은 검찰 및 경찰의 수사를 방해할 목적으로 휴대폰 등 통신 단말기를 타인에게 공여 또는 알선 제공할 경우 형사 처벌을 받도록 했다.


야당·일부 시민단체 반발로 번번이 무산
 

하지만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노력은 야당과 일부 시민단체의 반발로 번번이 무산됐다. 감청 권한을 정치적으로 남용하고 국민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개정 법안을 낸 의원들은 개정안이 일반 국민의 인권 침해는 최대한 방지하면서 국가안보 사범이나 테러리스트, 흉악범을 체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법안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서상기 의원은 “법 개정의 목표는 현재의 감청제도를 선진화하여 국가 안위를 위협하는 간첩, 테러 범죄를 예방하고 철저히 대응하는 것”이라며 “감청의 남용과 인권 침해 소지를 줄이는 방안이 이미 법안을 통해 충분히 마련됐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들에는 인권 침해의 소지를 방지하는 장치들이 만들어져 있다. 이를테면 국가기관의 독자 감청을 금지하고, 민·관 전문가로 구성되는 ‘통신제한조치 기술자문위’를 통해 불법 행위를 차단하는 조치 등이다. 특히 감청장치의 로그인 기록을 자동 보존함으로써 법원의 영장 대상자가 아닌 제3자의 ‘끼워 넣기’식 불법 감청을 막고 있다. 박민식 의원은 ‘통신제한조치 감시위원회’를 설치해 감청의 오·남용을 방지하도록 했다.

게다가 현행법에서 불법감청에 대한 처벌이 1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파면 및 공무원연금 박탈 등의 개인적 불이익을 감수하며 불법감청을 수행할 직원은 없다는 게 국정원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감청 도중 통화 상대방 등 다른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 수집한 정보는 법원이 허가한 감청의 목적과 다를 경우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통비법 제12조 통신제한조치로 취득한 자료의 사용 제한).

선진 각국은 1990년대 중반부터 법제화를 통해 휴대폰 감청에 필요한 통신사업자 협조 의무를 강제하고 있다. 미국은 1994년에 법집행통신지원법(CALEA)을 제정, 정보수사기관이 이동통신 감청 집행을 지원하고 국가안보위협 범죄에 대해서는 더 융통성 있는 감청 절차를 허용하고 있다.


선진국 사례


예컨대 감청 대상자가 통신수단을 수시 교체하여 감시가 곤란할 것으로 판단되면 감청 대상자가 사용하는 모든 통신수단에 대해 포괄적으로 감청을 허용(애국법 206조)하고, 미국 영토 밖의 외국인 대상 감청은 영장 없이 실시할 수 있으며, 이때 부수적으로 수집되는 자국민 통신도 수사·재판 자료로 활용 가능(해외정보감시법 702조)하다.

독일은 2008년, 벨기에는 2010년 관련 법안의 제정을 통해 테러 등 국가 안보 위협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휴대폰 감청뿐만 아니라 PC·스마트폰 등의 해킹을 통한 범죄 증거 확보까지 합법화하고 있다. 서상기 의원은 “감청을 허용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자는 게 아니라 현행법으로 허용하는 휴대전화 감청을 실제로 가능하게 하려는 법안”이라며 “개정 법률안은 감청에 대한 오·남용 우려를 고려하여 국정원이 휴대전화 감청 장비를 직접 보유하지 않고 선진국형 통신 감청체계를 갖추기 위한 노력”이라고 강조했다.

박민식 의원은 “여론조사 전문기관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우리 국민 10명 중 6명이 휴대전화 감청이 범죄자 검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며 “간첩뿐만 아니라 살인, 납치 등 기타 강력 범죄 용의자들의 검거를 위해서라도 감청이 실질적으로 시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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