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동, 체제 수호는 내 일 아니다?
조중동, 체제 수호는 내 일 아니다?
  • 미래한국
  • 승인 2015.08.07 16: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우석의 시시비비] ‘제도권 범털 언론’ 조중동의 황혼

사회 전 부문에서 좌편향 가속화되면서 조중동, 웰빙 지면 내지 좌파 상업주의로 전락 

●조선일보, 올해 만해(卍海)대상 수상자로 통혁당 사건 때 무기징역 받은 신영복 선정
●조정래를 “민초(民草)들의 삶과 사랑, 투쟁의 역사를 담아낸 작품”을 쓴 작가로 둔갑시킨 조선일보
●지리산 빨치산 출신으로 통혁당 사건, 구국전위 사건에 연루된 류낙진을 ‘통일운동가’로 보도
●87년 체제 이후 ‘제도권 범털 언론’이 된 조중동, 대한민국의 가치 등져

▲ 조우석 문화평론가·미래한국 편집위원

“우파가 ‘안티조선’운동 벌여야”란 제목으로 <미래한국>에 기사가 나간 뒤 모처럼 속 후련한 글을 읽었다는 소리를 적지 않게 들었다. 공식적으론 그게 첫 문제 제기일 텐데, 이런 파천황(破天荒)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꽤 목 말라 있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의 변질이 오래 전부터 진행돼온 구조적인 사안이라는 진단에도 별 이견이 없었다. 

주위의 이런 반응을 쉽게 일반화할 순 없으리라. 단 이 1등 신문에 대한 불만이 어떤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이번 글은 논의의 확장을 위한 것인데, 지난 10년은 물론, 이른바 민주화를 가져온 1987년 체제 이후의 구조적 측면까지 두루 음미해볼 생각이다. 

중간 결론을 미리 밝히려 한다. 조선일보의 변질이란 한국 사회에 가득한 속물적 리버럴리즘의 전형적 반영인데, 그래서 더 위험천만하다. 속물적 리버럴리즘이란 우파적 가치,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나머지 민주화 세력 내지 양심 세력으로 위장한 좌익에게도 헛된 관용을 베푸는 정치적 바보짓을 일컫는다.

유감스럽게도 그 따위 망국적 흐름을 민주주의이자, 정치적 올바름인 양 착각하는 오염된 지식 정보의 쓰나미가 87년 체제 이후 언론·문화·교육계 전체를 덮쳤다. 그게 지금은 대세로 굳어졌다. 조선일보면의 변질은 여기에 편승하려는 기회주의적 태도라는 게 움직일 수 없는 내 판단이다.

그럼에도 이 원고는 특정 신문에 대한 호오(好惡) 내지 포폄과 구분된다. 매체비평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 선진화란 목표와, 한반도 평화를 추구하는 정론지(正論紙)의 역할을 모색해보는 담대한 제안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고대하는 21세기를 추동할 수 있는 창조적 지성, 그리고 책임 있는 시민윤리를 지금 이 땅 위에서 창출해낼 수 있지 않을까?

좌파 신영복에게 상 주고, 소설가 조정래 추켜세우고

지난 글에서 나는 조선일보 지면의 곳곳에서 물이 샌다고 지적했는데, 그런 사례는 실로 부지기수다. 정신 줄 놓은 지면 제작은 북한 퍼주기 캠페인 같은 아젠다 세팅의 문제점, 사설-기명 칼럼의 난맥상은 물론이고, 요즘 각종 문화사업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최근 우릴 놀라게 했던 게 올해 만해대상 수상자로 좌파 신영복(성공회대 석좌교수)을 뽑은 점이다. 

만해(卍海) 한용운을 기리는 이 상 운영을 주관하는 게 조선일보인데, 얼마 전 발표한 2015 만해대상 수상자의 한 명에 신영복을 포함시켰다. 그게 만해대상 심사위(위원장 강천석 조선일보 논설고문)의 결정이란다. 자가당착도 유분수다. 위장 지식인 신영복의 머리에 또 하나의 월계관을 씌워줘서 대체 무얼 하자는 것인가?  

신영복. 역사상 최대 간첩단인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그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 저술 행위로 젊은이들에게 끼친 해악은 무시무시하다. 그리 나쁘지 않은 외모에 지적(知的) 센티멘털리즘을 적절히 섞어 의외로 파괴적 영향력을 널리 미쳤다. 이걸 견제해야 할 조선일보가 신영복에게 영합한 건 그래서 더 짜증나는 노릇이다(물론 신영복을 띄운 것은 2000년을 전후해 장기 연재를 했던 중앙일보였다).

조선일보가 신영복 선정에 그렇게 떳떳하다면, 내년에도 그렇게 하길 이 지면을 빌려 나는 권유하려 한다. 신영복을 ‘빨간 대학’ 성공회대로 이끌었던 위인인 이재정 전(前) 성공회대 총장(현 경기도 교육감)이나, 김일성을 “자수성가형 민족영웅”이라고 떠벌리는 그 학교의 종북 교수 한홍구 등을 연속해 수상자로 선정하라. 그게 차라리 일관성이 있지 않을까?

▲ 조선일보가 조정래 원작의 뮤지컬 ‘아리랑’을 후원한다는 것을 알리는 사고(社告).

조선일보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데, 최근 또 다른 충격은 소설가 조정래 원작의 뮤지컬 ‘아리랑’에 대한 후원이었다. 1면에 버젓이 올린 사고(社告) 자체가 가관이었다. 천문학적 수치인 1300만 부를 팔며 이 땅의 젊은이를 오염시킨 대하소설 3부작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쓴 반역의 소설가 조정래의 실체를 모르고 이런 걸 하는 것일까?

조정래야말로 운동권 의식화의 주범인 <전환시대의 논리>의 리영희, 계간 <창작과 비평>을 발행해왔고, 종북-좌파연대의 핵심인 원탁회의를 이끌고 있는 백낙청 등과 동급의 좌익형 인간이다. 그런 반역적 위인을 덮어주는 게 이번 ‘아리랑’ 후원이다. 그러니 조선일보는 조정래를 “민초(民草)들의 삶과 사랑, 투쟁의 역사를 담아낸 작품”을 쓴 작가로 둔갑시켰다. 다음은 7월 16일자 1면에 등장한 사고(社告)의 앞이다.   

“작가 조정래의 동명 대하소설을 뮤지컬화한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파란의 시대를 살았던 민초(民草)들의 삶과 사랑, 투쟁의 역사를 담아낸 작품입니다. 준비 기간 3년, 제작비 50억 원을 들인 뮤지컬 ‘아리랑’은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로” 운운…. 

지난 번 글에서 북한 퍼주기 캠페인을 두고 ‘정신착란 수준의 지면’이라고 나는 지적했는데, 이 또한 그 못지않다. 속물적 리버럴리스트들, 쉽게 말해 강남좌파들은 학계-언론계-정계-종교계에 널리 퍼졌고, 이미 제도권의 범털, 즉 중진-중견으로 성장했다. 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사회와 사상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좌익에 대해 관용을 떠들어대고,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의 무장 해제를 재촉한다. 

그런 태도를 훌륭한 처신이라고 생각할 텐데, 그래서 더 아찔하다. 그건 지적(知的) 파산이자 정치적 기회주의에 불과하다는 걸 19~20세기 세계 지성사가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런 흐름이 이 땅위에서 벌써 30년을 넘긴 국면인데, 이건 안 된다. 건국 이후 대한민국의 가치를 이렇게 조중동이 앞장서서 배반해도 되는 것일까? 이건 숫제 자기모멸의 수준이다.

빨치산 류낙진을 통일운동가로 둔갑시킨 10년 전 조선일보 

상식이지만 건국 이후 대한민국이 걸어왔던 길이란 인류 최악의 전체주의 체제인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어적 민주주의, 즉 반공이었다. 그래서 20세기 신데렐라 국가로 일어섰는데, 이 국면에서 조중동이 도끼로 자기 발등을 찍고 있는 황당한 모양새다. 

그럼 조선일보를 포함한 종이신문이 망가지는 현상은 언제부터인가? 실은 노무현 정부 등장 이후 신문이 망가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좌파 정부가 종이신문의 위력을 떨어뜨리려고 인터넷 매체들과 다음커뮤니케이션 등 포털에 대한 지원을 개시했는데, 그게 썩 잘 먹혀들었다. 

그때 좌파들이 안티조선 운동을 개시하면서 종이신문에 대한 독자들의 신뢰를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신문은 매출액도 2002~2003년을 정점으로 크게 꺾였지만, 지면의 질적 저하도 불가피했다. 결정적으로 사회 전 부문에 걸쳐 좌클릭이 대세였다. 이 통에 조선일보도 흔들렸다. 대한민국이 지켜온 가치를 수호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나머지 좌파에 동조 내지 투항하는 지면을 속속 등장시켰는데, 그런 저열한 지면의 하나를 나는 기억한다. 

▲ 빨치산 류낙진을 통일운동가로 둔갑시킨 조선일보의 문근영 관련 기사(2005년 4월 15일자).

꼭 10년 전 당시 국민 여동생 문근영과의 인터뷰 기사였는데, 당시 그걸 본 적지 않은 이들이 분노했다. 여성 불문학자 한 분은 지금도 그 얘기를 꺼내며 목소리를 높이는데, 문제의 기사는 ‘문근영, 소녀와 숙녀 사이에 그녀가 있다’란 보도다. 꼭 10년 전인 2005년 4월 15일자 문화면, 문제가 된 대목은 다음과 같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1주일 전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아주 어릴 적 치마 속에 바나나랑 빵을 숨겨가지고 아장아장 뛰어오던 제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더라고요. 할아버지가 장기수로 수감 중이던 때였는데, 사식(私食)을 금지하던 시절이었대요. 많이 울었어요.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게 많다는 걸 배웠죠. 느끼고 생각하고 보는 게 전부가 아니었구나 하는 것.”

문근영의 외할아버지 류낙진에 대한 언급인데, 기사의 톤부터 장기수에 대한 동정을 유도한다. 하지만 그는 엄연히 지리산 빨치산 출신이다. 그리고 악질이다. 출소 뒤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71년 다시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94년 구국전위 사건에 다시 얽혔으니 엄연한 반(反) 대한민국 노선을 걸었다. 문제는 이어지는 기자의 코멘트인데, 실로 어이없었다.

“열흘 전 근영의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다른 이념 때문에 30년가량 장기수로 복역했던 통일운동가 류낙진 씨다.”

문근영이 장기수라고 포장했지만, 담당 기자는 한 술 더 떠서 통일운동가로 치켜세우다니! 지금 전교조가 그 따위 교육을 학교 교실에서 벌이고 있지 않은가? 단 두세 줄 문장 안에 “다른 이념 때문에 복역했다”는, 남 말하는 듯한 표현도 심히 거슬린다. 기자 역량과 함께 그 신문의 데스크 기능이 고장 났다는 증거다. 이미 당시 편집국 풍토는 바뀐 지 오래였다.

이게 일과성 지면만은 아닌 게, 조선일보의 그 지면 3년 뒤 문근영의 가족사가 다시 문제됐다. 우파 네티즌들이 그걸 문제 제기하자 당시 민주노동당까지 나서 문근영을 비호했다. 그들은 2008년 11월 “우리나라의 굴절된 역사를 민족사의 아픔으로 받아들여야지, 이를 빌미로 문근영 씨에 대한 흑색선전을 해선 안 된다”며 자못 근엄한 성명서를 냈다. 2015년인 지금 그런 태도가 쿨한 것으로 통하는 시대다.

실은 조선일보엔 우파 매체라는 딱지를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오래 전부터 자리 잡아 왔다. 노무현의 홍위병인 좌파들이 주도한 안티조선 운동이 먹혀들긴 먹혀든 셈이다. 이 통에 자기들만의 고유한 DNA를 버리고서라도 ‘열린 보수’ 운운하는 중앙일보의 스탠스를 은근히 따라하려는 심리다. 그거야말로 중앙일보 2중대 노릇을 하려는 바보짓이 아닐까? 

그걸 보여주는 정황적 증거도 있다. 10여 년 전 월간조선 편집책임자들이 기획안을 조선일보 본사 간부들에게 보여주는 정례적 회의석상 분위기가 참 거시기 했다. 그때마다 못 볼 것을 본 듯 얼굴을 찡그려 핀잔하는 게 보통이었다. 

“쟤네들은 왜 저렇게 꼴통 짓만 골라가며 하는 거야?” 

그런 게 조선일보의 지난 10~20년 새 형성된 집단 정서다. 좌익 앞에 투항하는 거대한 허위의식인 속물적 리버럴리즘은 이제 체질이다. 조선일보는 특유의 전투적 성격을 잃었고, 월간조선은 지금 많은 월간지의 하나로 전락했다. 그건 중앙 동아도 닮은꼴인데, 지금 조중동의 동반 위기는 이런 ‘배신의 지면 제작’ 분위기 속에서 자초한 위기 상황이다.

서울시장 박원순 의혹에 전 언론이 침묵하는 이유

조중동을 포함한 한국 언론의 고질적인 좌편향은 세상이 다 아는 것이지만, 이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던 계기가 따로 있다. 약속이나 한 듯 신문-방송-인터넷 신문 등 거의 모든 매체가 입을 다물고 있는 서울시장 박원순의 아들 박주신을 둘러싼 병역 의혹을 둘러싼 법정 싸움에 대한 기이한 ‘침묵의 카르텔’이 그렇다.

요즘 법정에서는 이 사안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이런 메가톤급 뉴스를 전하는 매체가 인터넷신문 뉴데일리와 미디어펜 등으로 극히 제한됐다. 당사자 박원순의 꿍꿍이도 모르겠고, 영국에 체류 중인 박주신의 동태도 미궁이다. 박주신의 허리 디스크를 찍은 3년 전 MRI 사진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대리인을 고용해 찍었던 것인가도 완전 깜깜이다.

박원순이 회복 불가능한 정치적 파산선고를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왜 언론들은 침묵할까? 답은 자명하다. 나는 지난 5월에 썼던 칼럼에서 “전 매체가 좌편향 언론으로 변질됐고, 이들은 좌파 정치인 박원순의 이름 앞에 꼬리를 내리는 구조다. 이제 한국 언론에 진영 구분도 굳이 의미 없다”고 맹공을 했는데, 물론 지금도 완전히 같은 판단이다.

박원순 부자(父子) 의혹을 둘러싼 침묵을 깨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1등 신문 조선일보, 국가기간방송 KBS, 국가기간통신 연합뉴스 등 3각 편대만 올바른 언론 노릇을 하면 전국의 모든 매체가 따라온다. 안타깝게도 그게 쉽지 않은 게 현실인데, 지금 상황에서 우리는 안다. 그게 실은 조중동을 넘어 지식사회의 거대한 위선과 허위의식의 지적(知的) 풍토를 반영한다.

또 바닥을 드러낸 시민윤리와도 일맥상통한다. 이 통에 누구도 대한민국 체제를 수호하려 하지 않고, 정치지도자 역시 피와 땀과 눈물을 국민들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경제의 경우도 그러해서 더 이상 성장과 수월성을 말하는 이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럴싸한 평등과 분배정의, 균형발전 따위를 떠벌이는 유사 강남좌파형 인간으로 몽땅 변질됐다. 

사회 전 부문에서 좌편향이 가속화되면서 조중동도 웰빙 지면 내지 좌파 상업주의로 돌아서 세상에 적당히 영합을 하는 것이 바로 지금이다. 이런 흐름을 새삼 보여주는 게 지난 1~2년 빅3 신문이 장기 연재를 했던 인물이 아닐까?

일테면 조선일보는 TV조선을 통해 포스코의 박태준 관련 드라마를 만들었다. 중앙일보는 김종필 회고록을 연재하는 중이다. 동아일보의 경우 무엇이었더라? 이종찬 회고록이다.
김종필 박태준 이종찬, 이 셋의 공통점은 DJP(김대중+김종필) 연대, 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대와 관련된 인사란 점이다. 

이들 셋은 권력을 향한 기민한 합종연횡은 있었지만, 한국현대사의 뼈대인 건국과 부국(富國)통으로 분류하긴 힘들다. 뭔가 짚이시는 게 있지 않던가? 최근 들어 조중동이 추구해왔던 가치란 게 이승만이나 박정희로 대변되는 선 굵은 우파의 가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30년 전 ‘우익은 죽었는가?’를 외친 양동안 교수 짓밟은 것도 조중동

그 역시 속물적 리버럴리즘이란 바이러스에 오염된 결과이고 오래 방치될 경우 이 나라의 국가기구와 제도권의 무력감이 더 더 깊어질 건 불 보듯 뻔하다.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시는가? 그렇다면 다음 한 정치학자의 적절한 지적을 경청해볼 일이다.

“우익이 이처럼 무력감을 나타내고 있는데, 좌익의 체제전복 활동을 억제하는 국가기구도 무력감에 빠져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혁명적 좌익과 간첩들이 날뛰고 있어도 적극적으로 단속하고 체포하려는 노력이 별로 전개되고 있지 않다. …국가보안법과 같은 체제 유지를 위한 법적 장치나, 대공기관들이 좌익의 선동에 말려든 야당과 언론에 의해 비난의 집중포격을 당하고 있다. 정부도 그런 비난에 영향 받아 체제 전쟁에서 정부는 거의 무장 해제에 가까운 상태에 접근했다.”

어떠신지? 최근 한국 사회의 현안이던 국정원 해킹 사건에 대한 언급으로 들리실 것이다. 선동 언론과 야당 새민련에 대한 지적이라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둘 모두 아니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그 다음해인 1989년 단행본에 나오는 한 정치학자의 글임을 이 자리에서 귀띔해드린다. 그게 당시 펴냈던 책 <한국의 정치현실>(삼화출판사 펴냄)에서 양동안 교수가 한 말이다.

실은 ‘속물적 리버럴리스트’에 대한 분석도 그의 책에서 차용했음을 밝혀둔다. 그나저나 놀라운 건 좌클릭 현상이 무려 30년 가까운 흐름이라는 점이다. 당시 그런 통찰이 경이롭다는 판단과 별도로 반(反)대한민국적 성향의 좌익분자를 관용하는 게 좋다고 부추겨온 지식인들이 많아지고, 이런 목소리에 묻혀 공권력이 무력해진 채 2015년 여름, 여기까지 등 떠밀려 왔다. 그게 우리의 현주소다.

맞다. 한국 사회의 위기란 민주화를 가장한 87년 체제 이후 지속적으로 높아져왔다. 그래서 조선일보를 포함한 조중동의 배신이 더 참담하다. 이 글이 매체비평을 넘어서 한국 사회에 대한 통찰이라고 강조했던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이제 글의 마무리인데, 속물적 리버럴리즘이란 양 교수가 그의 생애사에서 중요한 사건을 겪으며 깨친 것임을 일깨워드리고 싶다.

그래서 더 의미심장한데, 모든 일은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던 글인 ‘우익은 죽었는가?’란 글을 1988년 발표한 뒤 벌어졌다. 당연히 당시 야당 지도자는 그의 글을 “정신적 피해망상증 환자의 글”이라고 비난했다. 그 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교육부 장관을 찾아가 당시 그가 속해 있던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직을 파면하라고 윽박질렀다.

연구원 학생들과 동문회까지 “용서받을 수 없는, 학문의 이름을 빈 범죄 행위”라고 그를 비난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자는 목소리를 이단시하는, 실로 엉뚱한 상황 전개 속에 그는 고립무원 상태에 빠졌는데, 희한한 건 조중동을 포함한 신문들이었다.

“언론들도 저를 마구 짓밟았지요. 그래서 깜짝 놀랐습니다. 왜들 이러는가 하고…. 글을 쓸 당시 좌익이라 분류한 사람들, 좌익하고 제휴한 사람들, 속물적 리버럴리스트들은 틀림없이 저를 비판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분류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비판하니까 어리둥절했습니다. 정당이나 언론의 일방적인 매도-비판에서 저를 섭섭하게 한 대목은 저를 극우로 몰아 부친 것이었습니다.”(256쪽 일부 문장 발췌)

그게 진실이다. 재확인하지만 저들이 속물적 리버럴리즘에 오염된 것은 30년 전부터 깊숙이 진행돼 왔다는 증거로 더 이상 생생한 게 또 있을까? 정말 이 글의 마무리다. 반복해서 지적했지만, 선동적 좌파 언론이 태생적 성격 때문에 기회 나는 대로 반(反)대한민국-반(反)체제로 치닫는다면, 조중동은 또 다르다. 기민하게 움직이는 사주(社主)의 이익, 시야 짧은 좌파 상업주의 그리고 한국 사회 전반의 좌클릭 분위기 속에서 휩쓸려가는 게 지금이다.

좌익 언론의 불장난도 위험천만하지만, ‘제도권 범털’인 주류 언론도 심히 역겹다. 이런 상황에서 KBS 등 지상파와 종편이 합류하고 뉴스 소비의 90%를 점유하는 대형 포털이 가세하면, 삽시간에 언론 망국(亡國)의 디스토피아가 연출된다. 대한민국은 지금 명백한 체제 위기(regime corruption) 라는 경고를 지금 상황에서 재삼 밝혀둔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